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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ul 25. 2024

외로움 건너에서 기다릴게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에코와 나르키소스>

외로움, 이원적인 존재들의 숙명


외로움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혼자인 상태에서 느끼는 고립감보다 복잡한 심리적 상태이다. 외로움에는 타인과 연결되지 못해 느끼는 정서적 외로움,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소외되어 느끼는 사회적 외로움, 그리고 자신의 내면과의 단절로 인한 실존적 외로움 등이 있다. 외로움은 물리적으로 혼자인 상태에서 겪는 외로움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관적 느낌의 외로움이 더 크다. 그래서 많은 사람 속에 둘러싸여 있어도 외로운 기분을 느끼며, 물리적 외로움이 아니기에 누군가의 외로움을 알아보고 이해해 주기 어렵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만 타인과 있어서 외로움이 더 커지기도 한다. 몸은 함께 있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때, 각자 자신의 이야기만 할 때가 그렇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나는', '나는'을 반복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싫어하는 것만 말하고 싶어 한다. 서로 같은 주제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함께 있다고 할 수 없다. 공감한다고 하지만 동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나 외로워'라고 말할 때 '나도 외로워'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공감이 아니라 동감일 뿐이다. 동감을 할 때도 같은 마음이 아니다. 한쪽은 '나는'을 되풀이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도'를 반복할 뿐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더라도 자신의 세계에서 나오지 못하고 또 누군가의 섬에 가지도는 못하는 외로운 섬이 된다.


너와 나는 타자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이질적인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이 외로운 상태를 견딜 수 있게 할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 이 지독한 외로움을 견딜 수 있게 한다. 사랑을 하면 외로움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반대다. 사랑할수록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나의 도식으로 너를 포개려고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렇다. 그러기에 외로움은 더욱 증폭된다. 그러나 사랑이기에 외로움마저도 견디게 한다. 오직 사랑이기에 가능하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보레아스>, 1903, 68.8 x 94 cm, 캔버스에 유채



외로움, 사랑하기에 더 커지는 슬픔


그리스신화에서는 지독히 자신을 사랑했던 나르키소스와 그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에코의 이야기가 있다. 나르키소스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기에 그를 본 이들은 그의 외모를 칭송했으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르키소스는 타인에게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기에 모든 이들의 구애를 거절했다. 에코도 나르키소스를 사랑했다. 하지만 에코는 나르키소스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수가 없었다. 에코는 남이 말을 할 때만 말을 따라 할 수 있는 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에코는 자기의 말을 하지 못하고 남의 말 끝만 따라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이 말하기 위해 나르키소스의 말을 기다렸다. 나르키소스는 에코의 인기척을 느꼈고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르키소스는 "여기서 우리 만나자"라고 말했고 에코는 "우리 만나자"라고 대꾸하고는 나르키소스를 껴안았다. 그러나 나르키소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에코의 행동을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에코는 나르키소스의 거절이 너무나 수치스러워 얼굴을 나뭇잎으로 가린 채 동굴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말라가며 오그라 들었으며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산속의 메아리가 바로 에코의 남겨진 목소리인 것이다.


다른 요정들은 자신들의 고백을 거절한 나르키소스에게 화가 나서 그에게 복수하기로 한다. 결국 나르키소스"사랑하지만 사랑을 얻지 못하는" 상태로 죽게 된다는 저주를 받게 된다. 에코는 육신이 없는 상태에서 멀리서나마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지켜본다. 나르키소스는 에코가 이전에 사랑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밥도 물도 먹지 못한 채로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에코는 나르키소스에게 받은 상처를 잊을 수 없었지만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지켜보며 마음이 아팠다. 나르키소가 죽어가며 "아아 슬프도다"라고 말할 때마다 그녀도 메아리로 "아아, 슬프도다!"라고 대꾸했다. 나르키소스가 "잘 있어"라고 말할 때도 "잘 있어"라고 돼 울렸다.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은 후 나르키소스는 죽고 만다.


이 이야기는 자신의 말을 할 수 없는 에코를 정체성과 주체성의 부족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소통의 문제로 다루기도 한다. 에코는 자기의 말을 표현하지 못했던 수동적인 사람이었을까? 에코는 타인의 말을 되풀이하며 소통에 실패했던 것일까?



