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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Nov 18. 2023

'자유'가 자유롭기 위하여

푸코 <생명권력>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


나는 늘 답답하고 불편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통제가 답답하게 숨 막혔다. 학교에서는 학교의 규율이 답답했고, 사회에 나와서는 사회의 규범들에 불만이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남들 하는 대로 하며 살았다. 정해진 때가 되어 진학을 했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했다. 그리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부지런히 돈을 모아 집을 샀다. 나는 집도 학교도 회사도 답답하다고 하면서 매일 집으로 학교로 회사로 갔다. 그렇게 가기 싫다고 하면서도 막상 그곳에 들어가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곳은 내가 가야 할 곳이고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곳이 답답하고 싫기도 했지만 그곳 빼고는 다른 곳이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나의 세계에는 집-학교-회사 밖에 없었다.     


답답함이 극에 달한 어느 날 깊은 우울이 찾아왔다. 뭔지 분명하지 않지만 내가 상자 안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그냥 죽음뿐 일 것 같았다. 밀폐된 상자에 짓눌려 죽을지, 아니면 내가 알아서 죽음을 선택할지에 대한 두 개의 선택만 남은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드는 순간 무서웠다. 왠지 악수를 둘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파국적 사고를 차단했다. 그리고 사직서를 썼다.


주변에서는 말렸다. 회사에서는 일로 인정받고 있었고 그에 대한 보상도 잘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고생을 해놓고 이제 와서 그만두는 것이 아깝지 않니? 너의 지난 경력은 어쩔 건데? 반대로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거나 먹고살만한 형편인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만류나 조롱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난 살기 위해 그만두는 거였다. 사표를 쓰지 않으면 진짜 죽겠구나 싶어 감행한 결정이었다. 대출금, 보험금, 생활비 같이 매달 날아들 청구서들도 더는 개의치 않았다.  

    

퇴사를 하고 나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유롭게 살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퇴사를 하고 나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시간만 많다면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난 시간만 많아졌을 뿐 그 시간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난 여전히 나의 의무에 매여 있었다, 엄마, 아내, 딸, 여자라는 이름에 매여 있었다. 나는 더 답답해졌다. 돈을 벌러 다니지도 않으니 가난에 대한 공포까지 밀려왔다. 직장생활이라는 조악한 인간관계라도 끊어진 난 나는 부랑자가 된 것 같았다. 혹시 돈이 문제였을까? 얼마간의 목돈이 생기고 빚도 갚게 되었다. 하지만 돈이 있다고 해서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결국 돈도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간도, 돈도 아니라면 대체 나는 왜 이리 답답하게 쪼그라들었던 것일까?  

    

르네 마그리트 <치유자> 캔버스에 유채, 1973, 47.6X31.3cm, 개인소장


나는 답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대학원에 진학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 시간은 가족들의 삶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시간에만 은밀히 움직였다. 나의 시간은 다른 가족들이 학교나 직장 등 집을 나서고부터 다시 집에 돌아오는 시간 안에 치러 내야 했다. 평일 낮에만 허락된 시간이었다. 누가 나에게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난 그 시간 외에는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에 집을 비우는 남편을 향해 밖으로 돈다고 비난했다. 그때는 내가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가끔은 주말에 친구를 만나고 싶기도 하고, 저녁에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 한잔을 먹고 싶기도 하고, 밤에 하는 공연에 보러 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 언젠가로 미뤄두었다. 지금 나의 일은 집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것에 충실했다.


대학원에 갈 때도 남편의 동의가 필요했다. 내가 없는 시간 집에서 아이를 봐줄 수 있는지 상의했다. 상의라고 표현했지만 이것은 허락을 구하는 것과 다름 아니었다. 남편이 싫다고 하면 아이를 맡길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의 동의를 어렵게 얻어 냈다. 학업을 위해 조기 퇴근을 승인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문제를 잘 인식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난 ‘상의’라는 표현을 써왔다. 그러나 상의라는 것은 의논을 하는 일이지 보고하고 허락해 주는 절차는 아닌 것이었다. 하지만 난 상의던 동의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조기퇴근 티켓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했다. 결혼이란 것은 일찍이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철학을 공부할 때 주말 수업이 있었다. 그 수업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일요일 저녁에 집을 나서는 일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상의'없이 결정했다. 예상대로 가족들의 반발이 있었다. 아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으며 남편은 나에게 무책임하다는 꼬리표를 붙였다. 마치 내가 근무지를 이탈하는 무책임한 직원이 된 느낌이었다. 맞다. 나는 근무지를 이탈한 것이다. 그래, 집은 내게 근무지였구나. 집은 내게 휴식처가 아니었다. 물론 집은 내게 안정감을 주는 곳이기도 했지만 일터이기도 했던 것이다.   

