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포플러 나무 연작>
변화는 왜 어려운가?
상담을 시작할 때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과연 변할 수 있을까요?”이다. 이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삶이 변화한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다시 묻는다. “문제가 다시 생길 수도 있나요?" 이 질문에도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대답한다. 삶은 반복 속에 있다. 아빠가 싫었지만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게 되고, 이전 회사에서 싫은 상사를 피해 다른 회사로 옮겼지만, 그 상사와 비슷한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다. 친구와 다퉜던 같은 문제에서 또 갈등이 일어나고,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혼하고 재혼했지만 이전과 유사한 문제로 다시 이혼하기도 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반복 강박’이라고 한다. ‘반복 강박’은 문제와 고통이 운명처럼 반복되는 불운한 사건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문제의 상황을 반복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이고 충동적인 심리 기제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익숙한 것을 택하려는 경향이다.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같은 문제에 다시 빠지게 된다. 문제를 인식하더라도 삶의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고 동일한 문제를 반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거의 문제가 현재에 되풀이 되풀이 될 때마다 실망감을 찾아온다. 변화를 원할수록 더 큰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반복은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반복되는 문제는 미해결 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문제의 해결을 원한다. 과거에 해결되지 못한 문제는 다시 오늘 찾아오고, 오늘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미래의 어느 날 다시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미해결 된 문제는 다시 나를 찾아온다. 이 반복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해결의 기회 역시 반복되어 찾아오는 것이다.
내게 찾아온 문제를 의식적으로 관찰하며 바라볼 때, 반복은 고착이 아니라 변화의 기회가 된다. 우선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문제를 인식하게 되면 같은 문제를 겪더라도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 직면해야 할 상황인지 뒤로 물러나야 하는 상황인지 판단할 수 있다. 바르게 상황을 인식하고 다르게 반응한다면 이때의 반복은 변화를 위한 반복이 된다.
반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반복
인상주의 시작을 연 클로드 모네(1840-1926)는 반복을 변화로 전환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는 같은 대상을 수십 번 반복해 바라보았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서서 자연을 바라보면서 날씨, 공기, 빛,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대상을 관찰했다. 모네는 자연의 대상을 그리려 하지 않고 자연을 바라보는 자신의 인상을 포착하려고 했다.
사람들은 고정되어 세상을 본다. 풍경을 보며 "저것은 태양이야, 저것은 바다야, 저것은 배야"라고 하면서 대상에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태양은 노랗고 붉은색으로, 바다는 파란색으로, 배는 풍경 속에 적당한 비율과 구도 속에 그려진다. 모네는 이러한 대상을 고정적으로 보는 인식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모네는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잊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눈앞에 보이는 집, 들판, 나무를 그리지 말고 "저것은 초록색 사각형이야, 노란 줄무늬야"라고 생각하며 색과 형태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모네는 자신에게 비친 순수한 인상을 찾고자 했다.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인상,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인식하려고 했다.
그는 대상을 동일한 형태로 반복하여 그리는 것에 반대했고, 기존의 전통적인 회화 방식을 벗어나려고 했다. 반복된 관찰 속에서 모네는 ‘다름’을 찾아냈고, 그 '다름'을 통해 새로운 표현을 창조해 냈다. 이처럼 의도된 반복, 의식된 반복, 다르게 보려는 반복은 변화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차이 있는 반복, 기존과 다른 반복은 창조가 된다. 모네는 ‘인상파’라는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창조했다. 기존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자신만의 '인상'을 찾아냈다.
<인상, 해돋이>는 정밀하게 그려진 풍경화가 아니다. 바다와 하늘은 붓터치가 보일 정도로 엉성해 보이고 일출에 비친 햇살은 성의 없이 점을 찍어놓은 것 같다. 모네는 해돋이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옮겨놓지 않았지만 해돋이에서 받은 인상을 표현했다.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안개 자욱한 항구에는 고깃배가 서성거린다. 축축한 공기에 비릿한 냄새가 나는 바닷가에는 붉고 선명한 태양이 떠오르면서 새벽의 칙칙한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이 그림은 무심코 해변을 걷다가 바라본 바닷가의 순간적인 찰나의 느낌을 포착한다.
날마다 새로운 반복
모네는 이렇게 대상의 인상을 포착하는 것을 계속 발전시킨다. 같은 대상을 관찰하며 변화의 과정을 연작으로 그린다. 주로 들판에 있는 건초더미, 성당의 외관, 수련, 센강의 풍경 등, 매일 같은 곳에 있지만 시간대와 날씨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변화에 매력을 느꼈다. 모네의 포플러 나무 연작은 동일한 위치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무의 변화를 포착한 것이다. 그는 배 위에 마련한 선상 스튜디오에서 캔버스를 여러 개 놓고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양과 색감의 변화를 표현했다.
