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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an 09. 2024

호들러 (2) 삶의 가능성에 끌리다

신비로운 '너'에 대한 탐구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탐구, 모호함에 대한 사랑


페르디난드 호들러  <영원과의 교감> 1892


그림 속 여인이 들판 위에춤을 추는 듯 보입니다.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 듯, 외부 세계로부터 온 신호를 잡으려는 듯 간절히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몸을 통해 자연과 연결되려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체를 통해 정신과 교감하려, 영혼의 진동을 느껴보려 하고 있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들으려 하는 듯, 들리지 않는 것을 보려 하는 듯 말입니다.


호들러는 영혼과 교감하는 사람을 여인을 모습으로  등장시켰습니다. 이 여인은 보편적 인간애에 대한 상징입니다. 보편적 인간애는 이성애적 사랑도, 혈연 간의 사랑도, 누군가의 소유이거나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그저 인간이기에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의 영혼은 여성의 형상으로, 다른 무언가의 영혼은 자연의 형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여인은 검은 천으로 상징되는 우울과 불안을 밟고 서 있으며, 그것은 마치 그녀의 한계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것에 메여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채로 온몸의 감각을 일으켜 또 다른 영혼(자연)과의 교감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 그림을 오랜 시간 바라보다 보면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느낌이 듭니다. 무언가 느껴지지만 그 느낌을 감정으로 이름 붙이기 어렵습니다. 이 그림은 결과로써의 감정(평화, 포근함, 환희, 자유 등) 그 자체가 아니라 모호한 '감정의 움직임' 이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의 묘사 대상인 자연, 꽃, 사람, 춤 분명 구분할 수 있지만 이 그림 속에서는 대상 그 자체보다도 대상들 간의 관계가 더 중요해 보입니다. 여인의 움직임, 여인의 감각이 향해진 곳, 자연에 있는 무언가의 힘 그리고 그러한 힘을 인식하고자 하는 우리의 상상력이 이 그림을 더욱 신비로운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호들러는 성인이 되어서도 안정적인 사랑을 하지 못하고 방황했으며 한때 그의 작품에는 삶에 대한 비관과 절망으로 가득했었습니다. 그러나 호들러가 부인 스투키와 이혼하고, 아들 헥토르의 생모인 뒤팽과의 재결합을 하게 되면서 그의 작품에는 삶을 낙관적으로 탐구하려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1892년에 그려진 <자연과의 교감>은 그의 이러한 개인적 상황과 맞물려 그려진 작품입니다. 이때부터 모두가 죽는다는 종말론적 사고보다는 삶의 가능성탐구가 시작합니다.


반복을 통해 드러나는 힘과 조화

페르디난드 호들러 <선택받은 자>, 1893, 캔버스에 오일과 템페라, 쿤스트 뮤지엄


<선택받은 자>에서 가운데 있는 소년은 작은 나무를 심으며 하늘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마치 나무의 성장을 기도하는 듯 간절해 보입니다. 소년은 아들 헥토르를 모델로 하였습니다. 어린이는 순수한 마음을 지녔으므로 신성한 신(자연, 정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나무는 생명의 나무이며 성장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명력을 가진 아이가 성장을 상징하는 나무와 함께 마주 앉아 영적 교감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소년을 중심으로 6명의 전령들이 병풍처럼 소년을 보호하며 병렬의 구도를 보입니다. 호들러는 이처럼 사람들을 반복해서 그리면서 병렬적 구조를 만들었습니니다. <선택받은 자>에서도 소년과 전령이 2단 구조로 배치되어 있으며 6명의 전령이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씩 다른 열굴과 몸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병렬주의(parallelism)'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반복과 대칭이 이루어지는 병렬기법은 이집트 예술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집트 미술에서는 형태가 반복되면서 종교적 의식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 반복은 강력한 힘을 가진 절대자의 보편적 진실을 전달하고 여러 가지 개별적인 대상들 사이에서 조화로운 통합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병렬주의는 다름 속에서 조화를 발견하려는 시도입니다. 


