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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부딪치는 감정이 만드는 역동

에드가 드가 <발레 스타>

by 정희주

감정과 감정 사이의 긴장감


뒤늦게 미술치료를 전공하게 된 것은 미술관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미술관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림을 보며 이전의 기억들이 새롭게 떠오르기도 했고,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시공간으로 여행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가끔은 심장이 두근거리며 흥분되는 그림을 만나기도 했고, 어떤 그림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며 고정관념을 흔들기도 했다. 미술관을 다니며 자연스레 '미술'이 가지는 심리적 힘에 대해 느끼기 시작했고, 미술과 심리를 동시에 전공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미술사도 아닌, 미술교육도 아닌 미술심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나의 경험을 논문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연구를 위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작품에 대한 배경 설명은 보지 않고, 몇 가지 질문지가 적힌 워크시트를 적으며 전시를 관람하는 것이다. 전시 관람에서의 첫 번째 미션은 나를 끌어당기는 그림을 찾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그림과 불편한 그림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각각은 어떤 성찰을 줄까? 궁금해졌다. 마음에 드는 그림과 불편한 그림 두 가지를 찾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 시나리오가 적합한지 테스트에 들어갔다. 좋아하는 작품에는 크게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미술관의 그림은 적당한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었다. 문제는 불편한 그림을 찾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나조차도 미술관에서 작정하고 불편한 그림을 찾아본 경험은 처음이었다. 에드가 드가(1834~1917)의 <"장애물 경마" 실내 인테리어>이라는 작품에서 시선이 머물렀다.


에드가 드가 <"장애물 경마" 실내 인테리어>, 1880~81, 이스라엘 박물관, 예수살렘


그림 속에는 빨간 옷을 입은 한 남자가 경주마에서 떨어져 누워 있다. 혹시라도 남자가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당황하지 않을까? 혹시 절망하고 있을까? 기수가 떨어진지도 모르고 계속 앞을 향해 달리는 말을 보며 더욱 슬픈 생각이 들었다. 실내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은 그를 더 외롭게 보이게 만들었다. 나는 이 그림 속에서 슬픔, 외로움, 절망 그리고 무기력감을 느끼며 기수의 감정에 이입되었다. 마치 달리는 경주마처럼 회사 생활을 하다가 경력이 단절된 나를 보는 것 같았다. 회사에 다닐 때는 앞만 보고 달리는 삶이 괴로웠다면, 이제는 말에서 낙마한 것 같은 패자가 된 기분이었다. 경주를 멈추고 나면 우아한 은퇴를 할 것이라고 꿈꾸었지만, 현실에서는 낙마한 기수일 뿐이었다. 나는 스스로 낙오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대학원 공부까지 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삶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처참했다.


드가의 그림은 자기기만하며 살아가던 나의 속마음을 드러나게 해 주었다.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드가의 그림은 어째서 이토록 통렬한 절망감을 느끼게 했을까? 만일 말에서 떨어진 사람만 그렸더라면, 그 남자의 표정을 슬프게 강조했더라면 나의 비통함이 이렇게 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드가의 그림에서 기수가 떨어진 장소는 다름 아닌 경주가 한창인 그 순간이다. 승부를 가르는 장면과 말에서 떨어지는 기수의 모습이 대비되면서 강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모두가 한 방향을 보며 질주하는 인생 속에서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나의 불안감마저 투사되었다.


에드가 드가 <잘못된 출발>, 1869-72, 캔버스에 오일, 예일대학교미술관


드가의 그림은 무심해 보이지만 강렬하다. 드가는 말의 움직임을 그리기 위해 경마장에 자주 찾았다. 당시 파리에서는 영국에서 수입되어 온 경마 스포츠에 열광했고, 화가들은 말의 빠른 움직임을 포착하고 싶어 했다. 다른 예술가들이 주로 말이 경주하는 장면을 그린 반면, 드가는 달랐다. 드가는 경기 전·후 상황을 그렸다. 경주 장면에서는 빠른 속도감, 승부에 대한 쾌감, 경쟁심 등의 일관된 정서가 강조되겠지만, 드가가 그린 그림은 복잡하다. <잘못된 출발>에서는 우연히 찍힌 사진처럼 구도가 재미있다. 말은 앞으로 질주하려고 하고, 기수는 멈추려고 한다. 말은 미래로 나아가려 하지만, 기수는 과거로 돌아가 상황을 되돌리려 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과 되돌아가려는 힘이 강하게 대치하며 긴장감을 유발한다.


