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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상처와 치유의 파노라마

존 컨스터블 <구름 스터디 연작>

by 정희주

잊혀진 아름다움


수년 전에 남산 도서관에서 열린 대화법 교육에 참여한 적이 있다.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고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자기소개에서는 이름과 수업에 신청한 의도 정도를 말하는 것이 보통인데 한 참석자의 인사말이 유독 인상적이었다. 남산으로 올라오는 동안 느낀 대기의 냄새가 좋다고 했다. '대기'에 냄새가 있다고? 연극을 한다던 그 참석자는 정말 무언가를 깊이 느끼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마음이 뭉클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대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기의 냄새를 맡으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날의 인상은희미 해졌지만 가끔씩 그날의 말과 표정 그리고 봄비가 내리던 남산이 풍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은 다시 잊혔다.


대학원의 미술 매체 수업날이었다. 미술 재료를 탐색하고 기법을 연구하는 수업이었는데 그날의 주제는 모래였다. 처음에는 까슬까슬했지만 계속 만지면서는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모래가 종이에 떨어지면서 타닥타닥 내는 소리가 좋았다. 빗소리가 나기도 하고 눈 밟는 소리가 나기도 하고 모래가 흔들리면서는 바람소리도 느껴졌다. 아이를 기르면서 모래 놀이터를 많이 다니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그날 모래는 정말 옛날 고향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친구를 우연히 길에서 만난 기분이었다.

모래로 그림을 그리며 놀다가 문득 어릴 적 기억이 스쳤다. 구름을 보고 멍 때리는 날의 풍경이었다. 어린 시절 하늘에 움직이는 구름을 보면서 상상놀이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내가 보았던 파란 하늘색, 뭉텅이 져있던 구름,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노란 햇살, 그 자연과 함께 있던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구름관찰자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날 이후 어린 시절의 많은 기억들이 떠올랐고 감수성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대기에 감응하는 갖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늘의 미술


구름 연구, 1822,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 멜버른


서양 미술가 중에는 탁월한 구름 관찰자가 있다. 영국의 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은 구름의 모양을 통해 하늘을 관찰했다. 맑은 날, 흐린 날, 폭우가 치는 날 등 다양한 하늘을 그렸다. 구름의 모양이 계속 변하는 이유는 구름이 생기는 대기의 조건이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그 조건에 따라 하늘은 다양한 색을 보여준다. 흔히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흰색이라고 생각하지만, 구름 관찰자의 눈에 비친 하늘은 단조롭지 않다. 그가 표현한 하늘은 파랑, 분홍, 노랑, 초록, 주황, 보라, 회색, 검정, 흰색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컨스터블은 묘사된 구름의 형태에 대해 날짜, 시간, 풍향, 그리고 과학적 명칭을 메모했다. 이러한 회화 기법은 “스카이 잉(skying)”이라 불렸고,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날씨 속 다양한 빛의 효과를 포착하고자 했다.

아침 하늘은 태양빛이 부드럽게 비치며 점점 밝아진다. 색채도 연한 분홍과 연한 푸른빛, 주황, 보라 등 파스텔 톤으로 안정감을 준다. 정돈되고 안정된 차가움이다. 점심의 하늘은 태양빛이 강렬하다. 하늘은 선명하고 맑은 푸른빛을 띠고, 구름은 희고 뚜렷하다. 점심의 하늘은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치지만, 대기가 불안정해져 비구름이 자라기도 한다. 점심의 하늘은 변화무쌍하다. 저녁 하늘은 아침보다 더 진하고 따뜻하며 부드럽다. 붉은빛, 남색, 자주색 등 강렬하면서도 차분하고 아련한 느낌을 준다.


하늘은 바라보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맑은 하늘인데도 이상하게 더 맑아서 슬플 때가 있고, 흐린 날인데도 좋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즐거울 수 있다. 그리고 마음에 따라 특정 풍경만 보이기도 한다. 우울할 때는 하늘이 늘 회색빛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늘의 구름은 풍경화에서 정서를 표현한다. 존 컨스터블은 친구 존 피셔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늘은 ‘가장 중요한 정서 기관’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구름을 보면 어릴 적 향수에 잠기기도 하고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며, 때로는 우울해지기도 한다. 하늘에는 희극과 비극이, 상실과 회복이 담긴 인생의 풍경이 펼쳐진다.



