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 부허 개인전 <공간은 피막, 피부>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공사현장에서 나는 소음 같은, 헉헉대는 거친 숨소리 같은 것도 섞여 들린다. 이 소리는 다큐멘터리 속에 작가가 공간에 피부를 만들어 내는 작업에서 나온 것들이다. 하이디 부허(1926~1993)는 예술적 퍼포먼스를 통해 억압적인 사회 구조에 저항한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스위스는 1971년이 되어서야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었던 경직된 사회 환경이었다. 다큐멘터리에는 부허가 삶의 공간인 실내에 잠식해 있는 남성주의 문화와 그로 인한 기억과 상처를 철거하는 작업을 담고 있다.
부허의 작업은 ‘스키닝’ 기법으로 이루어진다. 스키닝은 공간에 거즈천을 덮은 후 그 위에 액상 라텍스를 바른 후 건조해 뜯어내는 기법을 말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건물 표면의 형태가 거즈에 그대로 탁본을 한 것처럼 본뜨게 된다. 부허는 이러한 스키닝 작업을 일종의 ‘피부를 생성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녀가 생성하고, 벗겨낸 피부는 무엇인가. 피부는 우리 몸 중 가장 큰 장기이다. 피부라는 장기는 신체의 내부 기관을 보호하기도 하며 피부 그 자체로 기능하기도 한다. 감각을 인식하기도 하고 그 인식된 감각을 통해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부허가 벽에 붙여 뜯어낸 것은 우리 몸에 각인된 가부장제의 기억일 것이다. 몸에 들러붙은 문화적 관습들, 그로 인해 억압된 것, 방치된 것, 소외된 것, 고통받은 상처에 대한 기억이다.
그녀는 우선 일반 가정집에 스며 있는 차별적 관습을 제거한다. 스위스는 남녀가 사용하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부허는 남성들만의 전유 공간이었던 아버지의 서재(신사들의 서재) 조상 대대로 살던 집의 마룻바닥(바닥 피부) 등의 피막을 만들고 제거한다. 바닥에서 뜯어낸 껍질을 46개로 나눠 가방에 담았는데 부허는 이를 ‘하이디 아발로네(전복)’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한때 단단해서 해체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 바닥이, 견고한 남성중심주의의 상징이 이제는 작은 전복껍데기와 같은 조각이 되어 다루어질 수 있는 크기가 되어다.
부허는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빈스방거와 그의 후손이 운영하던 벨뷰 요양원을 방문한 후, 사회적 차별의 장소의에서의 기억을 소환하여 제거한다. 빈스방거는 ‘히스테리아’라는 전환장애 증상을 여성에 한해 진단하고 입원시킨 병원의 진료실을 피부로 만들어 뜯어낸다. 스키닝으로 본떠진 전시 물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 방에서 진찰받았을 권위적인 의사와 위축되고 불안했을 환자들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원래 거즈는 하얀색 이였지만 50년간에 세월 동안 그 거즈의 색은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어 무언가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것처럼 기묘한 무거움이 느껴진다.
빈스방거 박사의 방에서 공간에 만든 피부를 뜯어내는 과정은 매우 힘든 고행처럼 보인다. 작업 장면이 담긴 영상을 보면 상당한 힘을 줘서 뜯어내어야 하는데, 그녀의 숨소리가 매우 거칠게 들렸다. 미술치료를 하다 보면 감정이 들어가는 작업에서는 분노와 울분, 슬픔이 작업 과정에서 터져 나올 때가 있다. 부허는 남성중심주의의 표상으로 상징되는 그 진료실을 뜯어내는 과정에서 상처의 쓰라림을 재경험하고, 울분을 끓어 올렸으며, 결국 억압을 터뜨린 후 해방의 감정을 느꼈으리라.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의식화하여 심리적 문제를 치료한 것처럼, 부허는 공간의 들어 있던 억압의 기억을 외현화 켰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잠자리는 불완전 변태를 한다. 완전 변태 하는 나비 같은 경우는 애벌레에서 나비로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탈바꿈된다. 그러나 잠자리는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바꾸어 가며 탈바꿈한다. 유충이었을 때의 모습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로, 그러나 유충과는 다른 날개가 있는 모습으로 진화된다. 또한, 잠자리는 삶의 거점이 바뀐다. 유충인 상태에서는 물에서 생활하지만, 탈피를 거듭하면서 식물 줄기를 타고 물 밖으로 올라오게 되어 날개를 가진 잠자리로 거듭난다. 유충에서 잠자리가 되면서 그 모습은 유사하지만, 삶의 장소와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작가는 나비가 아닌 잠자 자리를 동경했다. 이러한 잠자리의 특징을 좋아했던 것 같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번의 변태를 하는데 그것은 종류에 따라 보통 7-15번의 과정을 거친다. 정체성은 고유한 자신을 규정하는 일이다. 그러한 정체성이 한순간에 고정되어 버릴 수도 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한계를 느끼게 되면 또 다른 정체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잠자리의 탈피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 한계를 벗어나는 과정이다.
