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죽음을 직면한다. 그리고 감당한다.
죽음 앞에 느끼는 환멸과 절망을 그리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너무 흔한말이여서 무감각 할때도 많지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면 매우 엄숙해지는 말입니다. 소중한 이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아픈 말은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언제나' 삶과 함께 있는 것이기에 예술가들의 주요 탐구 주제였습니다. 특히 19세기말을 살아가던 예술가에게 '죽음'은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사회는 자본주의와 기계화에 대한 거부감으로 문명이 죽어 간다는 위기감을 느꼈으며, 진리라고 믿던 종교가 사라진 자리에 과학적 사고관이 자리했으나 심리적으로는 위안을 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유럽에 유행한 결핵 질환으로 소중한 이들의 죽어가는 현실적 고통까지 심각했던 시기였습니다. 예술가는 고통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이었기에 고통을 탐구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습니다.
스위스의 화가 페르디난드 호들러(Ferdinand Hodler, 1853-1918)는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일생을 매달렸습니다. 네달란드의 뭉크가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한 내면의 정서를 표현했다면, 호들러는 죽음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호들러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그의 성장배경과 관련이 깊습니다. 호들러는 6남매의 첫째로 태어납니다. 호들러가 7세가 되었을 때 목수였던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사망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들도 결핵으로 사망을 합니다. 어머니는 재혼을 했지만 어머니 또한 호들러가 14세가 되었을 때 동일한 질병으로 사망을 합니다. 호들러는 가족들의 잇단 죽음에 대해 “집에 항상 시체가 있고,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꼈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죽음, 늙음의 이미지
호들러는 잇단 가족들의 죽음으로 인간의 운명에 대해 사색을 하게 됩니다. 가족들의 죽음을 지켜본 호들러는 깊은 상실과 우울을 경험하면서 비관적 세계관을 가지게 됩니다. 그의 초기작품에는 죽음을 앞둔 노인이 많이 등장하며 이들은 비극적 운명앞에 좌절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테이블에서 고뇌하는 노인> 속 인물은 고뇌에 가득찬 노인입니다. 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에게는 어려움을 극복할 힘이 없어 보입니다. 노인에게 남은 시간도 얼마 없어 보여 무력감이 느껴집니다. 고통을 받아들일 수도 없지만 극복할 수도 없는 문제가 그를 괴롭히기만 합니다.
<실직자>속의 인물 역시 고통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외로움과 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들에게 희망보다는 모든것을 다 했다는 피로감, 그리고 더는 할것이 없다는 허탈함이 보입니다. 그림속 인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이 그림 뒤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희망과 새로움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속 인물들은 쇠약한 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앉아있는 들판의 풀과 꽃에는 생명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이 소멸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듯 무기력해보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호들러는 어린시절 가족의 죽음으로 사랑에 대한 결핍이 있었으며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애정관계가 순탄치 않았습니다. 청년시절 호들러는 연인 어거스트 뒤팽을 만나고 아들 헥토르를 낳지만 결혼은 당시 사교계의 명사였던 베르다 스투키와 하게 됩니다. 두 여인과 아들과의 관계 속에서 호들러의 내면은 더욱 복잡했으며 불안감은 깊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호들러의 불안한 심정은 죽음이라는 인간의 숙명에 대해 더욱 천착하게 만들었으며 죽음의 심상은 더욱 어둡고 부정적으로 표현됩니다.
<절망에 빠진 영혼들>에 나오는 이들의 검은 옷을 뒤집어 쓰고 있으며 고개를 숙인채 있습니다. 이들의 표정과 자세는 하나같이 무기력하게 죽음의 사신이 찾아 오는 날을 기다리는것 같습니다. <절망에 빠진 영혼들>에서는 5명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 인물들이 개별적 상징으로 해석되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가지는 보편성에 있습니다. 죽음은 특정한 개인에게 찾아오는 일이 아니라 누구나가 겪는 보편적 사건이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우린 누구나 죽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묘한 위로를 받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 있지만 감정의 교류가 없습니다. 5명을 각각 하나의 캔버스에 그린다면 개별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질것 같습니다. 우린 같은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저마다 다른사람이라는 개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고통이지만 저마다 가진 사연은 모두 다를것 입니다. 이들은 죽는다는 같은 공통의 숙명을 가지고 있지만 저마다 개별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기에 외로움이 가시지 않습니다. 모두가 종말로 향해가지만 고통은 나눌수도 그리고 덜어 낼 수도 없는 온전한 개인의 몫으로 남게됩니다.
