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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너'의 이름이 '나'의 이름이 될 때

파울라 모더존 베커 <자화상>

by 정희주

엄마라는 이름과 엄마의 이름


"엄마는 '엄마'로 살고 싶어? '희주'로 살고 싶어?"


어느 날 아이가 물었다. 아이는 그 두 개의 이름의 차이를 아는 걸까? 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까? 둘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비슷한 질문을 이전에도 받은 적이 있다. "너는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 생각이야?"라는 질문이다. 결혼을 하고부터 맞벌이를 하던 10년간 이 질문은 늘 따라다녔다. 회사를 그만두는 그날까지 나는 이 질문 속에서 갈등했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이 질문에 답해야 했다. 일과 가정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당시에는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는 엄마가 가정을 더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상식이었기에, 일을 선택한다면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나는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를 결정해야만 했다. 마치 결론을 강요받는 선택인 것만 같았다. 퇴사 후 10년이 지난 시점에 아이는 내게 묻는다. 사회적 역할인 엄마와 자기 자신 중 어느 것으로 살고 싶은지, 혹은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중 누구이고 싶은지 묻는다. 가볍게 대답할 수 없었다. 아이도 나 자신도 소외시키는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고민은 나에게만 있는 특별한 것은 아니다.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엄마에게는 일과 가정의 양립에 대한 문제는 고민거리다. 가능한 양립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나 사회 인식이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강요된 선택 앞에 갈등한다. 100년 전에도 동일한 고민을 했던 화가가 있었다. 100년 전에는 여성이 직업인으로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화가라는 직업도 여자가 선택하기에는 진입장벽이 높은 세계였다. 독일의 화가인 파울라 모더존 베커(1876~1907) 역시 화가를 꿈꾸었지만, 결혼을 하게 된 후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 <호박목걸이를 한 자화상>, 1906년, 루드비히 로젤리우스


파울라 모더존 베커는 예술가 공동체인 보르프스베데에서 만난 동료 화가인 오토 모더존과 결혼하고, 남편과 전 부인 사이에서 낳은 딸을 키우며 2년간 함께 생활한다. 독일에서 그림을 그릴 때 파울라는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당시 독일에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그림이 주를 이루었지만, 파울라는 대상에서 받은 느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단순화시키고, 독특한 표현 기법을 시도했다. 파울라는 보르프스베데의 사람들과는 예술적 이상이 맞지 않았다.


파울라는 남편과 떨어져 홀로 파리로 가서 그림을 그리며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자화상>은 서양미술사에서 최초로 그려진 누드 자화상이다. 파울라는 옷을 모두 벗고 자연에 자신을 내맡기며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남성이 그린 누드화처럼 은밀하지도, 에로틱하지도 않다. 옷을 벗은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꽃을 가지고 놀고 있다. 친근하고 다정하다. 그녀는 그런 삶을 꿈꾸었다. 자기 자신으로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살고 싶은 삶을 꿈꾸었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 <자화상, 30세, 6번째 결혼기념일>, 1906년


파울라는 자화상을 임신한 모습으로 그리기도 한다. 임신한 누드 자화상을 그린 것 또한 서양미술사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실제 임신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파울라는 아이를 양육하는 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걱정하며 어머니가 되는 것에 대해 갈등했고, 예술적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출산을 미루고 싶은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결혼 생활과 화가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던 파울라는 결혼 6주년을 기념한 그림에 임신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이 그림의 서명에는 남편의 성인 모더존이 빠진 P.B.(파울라 베커)라고만 적는다. 독립적인 요구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자화상>을 임신한 모습으로 그린 것은 충실한 결혼 생활을 약속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살아가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파울라는 누구의 아내가 아닌, 누구의 딸도 아닌 '나'로 존재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그녀는 새로운 '나'를 잉태하고자 했다. 자화상 속의 그녀는 마치 "이게 바로 나야"라고 말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이를 낳아 기르며 자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파울라처럼 또 다른 자신을 잉태하는 일일까? 나의 삶에서 엄마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의 '엄마됨'의 경험


파울라 모더존 베커 <어머니의 팔에 안긴 아이>, 1906


내게 '엄마'는 슬픔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 사랑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춘기 때부터 엄마와 나 사이의 대화의 양은 급감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엄마는 틈틈이 대화를 시도했지만, 나는 그런 대화가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기도 전에, 나는 결혼을 해서 집을 나왔다. 나는 결혼을 하고 나서야 여자의 삶에 대해, 결혼에 대해, 그리고 엄마에 대해 궁금해졌다. 많은 질문이 생겨났지만 엄마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우린 여전히 거리가 있었고, 그 거리를 좁히기에는 마음도, 몸도, 시간도 모두 멀리 있었다. 그렇게 엄마와의 어긋남을 조정하지 못한 채 우리는 영원한 이별을 맞이했다.