내 마음의 하늘


날아다니는 새와 층적운 연구, 1821


어릴 적에는 자연스럽게 보던 하늘이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특별한 계기로 하늘과 다시 연결되었을 수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가 시작이었다. 화장을 하고 난 후 납골당으로 이동하는 길에 지인 한분이 찾아오셨다. 며칠 동안 회사에서 밤샘 근무를 하느라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고 하시며 장지까지 찾아오신 거였다. 그분은 내 얼굴을 마주치자 짧은 눈인사를 하시고는 하늘을 보셨다. "와 날씨 한번 좋다" 나도 지인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갑자기 슬프기만 했던 마음이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좋은 날 가셨구나 하는 안도가 들었다. 그날의 하늘은 위로였다. 슬픔 속에서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귀한 날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가을 하늘도 잊을 수 없다.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나자 세상 풍경이 변해 있었다. 아버지가 호스피스 병동으로 이동하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10일 정도를 병원에 있었다. 그 10일 동안 세상은 노란색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버지 유골은 엄마 옆에 모시고 나오는 길에 노란색 은행잎과 새파란 하늘이 반짝거렸다. 아 세상은 여전하구나.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구나. 나는 천천히 내게 남겨진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날의 하늘은 안정감이었다. 내게 돌아갈 일상이 있다 것이 안심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가 슬픔에 압도되지 않은 채 일상을 살 수 있었다.

또 다른 하늘도 있었다. 상처받고 외로웠던 지난 시간을 글로 정리하고 난 후 친구들과 함께 근교의 바다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었다. 하늘은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고, 장대비로 바깥 풍경이 잘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그날 그 바다를 바라보는 기분은 마치 크리스마스 같았다. 지난 삶을 열심히 살았다는 뿌듯함과 만족감이 들었다. 작은 친절과 배려로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장맛비가 내렸지만 따뜻하고 풍요로웠다. 그날의 하늘은 어두웠지만 어둡지 않았고 비가 내렸지만 슬프지 않았다. 그날 하늘은 믿음이었다. 빛이 보이지 않지만 빛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상처와 치유의 반복


존 컨스터블 <구름 연구 : 폭풍이 있는 일몰>, 1821-1822


<구름 연구, 햇빛 줄기가 있는 하늘>에서는 폭풍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혼란 스러 원 하늘 속에서 저녁 빛이 스며들고 있다. 모든 것을 휩쓸고 갈 것 같은 폭풍의 뒤에는 언제나 빛이 기다리고 있다. 하늘은 이렇게 늘 변하고 회복된다. 우리는 맑은 하늘을 영원할 것이라고 믿지 않고, 흐린 날을 보며 언제나 흐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은 매일 변하며 그 변화됨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삶에도 마찬가지다. 힘든 날이 오면 언제 끝날지 몰라 불안해하고, 좋은 날이 오면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분명한 건, 맑음이 지나 어둠이 오고, 다시 구름이 걷히는 것이 삶의 이치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이치를 잊는다. 그것은 삶을 하늘처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을 잊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눈앞의 삶에 지쳐 멀리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볼 시간조차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어린 시절의 그날처럼 하늘을 본다. 그 찰나가 아니면 사라질 순간을 본다. 지금이 아니면 모습을 바꾸게 될 그 하늘을 본다. 한때 어둡게 얼룩졌지만 곧 흩어져버릴 구름을 본다. 어둠뒤에서 존재하는 빛다발을 본다. 세상의 고단함을 아는 어른이 아이의 눈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면, 하늘과 자신이 하나라는 연결을 회복할 수 있다면, 계절과 하늘, 구름의 변화를 내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 아닐까. 인생은 상처와 치유가 반복되는 파노라마다.


노을 구름에 관한 연구, 1821, 밀보드에 종이 위에 유채, 15.2 X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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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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