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혼란 속에서 피어나는 것들

by 정희주

혼란은 보이는 것 너머를 탐색하게 한다.


19세기말 유럽은 혼란의 시기였다. 당시 사회는 자본주의와 기계화에 대한 거부감으로 문명이 죽어 간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고 진리라고 믿던 종교가 사라진 자리에 과학적 사고가 자리했다. 그러나 과학은 심리적 안정감과 위로를 주지는 못했다. 더욱이 당시 유럽에는 결핵이 유행하여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이 죽어가는 참혹한 현실까지 더해졌다. 이 시기에 누구보다 예민했던 예술가들은 과학적 결정론에 반대하고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자연현상과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고 하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예술가들은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닌 보이는 것의 이면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호들러 <절망에 빠진 영혼들>, 1982


상징주의의 대표 화가 호들러는 삶과 죽음, 유한과 무한, 자연과의 교감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그리려고 했다. 의식으로는 분석할 수 없는 것, 드러나지 않는 것, 명확히 알 수 없는 것, 모호한 것, 정복할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했다. 혼란의 시대의 불안과 죽음을 탐구했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로움에 대해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세계의 보이지 않는 작동 원리에 대해 표현하려고 했던 상징주의는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표현하려 표현주의로 이어졌다.


에든바르드 뭉크 <절규 >, 1893 / 에곤 쉴레 <자신을 보는 자>, 1911


표현주의 화가 에든바르드 뭉크(1863-1944)는 내면의 불안한 감정을 표현했다. 표현주의는 보이는 세계의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미술운동이다. 뭉크의 대표작 <절규>에서는 형태가 변형되고 색채가 과장되거나 단순화되어 감정을 보다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뭉크는 보이는 대상 자체가 아닌 그 대상을 마주했을 때의 내면의 경험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에곤 실레(1890-1918)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 알기 위해 분투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성적 욕망을 있는 그대로 진실되게 표현하고자 했다. 그의 작품에서의 인간은 마르고 왜곡되고 뒤틀린 형태로 거칠게 묘사되어 있으며 세계에서 소외된 불안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자신을 보는 자>에서는 이중자화상의 형태로 자신과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함께 그려 삶에 존재하는 죽음을 껴안으려 했다.



혼란은 신념을 전복시킨다.


1차 대전의 혼란은 예술이 자기부정을 하도록 만들었다. 신은 자애롭고 인간의 편이라는 믿음, 기계화로 인한 대량 생산은 풍요를 가져올 것이란 믿음, 과학은 인간을 이롭게 할 것이라는 공고한 믿음은 처절하게 박살이 났다. 오히려 그동안 믿어왔던 신념들이 비극적 전쟁을 야기시켰다고 생각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한다. 독일의 작가 후고 발(1886-1927)은 다다 선언문에서 “나는 선언문을 쓰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찬성도 하지 않고 반대도 하지 않지만 또 설명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양식이라는 것을 증오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무정부주의적 반예술(anti-art)을 추구하는 다다이즘을 선언했다.


한스 아르프 <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열된 사각형의 콜라주>, 1917 / 미셸 뒤샹 <샘>, 1917


스위스의 미술가 한스 아르프(1887-1966)는 <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열된 사각형의 콜라주>에서 종이를 찢는 퍼포먼스를 하고 이성의 통제 없이 우연이나 직관으로 제작된 작품을 만들어 냈다.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이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어야 하며 그를 위해 예술은 삶의 우연성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우연의 원리를 적용하여 기존의 조형원리, 제도, 문법을 벗어 나는 시도를 했다.


우연의 원리를 파격적으로 이용한 마르셸 뒤샹(1887-1968)이 <샘>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미술계에 충격을 주게 된다. 뒤샹은 예술가의 작품이 아닌 공산품을 미술관에 전시하여 예술품의 지위를 부여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상은 변기이지만 우연에 의해(미술관에 왔다는 이유로) 본질이 변하는 것이 가능하며 더욱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혼란은 외피 너머의 진실을 추구하게 한다.


1차 대전에 이어 2차 대전을 겪으며 사람들은 더욱 충격에 빠진다. 인간이 이토록 연약하며 또한 사악할 수 있는가에 분개한다. 예술가들은 더 이상 보이는 것, 알아볼 수 있는 것, 재현된 것으로는 눈앞에 벌어진 참혹함과 그로 인한 절망감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존의 문법 체계와 구상적 표현으로는 내면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기에 이 뜨거운 감정, 격정적 감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볼스 <무제>, 1940 / 마크 로스코 <레드의 네가지 어둠>, 1958

유럽에서는 엥포르멜(informal)이라고 불리는 사조가 나타난다. 엥포르멜은 형식의 파괴를 의미한다. 형태를 갖는 것에 반대하여 보이는 외피 이면의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다. 엥포르멜의 작품은 물감을 두껍게 바르기, 튜브에서 물감을 짜 캔버스에 흘러내리기, 즉흥적인 붓질 사용하기 등 결과에 앞선 과정을 중시하게 되었다. 볼스(1913-1951)의 <무제>에서는 원시적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 하였으며 이러한 격정적 감정적 추상표현을 '뜨거운 추상'이라 불리게 된다.