포플러 나무 연작을 보면 강가에는 나무 세 그루가 그려져 있고, 그 뒤로는 다른 나무들이 타원형을 그리며 둘러싸여 있다. 세 그루 나무의 윗기둥이 캔버스 밖으로 잘려 보이지 않지만, 그 바깥에 무언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봄, 세 그루의 포플러 나무>은 연두색 잎사귀가 나오는 계절을 연상시킨다. 여전히 온도는 차갑지만 따사로운 햇살이 그저 반가운 날, 이제 겨울이 끝나고 완연한 봄이라는 설레는 기분 감돈다. <여름, 세 그루의 포플러 나무>에는 풀이 좀 더 짙게 변하고 있다. 대기 중 수분은 많아지고, 구름의 색은 짙어졌다. 짙은 녹색의 열정은 뜨겁게 이글거리고, 습한 공기는 여름의 열정을 감당하기 어렵게 만든다.
<흐린 날의 포플러 나무>의 나뭇잎은 짙은 청록빛으로 변하고, 강물에 비친 하늘에서 햇빛이 비밀스럽게 반반 짝거린다. 빛이 거의 사라졌지만, 빛이 없기에 볼 수 있는 색이 있다. 빛이 적을 때만 나타나는 보랏빛 나는 푸른색이 이색적이다.
<바람 부는 날의 포플러 나무>에서는 나무의 가느다란 기둥은 흔들림이 없지만, 가지들은 사정없이 흔들리며 바람의 힘을 견뎌내고 있다. 나무에 저렇게 많은 나뭇가지가 있었는지 알게 된다. 속모습까지 사정없이 드러난다. 그리고 보지 못했던 바람의 존재를 알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알지 못했던 나를 알게 되기도 한다.
같은 계절이라도 다른 풍경을 보이기도 한다. 두 그림은 모두 가을에 그린 것이다. 왼편의 가을은 초록색이 아직 살아 있어 초가을쯤 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침 공기가 서늘해지면서 일교차가 상당히 일어나는 계절이다. 여름이 끝나기는 했지만 단풍이 물들면서 자연의 변화가 아쉽지 않은 시기이다. 오른편의 가을은 붉은 잎의 색이 바래고 핑크빛이 되었다. 나무는 점점 수분을 발산하면서 색을 잃어갈 것이다. 붉은 단풍이 모두 떨어지고 난 후 늦가을의 서러운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 가을나무에도 핑크가 들었다. 봄이 시작되는 그날처럼 가을에도 핑크빛이 반짝 거린다.
다시 부르는 노래
매일 똑같은 삶은 없다. 매일 같은 자리에 있는 나무도 그것을 비추는 햇빛의 양, 해의 기울기, 대기의 온도, 습도, 바람의 세기에 따라 달라진다. 그럼에도 삶이 늘 똑같고 변화 없이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삶을 고정된 시선으로 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나무만을 보고 나무를 둘러싼 환경은 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상주의자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면 나무는 언제나 새롭다. 나무 옆에 있는 햇살과 바람, 대기와 시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의 변화는 나무를 날마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 나무를 새롭게 하는 것은 나도 나무도 아니다. 바라보는 나와 나무 사이에 있는 것들 그 사이에 흐르는 공기, 관계, 맥락, 시선이다. 보이지 않던 존재를 자각하고, 그 시간들이 쌓이고, 그것들을 새롭게 배열할 때, 같은 대상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인식된 것만이 실재하는 것이 된다. 인식한 만큼만 세상은 확장된다. 인식이 넓어질수록 존재는 풍부해진다. 다르게 보려는 시도가 반복될수록 삶은 다채로워진다.
완전한 변화는 불가능하다. '없음'에서 '있음'이 되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복서가 되거나 피아니스트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삶이 어느 날 손바닥 뒤집듯 ‘불행 끝 행복 시작'으로도 바뀌지도 않는다. 인간의 변화는 삶의 맥락 속에서 일어난다.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삶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다. 변화는 내 삶의 자리에서, 내가 살아낸 시간들 속에서 움직이는 만큼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이다.
같은 겨울도, 같은 봄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찾아오는 계절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이 살아내는 일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어제와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예술가가 이전과 다른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며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듯이, 인생 또한 어제와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며 나만의 삶의 리듬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사랑이 오면 이별도 온다. 꽃이 피면 곧 지고 만다. 매일의 하루가 다하면 다시 밤이 찾아온다. 이별이 왔어도 다시 사랑을 기다리고, 겨울이 왔지만 다시 봄날을 기다린다. 시들어 버릴지라도 만개하는 꽃을 보고 싶다. 변하는 것이라도 사랑하고 싶다. 죽더라도 다시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싶다. 그렇게 반복이 만들어 내는 무늬를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