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자유’라는 말이 다시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여자라서 엄마라서 기혼자라서 나이 들어서 ‘자유’라는 말을 봉인했던 내게 강한 자극이 들어왔다. 봉인된 영혼이 각성을 위해 꿈틀거렸다. 잃어버린 말을 찾던순간 난 큰 두려움과 동시에 매혹을 느꼈다. 정신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 순간 태어날 준비를 시작했고 고통스러운 통증을 만들어 냈다. 새로운 정신이 태어나기 위한 산통이었다. 배 속에 아이가 들었는지 인식하지도 못했는데, 아이가 삽시간 만에 성장해 버려 내 몸을 찢고 나오려고 했다. 이를 거부할 방법은 없다.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미치는 길뿐이다. 속으로 곪아 터지거나 겉으로 발광하며 분출되거나이다. 두렵고 불안하고 무서웠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나는 매우 위험한 놀이기구 앞에 있었다. 젊은 시절 나는 위험한 놀이기구 타기를 좋아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월미도 바이킹을 타야 스트레스가 풀렸다. 월미도 바이킹은 하늘 위 절정에서 안전바를 풀어 버린다. 목숨 걸고 하는 광기 어린 유희이며 객기에 가까운 모험이다. 억압된 것이 많았는지 나는 극단에 공포에서 느껴지는 짜릿함을 즐겼었다. 한동안 타지 못했던 위험천만한 놀이기구가 꿈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젠 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내게 ‘자유’라는 말을 일깨운 타자가 놀이기구 앞에서 망설이는 내게 말했다. “할 수 있어요.” “방향을 바꾸어 앉으면 괜찮아요.” 그 말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다음날에도 혼란과 고통이 찾아왔다. 혼동 속에서도 꿈속에 그 말이 환청처럼 계속 아른거렸다.
“할 수 있어요. 방향을 바꾸면 돼요”
어쩌면 내 무의식의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프로이트는 꿈을 억압된 욕망과 기억이라고 했지만, 융은 꿈을 무의식이 보내오는 메시지라고 했다. 융에 따르면 꿈에 나오는 대상은 꿈을 꾸는 사람의 자아와 욕망의 변형이다. 내 꿈에 나온 이상한 타자는 어쩌면 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나의 바람, 나의 욕구, 나의 희망의 변형이 아닐까? 타자가 내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의 바람과 욕구에 의해 내 심장이 요동치는 것은 아닐까? 내 무의식은 내 의식보다 더욱 섬세하고 직관적으로 나의 바람을 알아챈 것이 아닐까?
나를 매혹시켰던 타자. 내 삶에서 타자는 무엇이었을까? 자유로운 바람을 다시 느껴보기 위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다. 나를 매혹시켜 흔들며 두려움도 물리치게 했던 타자의 흔적을 찾아 과거로 시간여행을 했다. 옛날 기억을 상기시키며 글을 쓰고 추억이 깃든 장소에 찾아가 걸어 보았다. 내 삶의 많은 것들이 콘크리트 속에 봉인되어 있었다. 난 꿈틀거리며 약동하려는 내게 시멘트를 들이부었다. 성공을 하겠다는 야심에 이글거렸고 먹고사니즘에 항복했다. 그러는 동안 순수했던 내 영혼은 상처를 받고 움츠려 들었다. 그렇게 약해빠진 영혼은 다시 콘크리트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게 되었다. 난 나를 다시 돼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몇 년간의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잘못 살아온 시간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가 만들어놓은 나만의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 안에서 사는 삶은 행복하지 않다. 난 바깥세상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세상을 봤기 때문이다. 성 밖에 나오기 위해 성을 부서야만 했다. 출구가 없는 성이었다. 내 세계를 부서야 다른 세계가 열릴 수 있었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지만 그 길로 가는 것이 이내 무섭고 두려웠다. 발을 조금만 잘못 디뎌도 지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것은 여전히 나를 제대로 만나보지 못해서였다. 당시에는 떨어져 죽을 것 같은 두려운 마음에 위축이 되어 그 순간을 충분히 살아내지 못했다. 첫사랑 같이 미숙하고 어리석은 사랑이었다. 마음만 앞선 사랑이었다. 하지만 내 맘대로 되지도 않고, 벅찬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가고 싶지는 않았다. 혼란스럽더라도 무의식의 심연에서 날아온 메시지를 믿고 싶었다. 아니 이미 믿고 있었지도 모른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못했을 뿐 믿음은 언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재했다. 그 믿음은 타자를 믿은 것일까? 아니면 나를 믿은 것일까? 누구에게 향한 누구로부터 시작된 믿음이었는지 이젠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나는 무언가에 부름을 받았고 그 부름을 따랐으며 지금은 방향이 바뀌었다.
앨버트 비어슈타트 <일몰, 사슴 그리고 강>, 1868, 오일에 캔버스, 13.34 x 21.59 cm
새로운 삶은 기존의 삶의 정리와 동시에 이루어졌다. 기존의 관계들이 끊어지게 된 것이다. 내가 떠나오기도 했고, 나를 떠나가기도 했다. 사지가 잘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나는 홀로 있는 시간을 선택했다. 침묵 속에 은둔했다.