전령 중 4명은 꽃을 들고 있습니다.  왼쪽 두 번째와 오른쪽 두 번째에 있는 전령은 아직 피지 않은 크로커스 꽃 봉오리를 들고 있으며, 왼쪽 세 번째는 장미꽃, 오른쪽 세 번째는 라일락을 들고 있습니다. 호들러에게 꽃은 인간의 모습과도 유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꽃은 동일한 형태의 꽃잎들이 중앙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는 형상으로 꽃을 통해 조화란 하나의 유기체가 또 다른 유기체와 관계를 맺으면서 만들어 가는 것을 보여주다고 설명했습니다.


호들러는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공통점에 주목합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별성이 서로를 구별시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공통점을 통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삶을 비관적으로 보던 시절에는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음을 상기시켰으며, 삶의 낙관적으로 바라볼 때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인간을 구분하는 많은 기준들이 있습니다. 성별, 인종, 나이, 고향, 사는 곳, 학벌, 성적지향, 정치이념, 취미 등등 우린 정말 달라도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인간'이라는 엄청난 공통점이 있음을 상기하게 됩니다. 우리도 꽃처럼 어떤 힘에 의해 조화를 이루고 통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하게 됩니다.



자연물 중 하나로써의 인간

페르디난드 호들러 <낮> 1900, 캔버스에 유채, 160X340cm, 베른 미술관


<밤>과 대조되는 <낮>은 꽃이 피어나는 모습이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한 모습들을 하고 있으며 여인들의 모습은 신성하고 풍요롭습니다. 자연물을 인간의 속성으로 의인화하여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호들러는 인간을 자연의 부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 나오는 여인들은 세속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닌 삶의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마치 자연의 한 부분처럼 , 꽃이 피어나듯이, 풀이 솟아나듯이, 언 대지가 녹아 흐르는 시냇물 같은 느낌도 듭니다.


이 그림은 인간은 특별하지도 그렇다고 소외되지도 않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그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인간의 삶에도 사계절이 순환하며 밤과 낮이 반복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삶에는 죽음이 있지만 삶의 끝이 죽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삶과 죽음은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반복으로 나타나는 형상은 자연의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하게 합니다. '낮'이 되면 꽃이 되어, 시냇물이 되어, 풀이되어 혹은 인간이 되어 깨어날지도요.




호들러가 알고자 했던 삶의 모습은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이었습니다. 의식으로는 쪼개어 분석할 수 없는 것, 실증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 전부를 정복할 수 없는 것, 명확히 알 수 없는 모호한 것, 그래서 신비로운 것들에 대한 탐구였습니다.


타자(그림, 예술, 자연, 너)의 세계는 '나는 모르겠어. 그러나 알고 싶어'라는 마음이 간절할 때만 교감이 가능해집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타자와의 교감 그 자체보다는 교감하려는 시도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써 대상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싶어 하며 이해되지 않는 것은 회피하거나 비과학이라는 이름표를 달아 폄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혹적인 대상을 만나면 그것이 유용하던 합리적이던 상관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서게 됩니다. 돈벌이가 되지 않는데도 시를 쓰는 시인,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아름다움에 매혹된 화가, 자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 타인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이들은 이해득실을 떠나 타자에게 매혹된 사람들입니다.


매혹되지 않는다면 다가갈 수 없을 것이고, 다가가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것이 신비로운 타자의 세계이니까요. 사랑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일으키는 네가 있어야만 너에게 다가가는 일이 가능하게 되니까요.  '너'에게 다가가야지만 '나'의 세계가 확장될 수 있으니까요.


만일 호들러의 작품이 신비롭게 느껴졌다면 우리는 예술가의 세계에 한발 가까이 다가간 것입니다. 만일 자연으로부터 신비로움을 느꼈다면 자연과 합일된 순간에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신비로움을 느낀다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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