죽음은 언제나 찾아 온다.
<밤>에서는 내면의 우울과 불안이 검은 그림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호들러 개인적 삶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밤>은 스투키와의 이혼 직전에 제작한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호들러 자신, 정부 뒤팽, 부인 스투키가 등장합니다. 가운데 검은 그림자를 보고 놀라는 사람이 바로 호들러 자신입니다. 작품의 왼편에 잠들고 있는 여인은 뒤팽이며, 오른편 등을 보이고 누운 여인은 부인 스투키입니다. 스투키는 다른 남자와 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여 호들러 자신과 거리를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호들러의 자서전적 이야기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들이닥칠 죽음이라는 공포를 보여줍니다. 등장인물들은 죽음이라는 검은 그림자를 덮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채 잠을자고 있지만 누군가는 죽음이 왔음을 깨닫고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나이도 훨씬 젊어졌습니다. 죽음이 노인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삶의 도처에 발생할 수 있는 일상적 사건으로 보편화됩니다. 우리가 매일밤 잠을 자는 것처럼, 죽음은 일상적이며 친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테이블에서 고뇌하는 노인>, <절망에 빠진 영혼들>등이 타인의 죽음을 관조한 듯한 인상이었다면 <밤>에서는 자신의 삶과 함께하는 죽음을 가까이서 매일 직면하고 있는듯 합니다
죽음을 직면해야하는 이유
우리의 힘들때마다 "죽겠다"라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진짜 '죽음'은 금기시 되는 사건입니다. 장례식장이나 제사 등의 정해진 시간과 장소가 아니고서는 '죽음'을 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죽음'을 말하기뿐 아니라 '죽음'을 듣고 보는 일 또한 흔치 않습니다. 이제는 가정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예식을 치루는 장례식장은 병원 뒷편이거나 변두리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별한 아픔이 있는 사람에게 "이제 그만 잊어야지", "산 사람은 살아야지"하는 말을 하곤 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지만 삶 속에서 '잊어야'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죽음을 경험하고도 죽음을 말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한 모임에서 '애도'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참여한 몇분은 소중한 이를 죽음으로 떠나보낸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말씀중에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시다가 급기야 두통과 복통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소화되지 못한 슬픔은 결국 고통이 되고 맙니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면 그 고통이 어떤 연유로 시작되었는지는 잊은 채 증상만 남게 됩니다. 저 또한 애도 작업을 적극적으로 하기 전까지는 알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에 오랜시간 시달려왔기에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고통'을 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고통을 말하려면 힘들었던 그 순간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의 고통이 현실에서 다시 재생되기에 매우 힘든 작업입니다. 또한 어렵게 꺼낸 내 이야기는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기에 상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됩니다. 나를 우울한 사람으로 보지 않을까? 나를 정돈되지 못한 사람으로 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말하기를 더욱 주저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고통(죽음, 슬픔)은 금기된 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고통을 말하기 어려워지고 그래서 더욱 외로워집니다.
<절망에 빠진 영혼들>속 인물들이 환멸감을 느끼는 이유는 '죽음'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죽음을 이야기할 수 없기에, 혼자 감당하는 슬픔이기에 더욱 절망하는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호들러의 그림속의 감정은 절망과 환멸이지만 호들러 자신에게도 그것 뿐이었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호들러는 죽음 앞에 무기력하지 않았습니다. 절망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죽음을 직면할때마다 극한의 절망과 외로움을 아프게 느꼈을 겁니다. 그러나 죽음을 계속 그리며 죽음의 의미를 탐구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잠>을 통해 미술계의 관심을 받게되었고 그의 인생과 화풍도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불행을 표현하게 되면 그 불행을 보다 명확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 표현된 불행은 더이상 같은 불행이 아니게 됩니다. 고통을 이야기 하게 되면 행복을 이야기할 자리가 생겨납니다. 이것은 예술가의 삶에서도 그들의 작품에서도 그리고 보통의 삶에서도 발견되는 진실입니다. 그러니 부디 죽음을 '잊으려'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언젠가 있는 일이니까요.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애정으로 들으며 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공통점이 많은 사람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