   

내가 불편했던 것은 가족들의 반발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주말 저녁에 공부를 하러 나오는 것은 마치 근무지를 이탈하고 땡땡이치는 직원의 기분이었다. 땡땡이를 치면 자유롭고 즐거워야 하는데 이상하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꿈속 등장인물은 엄마였다. 꿈속에서 나온 엄마는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나의 행동을 막아섰다. 엄마는 나의 행동에 도덕적 잣대를 대며 판단했으며 내게 처벌을 내리려고 했다. 그때 알았다. 내면화된 엄마가 나를 여전히  훈육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엄마는 내게 여전히 순종을 강요하고 있었다.




푸코의 '생명권력'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는 이런 나의 내적 상태를 잘 설명해 준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의 작동 방식의 역사를 추적한다. 군주제 사회에서 처벌은 공개처형과 같이 강한 공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18세기에 와서 처벌은 길들임(훈육)의 형태로 바뀌게 된다. 공개 처형하는 것보다 훈육이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훈육을 하는 권력자는 훈육받는 사람을 노예로 길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푸코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감옥설계 방법인 '팬옵티콘'에 대해 설명한다.     


팬옵티콘은 원형의 건물로 에워싸인 가운데 방을 감시하는 탑을 둔다. 그 탑에서는 한 사람이 각 방엔 있는 수만은 감금자들을 감시할 수 있다. 푸코가 팬옵티콘에서 주목한 것은  '감시'이다. 감옥은 단순한 감금이 아니다. 기상시간과 취침시간, 해야 하는 것, 소지품 등 행위 전반을 감시한다. 신체는 그 감시 체계에 순응할 수밖에 없게 된다. 푸코는 이런 감시가 감옥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팬옵티콘의 원리는 감옥, 학교, 가정 등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이렇게 일상에 스며든 감시는 우리 내면과 신체를 길들여 놓는다. 그랬기에 부모나 선생 혹은 다른 권력자가 하지 못하게 행동을 하면 죄책감을 느끼며 권장했던 행동을 하면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감시는 상벌을 통해 조련된다. 이러한 감시는 개인의 삶에서만 영행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푸코는 출생률, 사망률, 건강 수준까지 관리하며 인구조절가지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권력의 감시는 신체의 통제까지 개입하기 때문에 생명에 작동하는 권력 즉 '생명권력'이라 부른다. 생명권력은 몸과 마음을 지배하기에 군주권력보다도 더 무섭고 교묘하다. 폭력을 통한 통제는 저항할 수 있지만 내면을 깊게 파고드는 권력은 교묘하기에 인식하기도 저항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푸코의 논의를 받아들이기가 거북하다. 거시적 담론이라면 그래도 괜찮다.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좋은 렌즈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기득권에 대판 비판, 미디어에 대한 비판으로 그럴듯하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푸코의 렌즈로 내 삶을 보면 엉망진창이다. 쳐다보고 싶지 않다. 회피하고 싶다. 그것은 내 삶이 내 삶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 의해, 어떤 힘에 의해 길들여진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던 내가 완전히 부서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서진 그 자리에서 나를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팬옵티콘. 가운데 감시탑에서는 원형으로 둘러싸인 감방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러나 방에 있는 수감자는 탑안의 감시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생명권력의 대물림


엄마는 우리 가족만 사랑했다. 엄마는 우리 가족에서 확장된 사랑에 대해 금기했다. 강한 거부감을 보이셨다. 어머니 역시 그렇게 사셨고, 나는 그런 엄마를 보고 자랐다. 난 자라면서도 엄마가 지나치게 가족중심적인 것이 불만이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나도 가족중심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나도 엄마에게 길들여진 것이다. 엄마의 행동방식을 보고 자랐기에 다른 행동방식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그것이 가능한지도 몰랐다.


