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슬픔과 무력감
작년 여름 제주도에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4.3 평화기념관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제주라는 섬이 품고 있는 슬픔을 마주하게 되었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휴양지이다. 일상의 피로를 풀고, 자연을 보며 마음을 위로하기도 하고 각종 레저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아는 제주도는 '즐기는 곳'이다. 간혹 뉴스에서 4.3 제주 사건에 대해 들었지만 80년도 광주와 같은 그런 일이 제주에서도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며 흘려보냈을 뿐이었다. 아마도 뉴스를 보면서, 혹은 관련 방송을 들으면서 얼마간 슬픔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4.3 평화기념관에서 본 제주의 역사는 더 이상 흘려보낼 수 없는 기억이었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단독 선거와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별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출처. 제주 4.3 평화공원 안내 책자(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결론)
현재까지 희생자로 신고된 사람은 1만 4천 명(최대 3만 명 추정)이며, 이는 당시 제주도민의 10%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남자, 여자, 어른, 아이 구분할 것 없이 살해, 폭행, 방화, 강간 등 처참한 일들이 벌어졌다. 전시물을 하나하나 보는 동안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웠다. 이런 일이 역사 속에 있었는데도 까맣게 모르고 살았구나. 어떻게 이런 역사가 알려지지 않았을까? 놀라고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전시물을 읽어 나갔다. 끔찍한 사진도 있었지만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려 했다. 특히 그곳에 설치된 조형작품과 영상자료를 꼼꼼히 살폈다. 이 괴로움을 멀리서 관조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내가 본 고통을 하나씩 몸에 저장을 했다.
4.3 평화기념관을 끝으로 제주의 여정을 모두 마친 후 제주공항으로 향했다. 제주공항은 4.3 사건 피해자들이 유해가 발굴된 장소이기도 했다. 제주공항 공사를 하던 중에 유해가 발견되었고 이후 몇 차례의 발굴작업을 통해 수백여구의 유해를 추가로 수습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대와 설렘으로 도착하고 추억을 간직하고 떠나는 제주공항이 이런 아픔 위에 세워진 장소였다는 사실에 마음이 어지럽고 복잡했다.
공항에 도착한 후 식당으로 갔다. 그날 처음 씹는 밥알이 쫀득하고 달큼했다. 얼큰한 해물 된장찌개가 시원했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 안에서 보리라 생각했던 4.3 기념관 책자는 열어보지도 못한 채 밀려온 여행에 피로에 무참히 쓰러졌다. 김포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머릿속이 다시 어수선해졌다. 하나는 4.3 사건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그 끔찍함을 반나절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하찮음 때문이었다. 배고픔과 피로는 고통을 쉽게 지워버리고 말았다.
생명은 자신을 보존하려고 한다. 심장은 자신을 위해서만 뛴다. 내 심장에 고통을 주는 일을 스스로 감내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너무 힘든 것에는 몰입하기가 어렵다. 힘들고 괴롭기 때문이다. 제주의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다짐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본 고통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나 자신이 싫었다.
내가 남의 고통을 대하는 방식은 결국 나에게도 되먹임 되어 돌아올 것이다. 내가 타인의 고통을 강 건너 불 구경한다면 나의 고통도 다른 이들이 그렇게 바라볼 것이 뻔하다. 내가 도움을 구하려면 내가 먼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내가 이해받기를 원하면 너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내가 사랑받고 싶다면 나는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차가운 세상에서 오랜 시간 있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세상은 다 그런 것이라고, 이해와 연결을 포기한 채 살아왔다. 더는 무기력해지고 싶지 않다. 세상은 다 그런 것이라고, 우리는 모두 혼자라고 체념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지금의 하찮음을 벗어날 수 있을까? 끊어진 연결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타인을 공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함께' 느끼고 '함께' 슬퍼해야만 '함께' 이긴다
독일의 화가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의 작품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개입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케테 콜비츠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평생을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 케테 콜피츠의 그림의 주제는 사람이었다. 가난한 노동자, 전쟁에서 굶주린 아이들, 전쟁의 피해자 등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연민을 가지고 연대했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에는 상징적 표현도 기교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그린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보면 알 수 있는, 감각적으로 신호가 오는 그런 그림이다.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에서는 한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다. 아이의 영혼은 이미 떠났고, 앙상하게 마른 육체만 어미에게 남겨져 있다. 어미는 그런 아이를 보내줄 수가 없다. 자신의 몸에 다시 넣기라도 할 것처럼,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려놓으려는 듯이 아이를 온몸으로 품고 있다. 그림을 보며 고통에 함께 빠져든다. 그림을 오래 쳐다보고 있기도, 고개를 돌려 버리기도 괴로울 지경에 이른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에는 고통에 함께 머물게 하는 힘이 있다.
'그림을 본다'는 행위는 대상화하기 쉽다. '본다'는 행위에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보기 힘든 것은 눈을 감아 버리거나 고개를 돌려 버리면 그만이다. 고통을 겪는 '너'와 고통을 보는 '나'사이에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림 속의 '너'는 슬픔을 온몸으로 겪고 있지만, 바라보는 '나'는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그 간격을 좁힌다. 때론 깊게 엉켜 서로를 단단히 붙들게 만드는 힘이 있다.