이후 '엄마'라는 이름은 내게 희생의 대명사가 되었다. 가족을 위해 살다가 죽은 억울한 영혼처럼 느껴졌다. 마치 내가 엄마를 억울하게 만든 것만 같았다. 엄마가 자신의 젊음을 바친 이유가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나를 키우기 위해 엄마는 자신의 삶을 희생한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아픈 것도, 엄마가 늙은 것도, 엄마가 죽게 된 것도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긴 시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엄마가 와병 상태에 계실 때, 결혼 6년 만에 어렵사리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내게 '엄마'라고 불렀다. 너무 어색하지만 너무나 확실한 내 이름이었다. 나는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 채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키울 때는 너무 기쁘기도 하지만, 너무 힘들기도 했다. 임신 기간 동안 손목 관절에 문제가 생겨서 손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손가락 마디를 구부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안고, 유축을 하고, 집안일을 해야 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쑤시듯 들어왔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이 젖병을 쭉쭉 빨고, 음식을 오물거리고, 옹알이를 시작하고,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키며 조금씩 크는 것을 보면 너무 예뻤다.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심장이 땅바닥까지 내려앉기도 하고, 아이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면 미친 여자처럼 길을 헤매며 아이를 찾기도 했다. 그렇게 '엄마'가 되어 최고의 기쁨과 최고의 고통을 선물 받았다.



세상이 바라는 '완벽한 엄마'


파울라 모더존 베커 <소녀와 아기> 1902년, 카드보드에 유채, 66.3 x 71 cm. 덴하그 시립미술관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는 나는 '엄마'라는 이름과 '나' 사이의 갈등이 크지 않았다. 물론 개인적으로 사회적 성취를 계속 이어나가지는 못했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이었다. 아이들이 부모를 원하고, 부모가 그 바람에 응답하는 일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엄마로 살면서 위축되는 순간이 생기기도 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엄마' 때문이 아니었다. 사회가 '엄마'에게 지어주는 무게 때문이었다.


엄마로 살아가면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엄마'에 대한 혐오였다. '맘충'이라는 비난과 '노키즈존'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서, 엄마와 아이가 혐오의 대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았다. 게다가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끼리도 서로에 대한 경계심과 불신이 괴로움을 만들었다. 아이가 무언가 잘못을 하면 "엄마가 문제야", "엄마가 그렇게 키운 거야"라고 말하며 주변의 엄마들이 수군거렸다. 엄마들은 세상 속에서 지나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아이의 문제는 곧 엄마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엄마들은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결점의 엄마가 되려고 한다. 완벽한 사람이 되어 자신을 방어하려고 한다. 이런 부모의 완벽주의적 태도는 자녀에게로 이어진다. 부모 스스로 완벽에 대한 기준이 높으면, 아이들에게도 높은 완벽성을 기대한다. 아이들은 아직 미숙하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높은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다. 기회를 주는 대신 다그치고 독촉한다. 실수하면 안 된다고, 허점을 보이면 안 된다고, 완벽해져야 한다고 강요한다. 나 역시 완벽에 대한 강박으로 나와 아이를 괴롭혔던 사람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된 나의 혼란스러움에 대해 놀랐고, 괴로웠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내가 늘 그리워하던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다.



'너'가 '나'를 부를 때 새로운 '나'가 태어난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 <옆으로 누운 어머니와 아이Ⅱ>, 1906년, 파울라 모더존 베커 미술관


그림 속의 엄마는 갓난아기를 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한 팔로 아이의 머리를 바쳐주고, 자신의 머리는 목이 꺾인 채 곯아떨어졌다. 아이는 엄마의 배를 빠져나왔지만, 엄마의 배는 아직도 아이가 있었던 흔적을 품은 채 볼록하게 부풀어 있다. 엄마의 가슴은 젖이 도면서 빵빵하게 부풀어 있고, 유두는 아이의 입에 맞게 통통히 부풀었다. 아가는 엄마가 양보한 부드러운 깔개를 깔고, 엄마 팔에 머리를 괴고 잠을 잔다. 엄마 젖을 빨고, 엄마처럼 통통히 불은 배를 엄마 살결에 맞대고 있다. 고요한 적막도 잠시, 그림을 계속 들여다보면 엄마와 아이의 들쑥날쑥한 숨소리가 들리고, 이들의 보드라운 살결과 따뜻한 온도, 그리고 젖비린내가 콤콤하게 올라온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많은 기억을 찾게 했다. 엄마가 나를 포근히 안아주던 그 부드럽고 말캉한 살결을 기억해 냈다.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나보다 더 속상한 얼굴을 하던 그 표정을 기억해 냈다. 내 주변을 서성거리며 나와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을 기억해 냈다. 엄마는 늘 내 곁에 있었다. 내가 슬플 때, 내가 화날 때, 내가 외로울 때도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그렇다. 내가 그리워하는 ‘엄마’는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다. 배고프지 않게, 춥지 않게, 외롭지 않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을 그리워한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를 때가 좋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고,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고,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좋다. 나는 ‘엄마’라서 좋다. 엄마가 아니었으면 알 수 없는 삶을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나의 새로운 면을 일깨워주고, 낯선 것들을 배우게 한다. 나는 아이로 인해 '엄마'가 되었다. 아이로 인해 새로운 내가 되었다.


"엄마는 '엄마'로 살고 싶어? '희주'로 살고 싶어?"

아이는 대답을 재촉한다. 이제 갈등 없이 말해줄 수 있다. 나는 나의 이름이 좋다. ‘엄마’라는 이름이 좋다. ‘희주’라는 이름이 좋다. 그 둘은 선택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 둘은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차별하지 않는다. 그 둘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또 다른 내가 태어난다. 그것이 ‘나’다. 나는 그런 ‘나’로 살고 싶다. 나의 여러 이름들이 서로 화해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를 평가하거나 다투지 않는 사이에서, 새로운 ‘나’를 창조하고 싶다. 그것이 바로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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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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