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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 글] '슬픔' 너머 '아름다움'

by 정희주

연재를 시작하며 저는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말로 글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름다운 삶은 대체 어떤 것일까요? 미술작품을 보는 동안, 미술에 대한 글을 쓰는 동안, 이 질문은 늘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명료하게 말하지 못하고 주저해 왔던 이 질문을 이제는 마주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번 연재는 자전적인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잊지 못할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연재된 글에는 실리지 못했지만, 이 그림은 남겨진 그림이 아니라 아껴둔 그림이기도 합니다. 흑백 판화 속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그토록 찾던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것이었다고 느꼈습니다. ‘아름답다’라는 감탄이 전혀 과하거나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렘브란트 <그리스도의 설교>, 1652년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판화 작품입니다. 그림 속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동굴처럼 보입니다.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곳에 일을 마치고 모여든 저녁 무렵인 듯합니다. 먼저 가운데 앉은 남자에게 시선이 갑니다. 아마도 그가 예수인 것 같습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있습니다. 왼쪽에는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허름한 옷차림에 마른 얼굴의 이들이 앉아 있습니다.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중앙에서 말하는 예수를 경계하듯 멀찍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듯한 그들은, 아마도 예수의 명성을 듣고 예수를 염탐하거나 구경하러 온 이들로 보입니다.


오른쪽에 앉은 사람들의 모습은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소곳이 앉아 있거나 찬양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턱에 손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행색은 하나같이 허름하고 늙고 마른 몸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늙고 헐벗은 이들입니다. 낮 동안의 노동으로 이미 지친 이들은, 밤이 되어 이 동굴로 찾아든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설교> 부분 확대


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오른쪽 아래에 앉은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합니다. 현실은 가난하고 배고프지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피곤함과 고단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얼굴은 늙었지만 초췌하지 않고, 추하지만 외면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 바라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낮보다 아름다운 밤을 살아가며 생생히 빛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이 순간만은 ‘나’ 자신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오롯이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일 것입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은 왜 이곳에 모였을까요? 그들은 단지 현실을 잊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고단함, 삶의 상처, 가난과 배고픔, 헐벗음을 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한계 너머를 상상합니다. 그들의 상상은 다시 현실을 견뎌낼 힘을 줍니다. 그들의 얼굴은 피곤하지만 무기력하지 않으며, 늙었지만 나약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듣는 이들의 얼굴은 예수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낮보다 아름다운 밤을 꿈꾸는 이들의 눈동자는 당연히 빛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림 속 예수는 단지 종교적 상징이 아닙니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자 전령입니다. 자신을 무한히 생성할 수 있는 생명의 전령입니다. 좋은 책, 좋은 그림, 사랑하는 ‘너’ 또한 모두 신의 전령인 셈입니다. 자신을 자신으로 존재하게 '너'라는 타자는 상처받은 현실을 넘어서게 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타자는 자신의 슬픔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잠재성을 깨닫게 하고 새로움을 생성시킵니다.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추함을 직면해야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상처 없이 매끈하고 고운 아름다움이 아니라, 상처를 있는 그대로 마주해야 보일 수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제 가슴은 그런 아름다움에 더 깊이 매혹됩니다.


이제는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세상 도처에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남은 일은 삶의 슬픔을 제대로 보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내 슬픔을 마주할 수 있을 때, 그런 나를 환대할 수 있을 때, 아름다움은 제 색을 드러낼 것입니다. 누군가의 슬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을 때, 아름다움은 찰나의 빛처럼 반짝일 것입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그렇게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는 여정이라고 믿습니다.


이로써 3월부터 시작한 5개월의 여정을 마칩니다. 매주 띄운 유리병 편지가, 기다리는 이에게 무사히 닿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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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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