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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Dec 08. 2023

삶은 '나'로 돌아가는 평생의 여정이다.

철학수업 후기 :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자기 배려와 자기 실천

     

푸코는 우리가 “생명권력”에 의해 훈육된 상태라고 했다. 생명권력은 특정한 권력이 우리의 정신과 신체에 개입하여 우리의 삶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권력을 말한다.  우리 자라온 문화환경, 학교 교육, 사회적 관습 등 우리는 사회 속에서 길러지면서 사회가 원하는 상을 내면화한 길들여진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끔찍하다. 내가 욕망하는 것이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느끼는 것이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니 말이다.     


푸코는 평생을 훈육된 존재에서 해방하여 진정한 ‘나’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주체의 해석학>에서는 ‘자기 배려’라는 개념을 통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자신을 만나고 그러한 자신을 긍정하는 자기 실천방법을 담고 있다.

     

자기 실천은 수정(회복)해야 하지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미 존재하는 (내면적 악)을 수정하데 있습니다......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기가 바로 이 자기 실천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이고 또 중심 테마이기도 합니다. (P. 132)     


자기 실천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존재하는(내면적 악)을 수정”하는 데 있다.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 없는 자신이 되는 것이 자기 실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개종과도 같은 것이다. 훈육된 자신에서 훈육되지 않은 자신이 되는 것은 종교를 바꾸는 것과도 같을 정도로 신념체계와 행동양식이 모두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마찰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고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자기 배려라는 것이 흔히 말하는 ‘배려’처럼 위로하고 안아주고 선물 주는 따뜻한 것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실천’을 인내하고 연습하여 얻어내는 것이다.


<주체의 해석학>에서는 자기 배려에 이르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다. 감정과 욕망을 받아들이되 균형(정화)을 찾아가야 하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명상하고 운동(집중)해야 하며, 외부 세계의 쓸데없는 관심을 끊고(은둔)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더라도 유혹을 끊어 내어야(인내) 한다. 이것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들이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해 왔던 수행법이다.  

   

이런 수행법들의 끝에는 ‘죽음 명상’이 있다. 죽음 명상은 “마지막 날처럼 자신의 생을 사는 것"에 있다. 죽음은 살아왔던 방식(훈육된 나)대로 살지 않고 더 가치 있는 일(훈육되지 않은 나)을 찾아 실천하게 한다. 미래에 대해 쓸데없이 걱정하지 않게 하고 현재에 대한 집중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배려를 통해 진정한 주체가 되는 과정은 죽을 때까지 실천해야 하는 평생의 과정이이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강독의 마지막에 있었던 '죽음 명상'이 마음에 남았다. 만일 내게 주어진것이 단 하루 뿐이라면 난 어떤 날을 보낼 것인가? 우선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지만 금세 페이드 아웃이 되었다. 무엇보다 난 미워했던 마음과 화해를 하고 싶다. 미움과 원망을 남긴 채 가고 싶지가 않다. 그리고 편지를 쓸 것 같다. 고맙고 그리웠던 사람에게 편지를 쓸 것 같다. 글을 모두 쓰고 난 후에는 좋아했던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싶다. 터너의 그림이면 좋겠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가 듣고 싶다. 정말 이것뿐일까? 아무래도 이것은 허영이다. 아마 하루밖에 남지 않은 이 상황을 억울해하며 울고불고 짜느라 반나절을 보낼 것 같다. 어디선가 귓전에서 "거봐, 내가 이미 말했잖아."라고하는 철학자의 환청도 들리겠지. 아무래도 며칠 더 시한부를 연장해 봐야겠다.


1주일을 더 산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바다를 보러 갈 것 같다. 산에도 한번 갈 것 같다. 바람 한 번 더 맞고, 나무 한 번 더 안고, 꽃 한 번 더 보고 싶다. 한 달을 더 산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이전에 가봤던 장소에 다시 가 볼 것 같다. 내가 만난 소중한 것들을 다시 만나 인사 나누고 싶다.  만일 몇 개월을 더 산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안가 본 곳을 여행할 것 같다. 미술관이 있는 곳, 바다 빛깔이 예쁜 곳, 모래 빛이 아름다운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 터너의 <테메레르의 전함>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들으며 사랑하는 이와 춤추고 싶다.

    

1년을 더 산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책을 쓰고 싶다. 산발적으로 떠올랐던 아이디어 중에 딱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때는 애도에 대한 회고록을 쓸 것 같다. 내가 사랑했던 것과 만나고 이별했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책 쓰기를 생각하니 마음이 차오른다. 아마도 난 흔적을 남기고 싶은가 보다. 내 수명이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목이 콱 메어온다. 실상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고 하고 싶은 것도 많지 않구나. 생각이 좀 더 단순해지는 것 같다.  

   

'죽음 명상'이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명상은 아니라고 했지만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상상에 자연스레 빠져들게 되었다. 내가 임종 직전에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앞서 써 놓은 것들을 마치고 삶이 정리된 상태라면 마음이 편안해질까? 만일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면 가슴이 아릴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 앞에서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을 거다. 아이들이 덜 서럽도록, 덜 불안해하도록 담담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 기분 좋게 작별하고 싶다. 눈 뜰 기운도 없는 상태라도 그런 생각을 할 것 같다.     


