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우 <이별하는 골짜기>
나의 고통에 헤맬 때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내가 힘든 것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더 정직하게는 내 힘듦을 고백해더라도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다. 무의식 중에 더 외로워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지 못했다. 괴롭더라도 혼자서 꾸역꾸역 삼켰다. 말할 수록 외로워질테니까.
한해 한해 나이가 들수록 꾸역꾸역 삼킨 것들도 많아졌다. 목구멍까지 무언가 차오른 것 같았다. 목이 늘 답답했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손써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자리를 뱅글뱅글 돌면 해소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내가 무얼 원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 채, 단지 내 몸에서 뭔가가 밀려 나오는 신호가 있다는 것만을 희미하게 느낀 채, 그 신호를 무시하면 목구녕이 막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 채, 몸에 가득 든 무언가를 게워낼 어딘가를 향해 헤매었다.
한 번에 그곳을 찾을 수는 없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길 원했기에, 고통을 풀어내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며 어딘가 모를 그곳을 찾아 헤매었다. 그 과정 중에는 글은 나와 함께 했다. 언젠가부터 읽기 시작했던 글은, 언젠가부터 쓰게 만들었다. 어딘가를 향하고 있을 때마다 읽었던 글이, 실은 글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글을 찾은 것이 아니라 글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는 이상한 생각. 임철우의 <이별하는 골짜기>도 그런 생각이 드는 소설이다.
너의 고통을 대신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임철우의 장편소설 <이별하는 골짜기>는 강원도 정선에 있는 '별어곡'이라는 간이역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별어곡'에서 일하는 역무원 동수는 역사에서 고통스러운 사연을 지닌 인물들과 만난다. 돈을 벌기 위해 산골까지 팔려왔다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방 아가씨, 누군가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자책하는 동료 신씨,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위안부 할머니, 그리고 김동수 자신과 아버지의 사연과 마주친다.
이야기는 다방아가씨의 사연으로 시작된다. 다방 아가씨는 어떤 속사정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동수도 모르고 독자도 모른다. 다방 아가씨는 동수가 시인 지망생인 것을 알고 그에게 속사정을 털어놓으려고 한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인은 사람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하지만 동수는 다방아가씨의 사정을 끊어 낸다.
아이 참, 오빠. 전화 끊지 마요. 딱 1분만요. 대꾸 안 해줘도 좋아요. 그냥 내 얘길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고요. 고작 그 정도도 못해줘요? 에이, 시발. 시인이라면서 인심 한번 졸라 야박하네...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녀는 왜 죽었을까? 동수는 빨강 머리 다방아가씨의 이 통화를 잊지 못한다. 빨간 머리의 죽음 이후로 동수는 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만난다. 독자인 나 조차도 똑바로 읽어 내지 못할 정도로 힘든 사연이었다. 너무 놀랍고 끔찍해서 잘못 읽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책장을 뒤로 넘기며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문장을 건너 읽기 시작했다. 차마 꼼꼼히 글을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그런 고통스러운 일을 작가는 자신의 몸과 목소리를 빌어 써 내려갔다. 그 고통을 쓰지 못하고는 배겨내지 못했기에,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에 그 고통을 온몸에 품고 글을 토해냈다.
마지막 장에서 동수의 사연이 나온다. 동수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통해 위로를 받게 된다. 마치 마치 동수를 위해 살아온 누군가의 위로였다. 그리고 그 빨강머리의 전화를 기억해 낸다. 그 통화가 외로움 끝에 보내는 마지막 손짓이었음을 그제야 알아 챈다.
청년은 몸이 컥 메어온다. 세상에,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아름다움만으로 시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니. 청년은 창유리에 머리를 기댄다. 그리고 조용히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의 의미를 그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 두려움과 후회, 부끄러움이나 서글픔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은 어렴풋이 알 듯하다. 삶은 아름다움만도 슬픔만도 아니라는 것. 아무리 두렵고 끔찍해도, 결코 도망치거나 외면해선 안 될 그 무엇이라는 사실을.
고통은 너와 나의 사이에 길을 뚫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종이 깨달음 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타인이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것, 타인의 고통을 과장하지도 그리고 축소하지도 않고 딱 그 만큼의 크기로 느낀다는 것은 타인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며 이는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인생에 대한 깨달음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듣게 될때 자기 연민에 휩싸여 더 크게 고통스럽게 느낄 수도 있으며, 고통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별것 아닌 것으로 축소해 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흔하게는 타인이 고통을 그저 남의 일로 치부하기 일쑤다. 남이 짐을 떠안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고통의 연결을 끊어 내는 것이다.
그러니 빨강머리는 시인을 찾았을 것이다. 당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은 젊은 시인은 전화 한 통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애타는 전화 한 통을 기억했기에, 그 목소리를 가슴속에 품고 살았기에 진정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깨닫는 사건에 이르게 된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몸에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너의 고통이 스며드는 구멍 말이다. 그것은 누군가로 인해 뚫리는 것이기도 하고 내 안에서 뚫어 내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동시적 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구멍을 내기 위한 방향으로 서 있어야 하고 타자의 고통을 무심히 끊어내지도 말아야 한다. 자기 자신과도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타자로도 향해 있어야 한다.
구멍은 쉬 뚫리지는 않는다. 타인의 고통이 나를 뚫고 들어왔을 때에야 가능하다. 그렇게 구멍이 생겼을 때 우리는 타인과 소통이 가능하다. 그 구멍을 통해 바람이 스치고 빛이 스며 생기가 돌게 된다. 구멍이 뚫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애초에 스미는 바람이 무서워 막아놓은 구멍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 구멍이 생길 때 비롯서 나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온몸으로 집중해서 타자를 향해 있을 때 나는 다른 세계와 만나 자유로워진다. 이는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구멍이 뚫리는 과정은 사랑의 과정이기도 하고 결과 이기도 하다. 사랑은 구멍이 뚫리는 고통을 견디게도 하고 망각하게도 한다. 그러니 슬픔도 아름다움이 된다. 사랑이 있어야만 견디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임철우 작가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분명 고통스러운 일일테다. 그러나 그 고통을 외면해서는 죄책감에 괴로워 견딜 수 없는 성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며, 그에 앞서 타인의 고통에 아파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많이 예민한 사람이 할 수 있는, 타인의 고통에 살이 에이는 이가 할 수 있는, 그 에이는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 너의 고통을 위해 자신의 몸을 빌려주는 일 아닐까.
이제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싶다. 슬픔 또한 아름다움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 이런 마음이 훗날 가소로워질지라도 이 말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