침묵의 시간 동안 외부로 난 구멍을 막아버렸다. 누가 나를 도울지 무엇이 나를 위로할지 알지만 부러 찾지 않았다. 대신대부분의 시간을 책과 글쓰기 그리고 달리기와 하며 버텨냈다. 그 어둠 속에서, 과거로 닫힌 문과 새로 열리게 될 문 사이의 공백 속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그 속에서 내가 살기 위해 잡아먹은 수많은 타자의 무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하며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상냥하고 아름다운 말로 나를 위장한 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가진 아량이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닌 나를 보호하기 위한 위장술임을 알게 되었다. 자기기만이 오래되면 감정도 자신을 속인다. 그러나 이러한 기만이 발각되는 순간 기만의 껍질은 벗겨진다. 성숙 코스프레, 착함 코스프레가 그제야 절정을 찍고 종말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이별 앓이를 하는동안 사랑이 무엇인지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매혹적인 타자에게 느끼는 감정은 과연 사랑일까? 내가 매혹되었던 타자는 단순한 타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타자에게서 내 삶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살고 싶었던 나, 내가 잃었던 나, 내가 되찾고 싶었던 나를 본 것이다. 내가 알아본 것은 타자가 아닌 나 자신이었다. 반가움에 성급함에 그리고 두려움 마음에 심장은 요동쳤다.
사랑은 그저 감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은 사랑함으로써 행해지는 몸의 실천이다. 사랑은 감정이기보다는 의지를 가진 실천에 가깝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시간이 지난 미래의 시점이 되어야 해석될 수 있다. 미래의 시점에서 돌아보았을 때 평가할 수 있다. 끌림에 매혹된 후에 사랑을 실천했다면 그것은 사랑으로 남게 되지만, 끌림 그 자체의 감정적 동요에 머물며 사랑의 실천을 게을리했다면 사랑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미래는 사랑의 감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정을 내리는 심판관이기보다는 사랑을 진정 실천했는가에 대한 반성적 지성으로 역할한다.
지금 난 사랑하고 있는가? 소나기 같은 사랑도 사랑이고 안개비 같은 사랑도 사랑이라면 난 사랑하고 있다. 내 안에 있는 타자를 사랑한다. 내 안의 타자를 일깨우는 또 다른 타자를 사랑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나’는, 그런 '나'를 일깨우는 ‘너’를 사랑한다. 그런 사랑의 실천은 ‘너’가 일깨우는 삶을 ‘나’가 사는 것이다.
브런치에 글쓰기를 하면서 보다 분명히 알게 되었다. 예술가의 일생에 대해 공부하고 글을 쓰면서 그 예술가를 더욱 이해하게 되었다. 철학자의 글을 되새기며 그 말을 온몸으로 품으려 노력할수록 글 속의 마음과 더 가까워짐을 알게 되었다. 알려고, 다가가려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작가가 남기고간 글과 그림 그리고 작가의 삶을 존경하고 아끼게 된다. 그들이 남기고 간 결과물을 평가하거나 관조하지 않게 된다. 내 마음에 담고 아파하기도 하고, 때로는 환희에 젖기도 한다. 그렇게 한 인생을 만나기 위해 자료를 찾고 글을 쓰면서 삶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공들인 노고의 시간이 행복하다. 누군가를 이해할수록 내가 이해받는 기분이 든다. 너를 이해해서 내가 이해받는 기분이 든다. 너를 사랑해서 내가 사랑받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나는 사랑을 배워가고 있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배운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철학을 공부한 지 2년이 되어 간다. 그간의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죽은 사랑을 붙들고 살았던 진짜 광기를 깨닫게 되었으며, 얼마나 정교한 기만의 옷을 입었는지 알게 되었다. 한때 고마웠던 친구와도 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이제 인생 시즌 2가 시작되었다. 시즌2는 시즌1의 주인공과 이야기의 구조는 유사하지만 전혀 새로운 내용이 펼쳐진다. 내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여전히 그대로 인채 난 2년 전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새롭기도 하다. 겉으로 보이는 양태는 비슷해 보여도 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바뀐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모두가 새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나 혁명과 같이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일은 타자로 인해 촉발된다. 하지만 그 타자는 나와 다른 유기체인 타자가 아니다. 그 타자는 바로 내 안에 타자이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낯선 '나'이다. 그러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낯선 ‘나’는 ‘너’를 통해 만나게 된다. 결국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진정 나로 살기 위해서는 ‘너’를 만나야 한다. ‘나’를 일깨울 ‘너’를 만나야 한다. 그런 ‘너’는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나를 찾아오기도 할 테지만, 밭일을 하는 농부가 흙을 만나는 일처럼 일상적이기도 하다. 나는 일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계속 ‘너’를 만나려고 한다. 오늘도 ‘나’는 ‘너’를 만나러 간다. '나'를 일깨우는 '너'를 향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