뉴욕의 추상화는 추상표현주의라 명명되었다. 미국의 추상은 보이는 것에서 점차 보이지 않는 것으로, 외피에서 내면으로, 예술의 주제가 변해가게 된다. 마크 로스코(1903-1970)는 보이지 않는 비극적 감정에 천착했으며 조형 형식에서는 형태가 사라지고 색면으로 내면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처럼 예술은 혼란 속에서 피어났다. 혼란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했지만 예술가들은 고통의 의미를 알기 위해, 고통 너머로 가기 위해 분투했다. 이 과정에서 그 동안 그려왔던 습관과 신념을 과감히 벗어던지게 되었다. 새로운 주제를 찾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조형 언어를 창조해 냈다. 예술가들은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기 위한 시도를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예술은 창조를 거듭하고 있다.



혼란 속에서 예술은 피어나고, 삶은 가능성을 찾아간다.


삶의 일부인 예술이 혼란 속에서 피어난다면 삶은 어떠한가? 삶 속에 혼란이 생기면 당황하게 된다. 혼란을 피해 도망치게 되면 운신의 폭이 작아진다. 혼란을 방치하게 되면 혼란은 덧없이 커져 결국 나를 먹어버린다. 혼란을 강제진압하게 되면 잠시 기가 죽어 버릴 수도 있지만 억압이 심해지면 결국 대폭발을 하고 만다. 혼란을 대하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예술처럼 하는 것이다. 혼란을 감당하려 하고, 혼란을 수습하려 하고, 혼란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탐색이 시작되고 기존의 습관이 깨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 창조된다.


혼란하다는 것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음의 상태를 말한다. 뒤죽박죽 섞여서 어찌할 바 모르는 상태이다. 그 모름의 상태는 그야말로 가능성의 상태다. 모름의 상태에서 영감이 생겨난다. 모름을 알고 싶다는 욕망은 새로운 길을 찾게도 하고, 이전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기발한 방법을 창조해 낸다.


회사에 다닐 때 혼란스러웠다. 안정적 직장, 괜찮은 급여,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의 사회적 지위 등 외견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찜찜함은 당장의 삶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성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나란 누구일까? 이런 고민들이 퇴사를 하게 만들었다. 퇴사 후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공황이 왔다. 퇴사 후 몸 둘 곳이 없어지자 직장인일 때보다 더 큰 혼란이 왔다. 그 혼란스러움을 벗어나기 위해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미술관에 갔다. 그렇게 미술과 만나게 되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고통스러웠다. 소중한 대상이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 나 또한 죽음으로 간다면 내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죽음에 대한 고민은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고민들은 심리학을 공부하게 만들었다. 대학원에 갔고 미술치료를 공부했다. 더 넓은 세상을 만났다.


미술심리상담을 하면서도 혼란은 계속되었다. 힘든 사연을 가진 이들을 만나면서 내가 모르던 세상의 고통을 알게 되었다. 두려웠다. 세상의 어둠 속으로 깊게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런 혼란이 아직 해결되지 못한 나의 문제와도 연결되었다. 나는 문제를 파고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아닌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런 집요함은 철학을 만나게 했다.


철학을 배우면서 나의 신념을 부수고 새롭게 세우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야말로 대혼란이었다. 머리는 혼란스러운데 가슴은 뜨거워졌다. 심장이 먼저 앞서 나갔다. 머리와 가슴이 찢어졌다. 머리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가슴을 믿기로 했다. 그 괴로움을 안고 내 몸은 가슴이 뛰는 곳을 향해, 머리가 꿈꾸는 곳에 가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삶의 진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혼란 속에서 영감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혼란을 해결해 가는 과정 속에서 삶이 창조된다는 점이었다. 혼란은 영감을 생산해 냈다. 영감은 글을 쓰고 사유하게 했으며, 세상과 마주치게 했다.


내 몸은 분열되었던 조각들을 찾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너머 내가 모르는 나의 조각을 찾고 있다. 보이는 '너'를 너머 발견되지 않은 '너'를 찾고 있다. 나는 혼란 속에 있다. 혼란함의 한가운데에 있다. 나는 혼란함을 겪고 있지만 내 마음은 혼란하지 않다. 가장 큰 혼란 속에서 명료하게 한 걸음을 걸으며 삶의 가능성을 찾아갈 것이다. 혼란함을 느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 될 것이다.

keyword
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구독자 126
매거진의 이전글사랑은 계속된다.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