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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an 11. 2024

호들러 (3) 너를 그린다. 그리고 기억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이처럼 대할 수 있다면

유년시절 부모와 죽음으로 이별하고 형제들 또한 자기 보다 먼저 떠나보낸 페르디난드 호들러(1853-1918)는 50대에 만난 연인 발렌틴과도 사별하게 됩니다. 호들러는 발렌틴이 죽어가는 모습을 200여점의 스케치와 유화 남깁니다. 호들러는 발렌틴이 쇠약해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임종하는 장면까지를 연속으로 기록합니다. 호들러가 그린 병상의 그림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그 죽어가는 사람의 피부색, 표정, 자세 등이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놀라게 되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감정의 흔들림 없이 그릴 수 있었다는 것에 다시한번 놀라게 됩니다.



병든 너

<병든 발렌틴>, 1914, 캔버스에 오일, 47X40, 오르세미술관 / <침상의 발렌틴 고델> 1914, 캔버스에 오일


발렌틴은 호수가 보이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으며 호들러는 그녀를 매일 찾아가서 그녀의 얼굴을 그립니다. 왼쪽 그림에서 발렌틴은 표정이 없고 얼굴이 누렇게 변해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있는 주변의 배경을 붉은 주황빛으로 칠해서 그녀의 얼굴 좀 더 생기 있기를 불어 넣고자 하는 화가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오른편에 발렌틴은 병세가 좀 더 악화된 것인지 몸이 더 많이 기울어져 있고 눈은 반쯤 감겨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과 배경은 창백한 회색빛으로 변해가지만 화가는 더 이상 색을 더 덫칠하지 않습니다. 발렌틴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오른편에 작은 시계가 그려져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지만 부정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상태가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오른편 아래에는 장미꽃 세 송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호들러의 그림에도 자주 등장하는 장미꽃 세 송이가 발렌틴의 시선과 만나고 있습니다. 이 꽃은 발렌틴이 보았으면 하는 꽃이었나 봅니다.



죽어가는 너


<탈진> 1915 / 임종의 고통 <1915>


<탈진>에서는 그녀의 몸이 배게 옆으로 떨어지면서 몸을 지탱할 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임종의 고통>에서의 여인은 눈꺼풀을 닫을 힘도, 턱 근육을 제어할 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든 기운이 풀려 이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발렌틴은 서서히 몸이 낮아지며 수평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녀의 검푸른 피부색에서 그녀의 피부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불구불 거친 드로잉은 그림을 그리는 호들러가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입니다. 그녀의 낮아진 호흡과 체온을 마지막까지 그림으로 담아내고 싶은 화가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죽은 너


 <발렌틴의 마지막 모습> 1915


발렌틴이 죽은 다음날 그녀는 침대에 일자로 누워 완전한 수평으로 돌아갔습니다. 방 천장과 침대의 가로 선이 강박적으로 곧게 그어져 있습니다. 그녀의 몸을 따라 그린 선들은 중간중간 끊어지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는 흔적들이 보입니다.


<제네바 호수의 석양>, 1915


호들러는 발렌틴이 죽고 난 후 병원 창밖으로 보이는 제네바 호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붉은 해는 보이지 않고 빛무리만 노랗게 퍼져 있습니다. 그 빛들도 수평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수평으로 돌아간 고요한 모습입니다. 나무나 산 등 직선으로 서 있는 것들은 남아 있지 않고 자연의 모든 것들이 땅과 강물과 같이 수평으로 누워있습니다. 지네바 호수의 석양의 모습은 발렌틴이 침대위에 누워있는 마지막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죽음은 이렇듯 수직으로 향했던 것들이 수평으로 돌아가는 과정인가 봅니다.






호들러가 그린 발렌틴의 모습에는 '낭만'도 '상징'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할 수도 없으며 상징적 의미에 담을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고통 그 자체이기에 표현주의적인 방법으로 표현됩니다. 발렌틴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그의 감정 표현이 상당히 절제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러움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아마 감정에 휩쓸렸다면 죽어가는 발렌틴을 바라보는 것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슬픔에 격앙되어 몸이 흔들리고 멈출 수 없이 눈물이 흘렀을 테지요.


죽어가는이 앞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그러나 호들러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냉정한 마음을 가진 듯 보이지만 사랑이 아니라면 죽어가는 이의 모습을 매일 그림으로 그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호들러는 사랑하는 발렌틴을 자신의 눈에, 손에, 몸의 세포에 하나하나 스미게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려본 적이 있나요?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그림, 글로 묘사하는 그림, 그리고 연필과 붓으로 그려내는 그림 등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그리고 쓰고 묘사하다 보면 마치 그 사람을 손으로 어루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사람을 따뜻하고 정성스럽게 쓰다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호들러는 매일 같이 발렌틴 만져준 것입니다. 그렇게 그녀를 돌본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큰 고통 앞에서도 호들러처럼 마음이 단단했으면 좋겠습니다. 소중한 이와 이별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 사람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슬픔이라는 격정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고통에 고개 돌리지도 않으면서 소중한 이를 잘 돌보며 보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수평이 되어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날의 발렌틴>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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