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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노래

김환기 <론도>

by 정희주

현자들은 삶의 반복성에 대해 말해왔다. 불교에서는 '업(카르마)'가 있어 좋은 업은 좋은 업으로 나쁜 업은 나쁜 업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현재 나의 고난은 과거 잘못 지어진 업의 결과이다. 잘못의 대가인 것이다. 이 업은 벌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하다. 현재 나의 고통을 통해 지난날 너에게 준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을 알아채고 깨우쳐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도 반복에 대해서 '반복강박'이라는 용어를 통해 말했다. '반복강박'은 반복되는 문제와 고통이 단순한 불운이나 운명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 문제의 상황을 반복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이고 충동적인 심리 기제라는 뜻이다. '반복강박'은 비록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익숙한 것을 택하려는 경향이라고 설명한다. 문제인 것을 모르고서 다시 문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익숙해서 선택하는 것만은 아니다. 반복되는 그 문제는 미해결 된 문제라는 점이 중요하다. 자아는 문제의 해결을 원하기에 미해결 된 문제가 다시 자신을 찾아온다. 이는 다시 보면, 문제가 반복된다는 것은 해결할 기회가 반복되는 뜻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좋은 업을 쌓아 나쁜 업을 덮을 수 있다고 했고, 프로이는 문제의 반복은 해결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철하자 니체는 '영원회귀'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절망적인 이야기를 한다. 니체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영원히 반복된다고 했다. 이것은 저주다. 풀려날 수 없는 저주이다. 행복도 불행도 반복된다. 그것은 영원히 회귀하기 때문이다.


반복을 끊어내려 노력했던 이들은 절망한다.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절망한다. 문제는 언제까지 반복되는가? 나의 업이 그토록 대단한 것이었단 말인가? 나의 문제가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뿌리 깊은 것이란 말인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왜 노력하여야 하는가?




김환기 <론도>1938, 캔버스에 오일, 60.7 ×72.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환기의 <론도>에는 세명의 인물과 거리를 둔 인물 한 명이 보인다. 인물 조화로우면서도 중첩되어 있고 각 조각에 칠해진 색은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인물들은 첼로 악기의 모양으로 그려져 있어 각자의 음을 연주하고 그 인물들 주변은 그랜드 피아노 악기가 감싸고 있다. 배경은 여백으로 두었는데 악기의 음악이 퍼져나갈 여백의 공간으로 남겨주어 이미지가 계속 흔들리면서 퍼져나갈 것 같은 상상을 만든다.


이 작품은 작가는 작업실에 찾아온 세명의 딸이 축음기에서 나오는 론도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것을 보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론도는 음악의 한 형식을 말한다. 주제가 삽입부를 사이에 두고 반복되는 형식(A-B-A-C-A)이다. 김환기는 그림이 노래가 되길 원했다. 그림이 대상에 대한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은 노래처럼 진동하고 퍼져나가길 희망했다. 보이는 물질이 아닌 정신성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는 작업 노트에는 "나는 동양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한다 해도 내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한국 사람의 그림이다.”라는 메모를 남겼다. 그림의 형식은 서구의 추상화 경향을 보이지만 한국적인 색채와 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환기는 일본, 뉴욕, 파리 등지에서 유학하고 작업을 했지만 그는 어디에서나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자신의 정신성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의 작품은 제목 그대로 론도이다. 자신에게 시작해서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는 그림이다. 중간에 다른 리듬이 삽입되었다고 하지만 그는 다시 자신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반복의 과정은 리듬을 만들어 낸다. 그 리듬은 사격형의 캔버스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 움직이면서 파장을 만들어 낸다. 그의 작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영원히 회귀하는 과정, 자신에게 시작하여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는 과정, 그것을 긍정하고 반복하는 과정이다. 그것이 그리움이 될지라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모를지라도, 영원히 반복해서 부르는 노래가 된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970년, 캔버스에 오일, 개인소장




니체는 '영원회귀'를 설명하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아모르 파티)하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반복되지만, 그것이 운명이지만 그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순종하라는 말이 아니다. 감당하라는 말이다. 운명에 순종한다면 허무주의에 빠질 것이고 운명을 감당한다면 선택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비록 운명의 테두리 안에 있을지라도 반복을 통해 자기만의 리듬을 만들어 낼 것이다. 결국 나(A)에게서 시작하여 다시 나(A)에게로 돌아온다. 중간에 다른(B, C)리듬을 만들어 낼지라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면 어떠한가. 다시 그 자리면 어떠한가. B와 C를 만났지 않았던가.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가.


나는 노래하고 싶다. 시들어 버릴지라도 만개하는 꽃을 보고 싶다. 변하는 것일지라도 사랑하며 살고 싶다. 이루지 못할지라도 꿈꾸고 싶다. 죽더라도 다시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싶다. 반복이 만들어 내는 무늬를 사랑하고 싶다. 그렇게 영원히 노래하고 싶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https://www.youtube.com/watch?v=qeEJtifzuL0

론도. A로 시작하여 다시 A로 끝난다. 처음 A와는 다른 A. 예술은 차이있는 반복을 원한다. 삶도 그렇다. 슬픔도 아름다운 선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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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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