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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Aug 10. 2024

자력(自力)과 타력(他力)

빈센트 반 고흐의 '태양'

자력과 타력의 관계


몇 해 전 태풍이 불고난 후 베란다 앞 화단에서 자라던 목련나무가 기울어졌다. 우리 집이 있는 3층 창문을 다 가릴 만큼 마르고 껑충한 체격이었다. 기울어진 나무는 부목을 대어 보강을 했지만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는 위험하다고 판단을 하였는지 그해 가을에 나무의 수관을 모두 잘라 버리고 기둥의 일부도 잘라버렸다. 저렇게 많이 잘려나갔는데 다시 자라날 수 있을까? 나무의 민둥머리를 볼 때마다 서운했다.


다음 해 봄이 되면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민둥 한 기둥에서 새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먼저 자라고 그다음 잎이 생긴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무 기둥에서도 잎이 자라났다. 그 잎은 일반 목련 잎사귀 크기의 서너 배 정도는 되는 크기였다. 마치 단독주택 지붕 위에 있는 태양광 패널처럼 넓적했다. 나무는 몇 개 되지도 않는 듬성듬성한 잎으로 태양 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잎사귀를 최대한 넓쩍하게 펼쳤다. 타력(他力)을 느끼기 위해 자력(自力)을 다하고 있었다.


스즈끼 다이세쓰의 <선이란 무엇인가>에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력과 타력이 어떻게 관계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자력이란 스스로 의식하고 노력하는 것이고 타력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고 더는 할 수 없는 곳에 타력이 나타난다"라고 했다.  자력이 다한 자리에 타력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궁지에 몰리면 다른 길을 찾기 위해 궁리를 하게 된다. 궁리를 하다 보며 궁지가 막다른 골목이나 낭떠러지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게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의식은 인식 가능한 범위 외에도 인식하지 못하는 범위가 있는데 자력은 인식하는 세계, 타력은 인식너머의 세계를 의미한다. 궁지에서 궁리하며 자력을 다할 때 의식하지 못하는 타력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각의 한계 때문에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각할 수 없다.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광선의 범위, 청적으로 들을 수 있는 데시벨의 수준 등 지각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우리에게 한계가 있다는 말은 한계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의 세계 너머의 세계


빈센트 반 고흐 <노란 하늘과 태양 아래의 올리브 나무들>, 1889, 캔버스에 유채, 92.7X73.6cm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고흐는 세계를 흔들리는 선과 빛나는 색으로 묘사했다. 고흐의 그림에서는 태양에너지가 파도처럼 흔들린다. 그 파동에 나무도 땅도 함께 리듬을 맞추어 움직인다. 나무의 그림자가 마치 뿌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땅의 모양이 울퉁불퉁하여 파도가 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그림에서는 빛 에너지도, 물도, 나무도, 대지도 태양의 빛과 함께 흔들거린다. 실제 나무를 보면 독립된 개체로 단절되어 보이지만 이 그림에서는 하늘도 땅도 나무도 서로의 정신이 바닷물처럼 서로에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무는 태양 에너지를 얻기 위해 나뭇가지를 하늘로 뻗어 올렸다. 나뭇가지는 땅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 하늘을 향해, 태양을 향해 자란다. 나무는 자력을 다하지만 타력을 기대하지도 혹은 타력을 기대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무는 타력이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늘 있는 것이기에 늘 있는 것을 느끼며 자력을 다한다. 자력을 다하면 타력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자연히 알고 있고 또 자연스레 행동한다.


자력과 타력은 원인과 결과가 아니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면 타력이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 이 둘의 관계는 동시적이다. 태양이 늘 존재하듯이 타력은 늘 존재한다. 인간의 눈이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가지를 뻗어 해를 받으려 하는 것은 해가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햇빛을 느끼기 때문이다. 해는 언제나 있다.


그럼에도 타력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은 쉽지 않다. 나와 세계의 연결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연결의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연결된 기억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기에 단절되었다고 예단하게 된다. 이 단절감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해야 한다. 내가 최선을 다했을 때 새로운 길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길은 늘 도처에 있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길을 걸으려 하면 된다. 모든 것은 있다. 끊어진 것을 연결하려 애쓰는 만큼, 지각하려고 애쓰는 만큼 타력을 느낄 수 있다.


볼 수 없는 세계 앞에서 무력해진 적이 있다. 내 의지가 결과로써 확인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거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 등이 결과로써 확인되기 바랐었다. 그 결과가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닐 때는 허무하고 억울했다. 이것은 내가 지각할 수 있는 수준에서 결과를 확인하려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내 한계 밖의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고흐가 자연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남다른 자연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화가는 자연을 움켜쥐려 노력해야 하며, 풍경을 그릴 때도 인물을 그릴 때처럼 어떤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지경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고단한 작업에 대해 "꾸준함이 항복보다 낫다."라고 했다. 자력을 다하는 일은 고되다. 그러나 꾸준함밖에는 도리가 없다. 나는 주의를 기울여 '너'를 보려 한다. '너'를 느끼려 한다. 한계 너머를 보기 위해서는 한계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나는 한계 앞에 있다.


빈센트 반 고흐, <석양의 버드나무>, 1888, 판지에 유채, 31.5 x 34.5 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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