부허는 자신의 작업을 ‘변신의 과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꿈꾸었다. <파르게트 잠자리의 부화>라는 작품에서는 부허와 퍼포머들이 감옥을 라텍스로 스키닝 한 결과물을 가지고 나와서 도시 곳곳을 행진했다. 부허는 이 과정을 ‘단단하고, 견고하고, 끔찍하며, 잔인한 것들을 털어내는 과정’이라고 했다. 이렇게 부허는 한때 집처럼 나를 보호해 주던 개인적 공간에서 시작하여, 빈스방거의 진료실처럼 사회적 억압이 자행되는 공간의 껍질을 벗겨내고, 자신의 한계를 계속 탈각하며 진화해 나갔다.
내게도 피부가 되어버린 묵은 허물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한때 나와 한 몸이었기에 허물이기 이전의 그 자체로의 나였다. 철학수업을 들을 때 일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 아이 때문에 걱정이라는 나의 질문에 철학 선생님은 답했다. "선생님은 자유롭지 않잖아요, 왜 모든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세요?" 이 말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너무 맞는 말이어서 아프면서도 수치스러웠다. 오랜 시간 쓰고 살았던 가면이 일순간 벗겨지는 것 같았다. ‘-인척’하며 사는 동안 내 피부가 되어버린 가면이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내며 뜯어졌다.
그날 나는 나의 가면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피부가 되어버린 가면들까지 털어내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피부가 되어 버린 허물들. 그 허물들 속에는 사랑받고 싶은 외로운 나가 있었다. ‘나’를 잃고 슬퍼해는 ‘나’가 있었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하나씩 마주했다. 학생이라면 '-해야 해', 직장인이라면 '-해야 해', 엄마라면 '-해야 해', 여자라면 '-해야 해'라고 하며 나를 억압했던 세상의 목소리를 하나씩 벗겨냈다. 그 벗겨내는 과정은 생살을 뜯어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다.
억압이 지속되면 억압을 가하는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은 자신의 시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춘기 시절만 해도 나와 다른 것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세상의 부조리한 것이 너무나 눈에 잘 띄어 불편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며, 또 가정을 꾸리며 제도권의 삶을 살아가다 보니 세상에 길들여 갔다. 세상에 길들여져 간다는 것은 나의 시각을 잃어버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행동과 태도가 다를 때 오는 인지부조화로 고통받지 않으려면 세상을 바꾸던 아니면 나를 바꾸어야 하니 말이다. 나는 나를 바꾸는 비교적 쉬운 결정을 택했고, 나를 억압하는 것을 쉽게 내면해 해 버렸다. 그랬기에 타자의 시선으로 타자가 부여한 나의 역할에 충실했기에 나의 가면은 내 피부처럼 자연스럽게 된 것이다. 그렇게 들어붙은 피부를 벗겨내는 일이었기에 억압받은 만큼의 고통을 다시 감수해야 했다.
자신을 찾아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헨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는 노라가 특정 역할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집을 박차고 나왔다면 부허는 자신이 살던 집,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공간을 본뜬다. 그 공간의 위압적 권위, 두려움, 수치심, 불안 등을 본뜨며 부조리한 것들과 마주한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내 삶에서 변화를 시작하고 있다. 내 삶의 고통의 지점에서부터 시작했다. 어디가 짓물렀는지, 어디가 썩고 있는지를 살폈다. 그 시작은 가정이었다. 우리는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길러졌다. 가정은 모든 것들의 시작이다. 행복의 출발이기도 하고 불행의 근원지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 낸 가정에서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글을 쓰고 하나씩 발라내었다.
부허가 라텍스를 바르면서 벽에 묻은 흔적을 쓸어내리는 마음처럼, 그 붓질에서 그 벽에 묻어 있는 슬픔의 기억을 느끼는 마음처럼, 나도 그런 고통 같은 붓질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과거를 기억하는 피부가 되었고, 피부를 뜯어내고 벗겨내었다. 한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단단한 것들을, 고통으로 범벅이 되어 단단히 굳어 있던 것들이 뜯어냈다. 그러나 그 과정이 한 번으로 끝날 수 없다. 잠자리의 변신은 여러 번 반복된다. 한계를 만나면 탈각하고, 또 한계를 만나면 탈각한다. 또 한계가 왔다고 느낄 때면 기억하자. 지금이 탈각을 할 때라고, 바로 지금이 변신을 할 때라고 말이다.
하이디 부허 : 공간은 피막, 장막
2023. 03. 28 - 2023. 06. 25
아트선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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