사랑, 외로움 마저 견디게 하는 기쁨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에코와 나르키소스>, 1903, 캔버스에 유채, 109.2x189.2cm, 워커 미술관


영국의 빅토리아시대에는 신화나 문학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빅토리아 시대는 1837년부터 19세기말까지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시기 기를 말한다. 빅토리아 시대는 외적으로는 제국주의적으로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장악하고 착취했을 뿐 아니라 내적으로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장악하려 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금욕주의가 매우 강조되었으며 특히 성에 대한 억압이 심했다. 그나마 화가들은 문학 속의 인물들을 그릴 때 여성의 벗은 모습을 그리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수동적으로 사랑을 기다리거나 자기마저 파괴시키는 팜므파탈로 묘사된다. 워터하우스의 그림 속의 여성들도 정체성을 억압당한 피해자이거나 수동적인 모습으로 해석되곤 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는 <에코와 나르키소스>에서도 에코의 모습을 매혹적으로 표현했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는 모두의 칭송을 받을 만한 아름다운 인물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 그림에서 나르키소스의 얼굴은 반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수려한 외모가 가려져 있다. 대신 에코는 가슴을 반쯤 드러낸 채 자기를 드러내고 있다. 워터하우스는 거절의 상처에 고통받으면서도 사랑하는 이의 죽어가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에코의 모습을 절박하게 표현했다.


흔히 에코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자신의 말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반복하는 본성 때문이다. 최근 심리학에서 언급되는 에코이스트는 이런 에코의 특징에서 따온 말이다. 나르시시스트에 대비되는 에코이스트는 자신이 주목받은 것을 극도로 꺼리며 타인에게 자신을 맞추어 주는 사람을 지칭한다.


워터하우스는 에코를 수동적이거나 소통에 실패한 인물로 보지 않는 듯하다. 워터하우스의 에코가 슬프도록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화 속 에코는 세간의 에코이스트와는 다르다.  에코는 사랑에 있어서만은 지독하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르키소스의 거절에 수치심을 느꼈지만 그를 증오하지 않았았다. 자신의 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더라도 나르키소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르키소스의 마지막을 함께 하며 그를 위로했다. 비록 외롭게 되더라도 그가 혼자 남지 않도록 했다.



오늘 할 수 있는 사랑을 다할 뿐


나르키소스와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에코는 긍정했다. 자신이 그에게 고백할 수 없음을, 그리고 그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았지만 에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 다른 이의 끝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에코는 할 수 있는 것을 다해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다. 에코는 나르키소스의 말을 되풀이하며 그의 말끝이라도 잡으려 했다. 그렇게 그에게 "잘 있어"라고 인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르키소스는 자신에게 인사한 것이 에코인지 알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 타자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채 죽어간다. 그는 자기만을 끔찍하기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역량이 필요하다. 사랑할 역량이다. 사랑할 역량은 무엇이 사랑인 줄 아는 역량이다.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을 알아볼 줄 아는 역량이다. ''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혼자인 '너'를 위해 기다리는 역량이다.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복수하지 않고 처벌하지 않으면서 '너'를 지키는 역량이다. 이 역량은 서로 다른 '너'와 '나'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다.


에코는 자신을 다해 사랑했다. 비록 '너'의 말을 다 되풀이할 수밖에 없지만, '나'의 말을 '너'에게 전할 수 없지만, 에코는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 자신의 한계 끝에 매달려 가 닿으려 노력했다. 사랑은 교환이나 거래가 아니다. 와 나의 마음이 동시적이지도 않다. 내가 가난해지더라도 멈출 수 없고, 내가 상하더라도 네가 상한 것이 더 속상해지며, 다 주고도 더 줄 것이 없어 미안해지는 마음이다. 에코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 비효율적이며 비생산적이며 비합리적인 사랑이다.  


너의 전부를 알 수는 없을지라도, 너의 마음의 한편이라도 짐작하려 애쓰며 너의 말에 간신히 응답한다. 너의 전부를 말로 할 수 없지만, 너의 말 끝을 겨우 따라 할 뿐이지만, 그 말을 하기 위해 나는 너를 느끼려 한다. 그리고도 못다 한 말들은 울림으로 채우려 한다. 에코는 그렇게 메아리가 되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지금 당장 '너'가 모르더라도 괜찮다. 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한쪽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만날 수 있다. 내가 비록 너의 뒷말을 반복하더라도 그 계속되는 반복됨을 결국 '너'도 느낄 테니까. 그렇게 '너'는 '나'를 통해 '너'를 알게 될 테니까. 그렇게 서로를 통해 자신을 아는 순간 우리는 만나게 된다. 그 순간을 기다린다. 오늘도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며 그날을 기다린다. 어머니처럼, 대지처럼 기다린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아몬드 꽃 모으기>, 1916년, 캔버스에 유채




[참고문헌]               

1. 오비디우스,『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천병희(역), 도서출판 숲, 2017

2. 정미경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전형화된 여성이미지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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