드가의 그림 속에는 설렘, 기대, 실망, 긴장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들어 있다. 경주에서 출발 신호를 어기거나, 경주 중 말에서 떨어진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긴장감과 패배감은 더욱 고조될 것이다. 드가는 움직임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는 말의 움직임 그 자체를 그리지 않았다. 순간을 포착하지만, 그 순간을 정지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 순간과 연결된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순간으로 만든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하는 기괴함


에드가 드가 <발레 스타>, 1876~1877, 모노타이프에 파스텔, 58X42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드가의 그림에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그는 경마와 발레처럼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는 장면에 관심을 가졌지만,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고상함만을 그리지는 않았다. 경마장에서는 속도감과 흥분뿐 아니라 이면의 긴장과 정적도 포착했듯이, 발레 장면에서는 화사한 아름다움과 함께 어둠이 등장한다. <발레 스타>에서 발레리나는 꽃으로 장식한 화려한 발레복을 입고 아름다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녀는 그림의 중앙에 등장하지 않았다. 무대 위의 발레리나를 정면으로 위치시키지 않고 테라스에서 아래를 내려보듯이 무대와 무대 뒤편까지 넓은 시야를 담고 있다. 아름다운 발레리나 뒤로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보인다. 남자의 얼굴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 뭔가를 숨기고 있는 인상을 준다.


당시 발레는 지금의 예술적 지위가 아니었다. 발레단에는 하층민 가정의 소녀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거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발레리나가 되면 다른 일자리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도 있었을 뿐 아니라 스폰서들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돈이 많은 부르주아 남성중에는 소녀들의 아름다움을 돈을 주고 사려는 이들도 존재했다. 드가는 그림 속에 이 아름다운 발레리나와 함께 그녀의 아름다움을 거래하려는 검은 양복은 입은 남자를 함께 그려 넣었다. 무대 위에는 아름다움뿐 아니라 비정하고 참혹한 현실이 함께 존재했다. 드가의 작품 속에 보이는 대상뿐 아니라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환경을 함께 그려 넣었다. 그의 그림 속에는 환상과 현실, 아름다움과 추함, 평화와 긴장, 순진함과 이기적 현실이 공존하며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상할수록 사실적인 현실


에드가 드가 <벨렐리 가족의 초상> 1860-1862, 캔버스에 오일, 200X250cm, 오르셰 미술관, 파리


드가의 사실성은 단지 역동적인 장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초상화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다. <벨렐리의 가족의 초상>의 인물들은 보통 생각하는 전형적인 가족 초상화가 아니다. 어머니는 검은 상복을 입은 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고, 아버지는 홀로 멀찍이 떨어져 있다. 인물들 사이의 거리와 표정을 통해 가족 안의 긴장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이 그림은 드가의 고모 가족을 그린 것이다. 고모부 벨렐리는 사회운동에 몰두하며 바깥 활동에 집중했고, 고모 라우레가 가족의 생계와 자녀의 교육을 홀로 책임졌다. 라우레의 얼굴은 얼핏 무뚝뚝해 보이지만 슬프고 외롭게 느껴지는 반면 벨렐리는 등을 보이고 앉아 자신의 가족과 관람자 모두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가족이야 말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할 수 있는 완전한 내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오해와 갈등이 존재한다. 소통을 원하지만 오히려 깊은 단절이 생기기도 하고, 연결을 원하지만 단호히 끊어지기도 한다. 그때는 옳고 지금은 틀린 일은 셀 수도 없다. 그러한 변화 앞에서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변치 않기를 바랄수록 변화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좋은 것일수록, 기대가 클수록 변함이 없기를 를 바란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변하는데 나의 소중한 것이라고 변하지 않을 리는 없다. 사랑, 우정, 믿음, 소망과 같은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답게 미화된 환상이다. 마치 무대 위에 발레리나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 눈앞의 환상을 조금 멀리 떨어져 본다면 나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와 너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볼 수 있었지 않을까? 어제와 오늘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지 않을까?


