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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un 10. 2023

고된 반복이 만들어 내는 무늬

정상화 개인전 <무한한 숨결>

  

  정상화(1932~) 작가의 작품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커다란 캔버스에 단일한 색 하나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하나의 캔버스 안에는 수많은 격자무늬의 작은 패턴이 반복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안의 패턴에도 같은 것이 없으며, 질감도 제각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작가는 붓으로 칠하고 드러내고, 또 메우고 드러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어 낸다. 그의 작품은 미술 매체들이 만들어 내는 시각적 사건을 마주치는 일이며 동시에 작품을 제작하며 반복하였던 수행적 과정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단색화는 작품 그 자체가 가지는 시각적 아름다움에 보다 집중하게 한다. 



(좌) <Untitled 12-5-13>  2012, Acrylic and kaolin on canvas, 259 x 194 cm / (우) 부분 확대,



이러한 단색화를 해석하려거나 이해하려고 시도하면 작품을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작가는 구상화처럼 무언가를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관람자의 해석이 개입할 여지를 열어놓지 않는다. 작품은 작가의 의도나 통제 범위에서 벗어나 있으며 오히려 재료의 성질과 중력 등의 주변 환경에 더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아크릴 물감을 바른 캔버스를 접을 때 칠해진 색이 어떻게 갈라질지 예상하기 어렵다. 마른 물감을 떼어낼 때 의도한 대로 정확하게 제거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동일한 모양, 동일한 질감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정상화 작가의 작품은 관람의 위치를 바꾸어 가면서 격자무늬의 차이를 바라보는 것이 재미있다. 그 격자무늬 안에는 다양한 모양과 질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물감이 뭉쳐져 요철이 드러난 부분, 칼질이 된 것처럼 날카로운 선들, 물감이 만들어낸 다양한 붓질의 흔적, 그리고 평면 위에 드러나는 다양한 양감들.  이러한 시각적 다양함 외에도 촉각(haptic)적 질감을 느끼게 하는 지점이 있는데, 그 촉각성이 관람자의 감상 폭을 보다 확장해 준다. 손으로 직접 만질 수는 없지만, 그 질감이 느껴지는 환각이 일어나고 그 질감을 통해 특정 감정과 기억의 환기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좌) <Process-5>  2017, Acrylic and kaolin on canvas, 130.3 x 97 cm / (우) 부분 확대



  작가의 작업 공정을 상상하는 놀이를 하며 전시장을 거닐던 중 하나의 작품에 시선이 머물렀다. <Process-5>는 캔버스에 아크릴을 바르고 캔버스를 접거나 칼로 그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었다. 조심히 조심히 하나씩 켜켜이 쌓아 올렸을 물감, 그리고 너덜하게 떨어져 나간 자리에 드러난 캔버스를 보며 '상처' 그리고 '딱지'가 생각이 났다. 넘어져서 찰과상을 입으면 상처 부위의 피부가 얇게 벗겨진다. 상처의 정도가 깊지는 않더라도 벗겨졌던 피부가 꽤 쓰라렸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상처가 아물어 갈 때쯤엔 작은 딱지들이 생겨났다. 새살이 다 올라와서 딱지를 밀어낼 쯤이 되면 수십 개의 딱지가 너덜너덜하게 보풀처럼 일어난다. 너무 일찍 떼어내면 다시 피가 나기도 해서 다시 약을 바르고 처음과 같은 보살핌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처음 이 작품을 볼 때는 살갗이 까여 쓰라린 느낌이 났다. 그러다가 작가의 작품 과정을 상상하면서는 조금 더 안정되어 갔다. 작가는 모호함으로 작업을 시작했으나 점점 작업 과정이 익숙해지고 특정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신의 의도를 확인했으리라. 그리고 조심스럽게 작업물을 드러내고 다시 바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반복하고 있는 이 작업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작품에 칠하고 떼어내고, 메우고 떼어내고 또 다시 칠하고 떼어내는 반복되는 그 과정은 상처를 치료하고 새살을 만나는 과정과도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을하는것, 그것이나의언어이다.
나의작업은높은낮음으로형성되어가는철저한평면의추구이다.
내작업의과정은캐어내고체집화는것이다.

- 작가의 작업노트  -     


작가는 칠하고 떼어내고 다시 메우고 떼어내고, 그리고 다시 칠하고를 반복한다. 오직 그 반복의 과정이 있어야 캐어내고 채집할 수 있으며, 자기만의 언어를 갖게 된 것이다. 그래, 중요한 것은 반복하는 것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또 아이처럼 다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또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시시포스의 신화와 같은 작업, 힘겹게 올렸던 돌이 다시 굴러 내려와도 또 다시 굴려 올리는 반항이야 말로 그는 살아 있는 것이다. 오직 이 넘어짐과 일어섬의 반복될 때만이 살아 있음이 확인되는 것이고, 무언가 창조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일 테다. 사람과 만남과 이별도 이런 일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또다시 사랑하는 이 고된 일이 반복될 때 살아 있는 찰나의 기쁨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미술감상을 할 때 떠오른 기억과 감정은 해결되길 원하는 심리적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단색화를 보면서도 투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니 떠오른 전시장에서 떠오른 그 문제가 기어이 해결을 원하는 것 같다. 내가 전경에 떠오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작가처럼 칠하고 떼어내고, 그리고 또 메꾸고 떼는 과정의 반복일 것이다. 멈추지 말고 계속해 나가자. 나는 지금 거대한 캔버스를 완성해 가는 과정 중에 있다.





Exhibition Details

정상화 : 무한한 숨결

2023. 06. 01 - 2023. 07. 16

갤러리현대 

https://www.galleryhyunda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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