케테 콜비츠의 초기 작품 소재는 가난하고 불쌍한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다가 1914년에 1차 대전에 참가한 둘째 아들이 전사하면서 그녀는 전쟁 반대를 호소하는 포스터를 만들고, 전쟁을 주제로 한 연작 시리즈를 작업하게 된다. 작품을 통해 전쟁으로 인해 죽은 아이들에게 비극을 막아내지 못한 어른으로써 사죄하고, 아이를 잃은 부모의 고통과 함께 하였다.
케테 콜비츠 작품 속 인물들은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처참하게 쓰러지지 않는다. 그들은 좌절하지만 무너지지 않았으며, 분노나 복수심의 감정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끔찍한 현장에 있으면서도 고통 속에 사그라지거나 화염으로 불타오르지 않는다. 그들은 두려움을 품은 채 함께한다.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나 역시 괴로워진다. 고개를 돌릴 수 없고, 회피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마음속에 한 줄기 흔적이 새겨진다. 내가 느낀 것만큼의 고통이, 나에게도 남겨진다.
고통받고 있는 인물들이 고통 속에 사무치지 않으며,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을 방관자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케테 콜비츠가 작품을 통해 그들의 고통과 진심으로 함께 하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는 상처받은 이들의 상처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작가는 그런 고통을 느낀 채 작업을 하기에 그녀가 그린 선에, 종이에 그 고통이 서려있다. 케테 콜비츠는 '함께하는' 마음을 느껴야만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함께하는'마음은 케테에게 작업을 하기 위한 동기이자 의지였다. 그녀의 작품은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이자 생의 그 자체였다.
너와 함께 아파할 것이다.
예술을 통해 반전 평화운동을 펼치던 케테 콜비츠는 나치로부터 퇴폐미술이라는 낙인찍혀 전시회를 금지당하는 고초를 겪게 된다. 그리고 1942년 2차 대전에 참가한 손자가 전사한다. 그 후 케테 콜비츠는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석판화를 만든다. 그것은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이다. 이 작품에서의 어머니는 세 아이를 품고 있다. 작품 속 어머니는 다른 그림보다도 강인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이전과 같은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다. 그녀의 팔뚝은 더욱 굵어졌고 손은 더 커졌다. 고통을 먹을수록 더욱 강인해진 어머니는 어린아이들을 자신의 몸 안에 품는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밖에 없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인간을 지켜야 한다는 다짐인 동시에 명령이었다.
케테 콜비츠는 타인의 고통을 깊게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고통을 회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을 함께 직면하고 그들과 함께 아파했다. 고통을 함께 하는 예술은 "슬픔을 구출"할 수도 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게 하고, 더는 슬픔에 무감각하게 만들지 않으며, 함께 슬퍼하게 만들기에, 슬픔에 빠진 너를 구출하기 위해 기어이 슬픔 속에 뛰어들게 만드는 힘. 그것이 예술이 가진 힘이다.
예술가는 고통을 함께 느끼며 아름다움을 표현하며, 정치인은 고통을 함께 느끼며 제도를 바꾸고, 언론인은 고통을 함께 느끼며 진실을 알린다. 이것은 특정한 사람의 일로 미룰 문제가 아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연결을 통해 상처는 회복된다.
'함께'가 필요한 일은 과거나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도 고통은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이별의 슬픔과 고통의 무게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도처에 있다. 질병과 싸우거나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당한 폭력으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갈등과 폭력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 역시 피하지 못했던 슬픔이 있으며, 막을 수 없는 고난이 도처에서 기다리고 있다.
내가 이 슬픔을 막을 수도, 더는 아프지 않게 해 줄 수도, 문제를 해결해 줄수도 없다. 그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 내가 경험한 고통을 잊지 않는 것, 고통에 무감각 해지지 않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무기력해지지 않는 것이다. 지금-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는 것이다. 가족의 병환으로 힘들어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들어주고, 갑작스러운 사건을 만나 당황스러워하는 친구에게 안부전화를 걸어줄 수도 있다. 나의 짧은 지식이나 인맥일지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동원할 수 있다. 친구를 대신하여 음식을 해주고 집안을 청소해 주면서 일상의 회복을 도울 수도 있다.
잘 모르는 이의 슬픔을 뉴스로 접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때도 내가 너무 작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 나가면 된다. 기부를 할 수도 있고, 합동 분향소를 찾아가 조문하며 함께 슬퍼할 수도 있다. 관련한 시위에 참가하여 힘을 보태줄 수도 있고 내가 아는 참사의 실상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나의 작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나갈 때 '씨앗'을 지킬 수 있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것은 꼭 내가 닳아 없어지는 아니다. 물론 타인의 아픔을 함께 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감의 과정에서 내 상처가 회복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세상과 끊어졌던 연결이 회복되고 새롭게 심장이 뛰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의 심장은 '나'를 위해서만 뛰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심장은 삶을 위해 뛰고 싶어 한다. 단순히 습관적으로 숨 쉬는 것이 아닌, 사랑을 통해 팔딱이기를 원한다. 진정한 생명이기를 원한다. 나의 심장박동과 너의 심장박동이 일치되어 힘차게 약동하길 원한다. 더 큰 물결이 되어 함께 출렁이기를 원한다.
[참고자료]
1. 제주 4.3 평화공원 전시 팸플릿
2. 카테리네 크라머 <슬픔을 구출하는 예술>, 이순예 옮김, 이온서가,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