드가는 양가적인 감정과 삶의 모순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관계 속에 존재하는 미묘한 분위기와 긴장을 세심히 관찰하여 정확하게 표현했다. 무대 위에 발레리나의 아름다움과 함께 추한 내면을 고발함으로써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가족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이상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 너머


에드가 드가 <막이 내리고>, 1880년경, 판지에 파스텔, 54X74cm, 개인소장


내가 드가의 경마장 그림을 보고 유달리 불쾌감을 느낀 것은 단순히 실패나 좌절감 때문이 아니었다. 질주와 멈춤이라는 극단의 대비에서 오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삶의 명암이 유독 나를 지치게 했다. 나는 갈등에 취약한 편이다. 의견이 부딪히는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다. 갈등이 생길만하면 상황을 피한다. 나를 주장할 자신도, 상대를 굴복시킬 자신도 없기에 평화주의자인척 연기할 때가 많다. 양가적 감정이 일어날 때는 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을 습관적으로 선택하려 했다. 도전하는 흥분을 견디기보다는 긴장을 해소하는 편안함을 택하는 쪽이었다.


이러한 심리적 갈등은 특별한 상황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매일이 갈등이다. 자유를 원하지만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하고,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진다. 쉬고 싶다가도 막상 쉬면 뭔가 하고 싶어지고,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정작 여행에 가면 집이 생각난다. 솔직하고 싶다면서도 진짜 마음은 감추려 하고, 변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습관대로 살아가려 한다. 큰 불행 속에서 기쁨은 강력하며 슬픔의 존재가 있어야 기쁨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삶은 모순의 연속이다.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긴장과 평온, 아름다움과 추함은 짝꿍처럼 함께 존재한다.


드가는 삶의 모순을 포착했다. 그는 아름다움을 과장하지 않았고, 추함을 감추지도 않았다. 삶에 존재하는 극과 극의 장면들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담았다. <막이 내리고>에서는 장막을 통해 환상적 무대와 현실의 공간 사이의 경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동시에 공존한다. 모순은 없애야 할 것도,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삶에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 모순된 감정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우리는 세상을 편집해서 보려고 한다.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 이미지에 몰두한다. 그렇게 취향이 생기고, 편견이 쌓이며, 삶의 양식이 형성된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간다. 내가 만든 세계가 있다면, 네가 만든 세계도 있는 것이다. 내가 보는 무대 뒤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내 겪은 사건 뒤에는 배경이 되는 또 다른 사건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간 뒤에는 그동안 살아왔던 과거의 시간이 있다. 내 눈에 보이는 것, 내가 지각하는 것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건과 지각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보이는 무대뿐 아니라 좀 더 넓은 조망을 갖게 된다면 대립과 갈등은 있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반대의 감정을 인정한다면 견딜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동안 내가 만들어낸 환상적 장면에도 여러 번의 막이 내려졌다. 그때마다 나는 끝나는 무대를 바라보며 "어떻게 이렇게 끝날 수 있어?"라며 서럽게 울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벌어진 일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보이는 것 너머를 상상해 본다면 삶은 좀 더 많은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이라는 무대가 끝나갈 때 이제는 다르게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 막이 내려진 무대를 보며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고마웠다고. 덕분에 함께 웃고 눈물 흘리며 생생히 흔들릴 수 있었다고. 그렇게 환상과 현실로 구분된 경계에 마침표를 찍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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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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