엄마 또한 아빠의 통제를 받았다. 엄마는 40년 만에 열린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남자동창이 나온다는 이유로 엄마의 동창회 참석을 막았다. 엄마는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치마를 입고 싶어 하셨지만 그런 옷은 고상하지 못하다고 입지 못하게 하셨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옭아맸고 서로 원하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서로의 억압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까지 정당화되지는 못했다. 엄마는 자신의 삶을 억울해하셨고 아버지는 엄마를 억울하게 만든 자신을 자해 수준으로 자책했다. 왜 엄마와 아빠는 '나도 못하니 너도 하지 마' 혹은 '너도 하지 마, 나도 안 할게'같은 주체의 동반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사회의 커다란 파놉티콘이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의 도리, 사람의 도리, 여자 남자에 대한 그 도리라는 것에 철저히 내면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난 우리 부모와 다를 수 있을까? 난 어떻게 부모의 삶에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나도 여전히 두렵고 무섭다. 사회의 감시가 무섭고 그보다도 내 안에 내면화되어 있는 생 권력이 더 무섭다. 이노무 생 권력이 나의 발을 붙들고 나를 나가지 못하게 하고 악몽에 시달리게 하며 불안하게 한다. 그렇다고 기존의 권력에 순응하자니 답답하다. 답답하지만 안정된 노예, 불안하지만 자유로운 사람. 어느 쪽으로 살아야 할지 이미 머릿속에서 답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렵다.




'자유'가 자유롭기 위하여


내게 힘이 생기면서 나 또한 감시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내 안에 길들여진 생권력으로 아이들을 감시한다. 이게 옳아, 이렇게 살아야 해 라면서 내 안의 작동원리를 다시 학습시킨다. 내가 정말 지긋지긋해하며 답답해했던 세상의 논리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나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내게 심어 놓았던 권력을 이용하여 아이들을 다시 옭아 매고 있다.  이 대물림을 나에게서 끊어 내야 한다. 끊지 못하더라도 그 영향력을 최대한이라도 줄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좀 더 많은 경험을 하며 원하는 삶을 선택해 나갔으면 했다. 공부 말고도 운동, 미술, 음악을 하도록 권했다. 아이들도 내가 보통의 엄마들처럼 공부하라는 말을 덜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딸은 말한다.  “엄마가 하고 싶은 건 엄마가 해. 내가 하고 싶은 건 내가 알아서 할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건 내가 하는 거다. 내가 그렇게 사는 걸 볼 때 아이들도 자신의 길을 찾아갈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거다.  

   

나는 부모의 낡은 팬옵티콘 대신 세련되고 근사한 최신식의 팬옵티콘이 되려고 한 것 같다. 아이들이 잘 사는 길을 가기 위해 계속 감시하는 멋지고 근사한 팬옵티콘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른은 감시하고 훈육하는 팬옵티콘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훈육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그것은 '등대'이지 않을까. 사회적 감옥은 바라봄과 보임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바라보는 것은 권력자이며 보이는 것은 훈육당하는 이다. 아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숨어서 감시하는 팬옵티콘이 아니라 나를 드내어 내 위치를 알리는 등대가 되고 싶다. 등대가 되는 것은 만만치 않다. 삶의 거센 파도를 견딜 수 있어야 하며 홀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칠 같은 검은 바다에서도 언제 찾아올지 모를 배를 위해 빛을 비추어야 한다. 바다에 아무도 없더라도 매일 같이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래야 등대가 된다. 그래야 어른이 된다.


등대의 빛이 어디에 가 닿는지 그곳을 정확히 볼 수 없을지라도 묵묵히 견디며 제 할 일을 하는 등대가 되고 싶다. 우선 내 할 일을 하자. 권력에 순종한 내가 아닌 자유로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을 조금씩 더 넓혀 가보자. 자유를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하여, 더 큰 자유를 더 기쁘게 맞이하기 위하여.


존 앳킨슨 그림쇼  <스카버러의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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