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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an 15. 2024

호들러 (4) 삶과 죽음에 기꺼이 응할 때

예술(삶)을 창조할 수 있다.

호들러는 '자연'속에 삶의 보편적 질서와 조화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풍경화 속에서는 대상을 재현한 것이 아닌 화가가 생각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 한 세계와 또 다른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통찰이 들어 있습니다. 호들러는 세계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닌, 다른 무언과의 조응하는 관계를 통해 표현하려 했습니다.  


너의 부름에 응답할 때 나는 이런 모습이겠지

페르디난드 호들러 <셰브르에서 바라본 레만 호수> 1904,  100x81cm, 개인소장


<셰브르에서 바라본 레만 호수>에서는 하늘과 호수가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고 있습니다. 강물은 하늘의 색과 구름의 모양을 그대로 비추며 하늘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강물 중간에 위치한 산들도 이들과 평행을 이루고 있어 상상의 공간처럼 신비로워보입니다. 호들러의 풍경화 속에는 이처럼 자연과 자연이 서로를 비추거나 자연물들이 서로 교감하는 듯 표현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그의 시 <만물조응 correspondances>에서 자연을 '신전'과 같이 신비롭고 신성한 것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이 자연 속을 지나갈 때 '어렴풋한 말소리'를 들으며 자연과 교감을 이루고 '숲은 정다운 시선으로 그를 지켜'보는 신비로운 장소로 묘사한 것이죠. 이는 호들러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과의 조응, 자연물 간의 교감에 대해 표현하고자 한 것과 유사합니다.


조응이라는 것은 '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 또는 말과 글의 앞뒤 따위가 서로 일치하게 대응'한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습니다. 호들러의 평행주의(parallelism)는 서로 다른 대상들이 이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말을 걸고 느끼며 조화하는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호들러의 풍경화에서 보이는 자연은 다른 둘이 상호 교감하며 서로에게 응답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하늘과 강, 늘 그대로 있는 하늘과 움직이는 구름, 흘러가는 강물에 비친 하늘 그림자 등 이질적인 것, 대치되는 것들이 상호적인 관계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elism

우리의 호흡을 그릴 수 있다면 이런 울림이 아닐까

페르디난드 호들러 <니센>, 1910년, 106x83cm, 바젤미술관


 <니센>의 산속의 깊은 골짜기, 그 골짜기 아래 깊은 땅속,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억겁의 시간들이 무겁게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그 위로는 태양 빛이 맑은 공기로 반짝이며 산을 중심으로 구름들이 춤을 추듯 움직입니다. 산을 중심으로 공기가 메아리치며 어울립니다. 산속의 흙냄새, 공기의 차가움, 태양의 여러 빛깔들, 나무가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 등이 서로 화답하듯 말입니다. 호들러가 다름 속에서 조화를 찾았던 것처럼 거대한 자연 속에서도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화합하려 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슬픔 또한 영원으로 흘러갈 거야

<제네바 호수의 석양>, 1915


발렌틴이 죽은 후 그린 이 작품에는 모든 것이 수평으로 수렴되고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삶이 영원한 자연과 하나가 됩니다. 수직으로 서 있던 모든 것이 수평으로 가라앉고 산마저 침식되어 있으며 하늘도 구름도 수평으로 흐르며 강물과 하나가 됩니다. 수직으로 서 있던 삶이 무너져감에도 황혼의 빛은 아름답습니다. 있었던 것 사라져 간다는 상실에도 불구하고 지는 저녁해의 빛은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하루를 아름답게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삶을 견디며 살아 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호들러에게 이 하늘은 슬픔의 하늘만은 아닙니다. 슬프지만 슬프게도 슬프도록 아름다운 하늘의 모습일 겁니다. 삶을 사랑한 사람만이 맞이할 수 있는 아름다운 하늘이었을 것입니다.


유년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되었던 호들러는 죽음에 위축되지도 이별에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 번의 결혼과 연애에서 실연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사랑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들 호들러를 만났으며 그렇게 연인 뒤팽과 발렌틴을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사랑하는 연인 발렌틴과 죽음으로 이별하고 난 후 호들러는 대형 전시회 준비에만 몰두하며 은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전시를 마친 후 이듬해 지병으로 사망합니다. 호들러는 "죽음을 의식적으로 인정할 때 위대한 예술을 창조"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상실, 이별)에 무의식적으로 휩쓸리거나 압도되지 않고 의식적으로 직면할 때 예술을 창조하게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직면한다는 것은 대항하고 싸워 제압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직면한다는 것은 삶뿐만 아니라 죽음 까지도 기꺼이 만나는 것, 서로를 느끼고 서로에게 응답하는 것, 그런 조응의 과정이라는 것을 그의 삶과 그림이 말해줍니다. 


예술가가 죽음을 인정할 때 위대한 예술을 창조할 수 있듯이 죽음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예술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슬픈 것을 슬프게, 추한 것을 추하게 느끼고 응답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페르디난드 호들러 <The Grammont in the morning sun>, 1917


사랑, 이별 또한 이처럼 풍요로운 빛깔로 남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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