임종 중에도 귀는 마지막까지 열려 있다고 한다. 아버지도 그랬다. 임종으로 향하는 며칠 간의 시간 동안 내 목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다.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럴 것 같다. 할 수 있는 몸짓을 할 것 같다. 그렇게 내 몸짓을 눈치채 준다면 내 손을 가져다가 자신들의 얼굴에 가져다주면 좋겠다. 그렇게 그들의 얼굴과 몸을 만지며 가고 싶다. 이 생각을 하고 나니 죽음의 순간이 그렇게 두렵지 않아 졌다. 실제 몸이 약해지고 아프면 지금보다는 더 흔들릴 것이다. 그러니 슬플 때 기쁠 방법이 있어야 한다.     


죽음 이후에 삶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에 음악을 들으며 했던 심상 명상이 생각난다. 그때 죽음 이후에 대한 상상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자연이 되어 다시 태어났다. 꽃도 풀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의 에너지로 태어났다. 그때 나는 무엇도 아닌 그 자체였다. 온 세상과 연결된 기분이었다. 그때 내가 보고 느낀 감각을 계속 기억하려고 할 것이다. 자연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이전보다 자연을 더 많이 바라볼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죽어서 먼지로 돌아간다는 말이 불쑥 흘러나오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한 달간 하고 나니 전보다 죽음의 두려움이 작아졌다. 오히려 지금은 삶을 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커진다. 미래보다 현재에 더 집중된다.     


죽음 명상은 하나의 관념이다. 관념은 휘발되고 만다. 너무 가벼워서 금세 사라지고 만다. 이제 몸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실천을 해야 한다. 1주일도, 한 달로, 1년도 아닌 오늘 딱 하루의 삶이 남았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많은 일을 할 수가 없다. 허황된 계획을 꾸밀 수도 없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크지 않다. 작더라도 꾸준히 해 나가야 한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내일이 와도 계속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30년 후에도 계속 지금과 같은 자리에 있을 뿐이다. 잘 죽기 위해 지금 오늘을 잘 보내야 한다.





나로 돌아가는 여정


늙기 위해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P. 135)     


늙는다는 것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 시간을 기다리고 인내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환희에 찬 봄을 지나,뜨거운 여름과 폭풍우를 묵묵히 견디고 가을의 거친 바람에 떨어지는 과실은 얼마나 달콤한가. 추운 겨울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봄이 되었을 때 겨울이 싹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시간을 견뎌 냈는지 알게 된다. 여름이 되었을 때 봄에 꽃이 피고 진 이유를 알게 된다. 가을이 되면 여름날의 뜨거움과 폭우가 가져온 의미를 알게 된다.  

   

철학을 배우면서 과거에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묵은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불행했던 사건들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슬픔 속에 감추어져 있던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은 알지 못하는 문제도, 지금 고난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미래의 시간이 되면 그 의미를 드러낼 것이다. 내가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려 했는지, 어떻게 견뎌냈는지 그 의미를 알게 할 것이다. 과거에는 몰랐던 많은 것을 지금 알게 된 것처럼 미래에는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될 것이다. 잘 늙고 싶다. 기쁘게 늙고 싶다.  


그것(자기)은 오로지 행위 주체로서의 영혼입니다. 즉 그것은 신체, 신체의 기관, 신체의 도구들을 사용한다는 한에서 영혼입니다. (P. 96)     


자기는 존재 자체가 아닌 사용하는 주체로서의 자신이다. 나는 나로 돌아가기 위해 평생을 애써야 하며 그 과정에서 나는 주체가 되어 가는 것이다. 나는 운이 좋게도 쓸쓸한 필연성을 포기시키는 스승과 자기 배려의 공동체를 만났다. 이대로 멈추지 않고 가면 된다. 훈육된 나와 단절하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나를 만나기 위해 계속 가면 된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나를 만난다는 말은 매우 무섭고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왠지 그것은 괴물인 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나를 만나는 일인 것 같다. 어쩌면 그 만남 끝에는 자연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난을 자처해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연과 어울리는 사람, 자연 속에서 나를 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연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렇게 늙음이라는, 자연이라는 안식처로 들어가는 일인가 보다.

    

그렇게 나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처음 배를 띄우기까지 정말 무서웠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가짜인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나 역시도 환상인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삶의 진실을 말하는 철학이 내 삶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끌림, 공포, 당황, 공황과 같은 수동적 감정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견디다 보니 지금은 바다 한가운데 어디쯤 와 있게 되었다. 앞으로도 수많은 감정이 나를 덮치려고 할 테지만 이제는 그것에 미리 쫄지 않는다. 나에게는 항해법이 닮긴 철학이 있고 함께하는 선원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보고 말았다. 내 눈에 펼쳐진 아름다운 빛깔의 하늘과 바다를 보고 말았다.

 

삶의 사건에 대비할 수 있도록 잘 준비해서 가려고 한다. 큰 파도가 오더라도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제대로 읽고 쓰고 듣고 말하면서, 배운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가려고 한다. 기쁨에 도취하지 않도록 그리고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나를 잘 돌보며 데리고 가려고 한다.  

   

그 언젠가 죽음의 운명이 내게 삶에 관해 묻는다면 “나는 충분히 살았다”라고 말하고 싶다. 당장 오늘 저녁에도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는 충분히 살았나?”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기 위한 삶을 살고 싶다. 오늘도 읽고, 쓰고, 걷고 그리고 '너'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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