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초월이 아니라 현실이다.

철학수업 후기 : <불교철학 역사분석>

by 정희주
열반은 탐욕의 절대적 종결을 의미하는 까닭은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이 즐겁거나 즐겁지 않거나,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느낌을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들에 동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 출처.『불교철학 역사분석』칼루파하나 지음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의 깨달음은 열반이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생에 대한 집착이 있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그러나 집착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다. 두려움이 없으면 다시 집착도 생기지 않는다. 이렇듯 깨달음은 마음이 동요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 대상이 죽음과 같은 거대한 것일지라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열반에 이르는 방법에는 명상이 있다. 명상을 통해 선정이라 불리는 집중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선정은 네 단계로 구분된다. 처음에는 쾌락과 고통이 함께 존재하는 집중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외적 자극이 차단되고 쾌락과 고통이 점차 감소하기 시작한다. 평온하고 정신이 안정되는 기분이 느껴진다. 흔히 일상에서 경험하는 명상의 단계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 과정은 환희롭고 기쁘며 에너지로 충만한 느낌을 동반한다. 이보다 심도깊은 명상의 단계에서는 그리고 이 기쁨마저 소멸하는 내적 고요의 상태에 이르러, 기쁨과 슬픔 모두를 초월하는 순수한 평정에 도달하는데, 이를 ‘사무색정’이라 한다.


사무색정은 다시 네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모든 것을 무한한 공간으로 지각하는 ‘공무변처정’, 무한한 공간을 단지 의식으로 지각하는 ‘식무변처정’, 의식마저 ‘공’으로 지각하는 ‘무소유처정’, 지각도 비지각도 없는 ‘비상비비상처정’의 단계를 거친다. 그리고 마침내 상수멸정의 단계에 이른다. 상수멸정은 열반 직전의 상태로,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 상태이며 탐욕이 없다.


명상의 초기단계에서는 마음이 고요해지고 편안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기쁨과 슬픔 모두를 초월하는 단계, 지각도 비지각도 없는 단계는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언뜻 초월적인 이야기로 들리며 신비로움이나 미신적으로 이야기로 오해되기도 한다.


가끔 유튜브에는 명상 중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는 보고들이 등장한다. 세상을 빛으로 보았다거나, 모든 것이 먼지처럼 느껴졌다거나, 우주의 공간에 붕 떠다니는 느낌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들이다. 명상을 하다 보면 그러한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는 증언을 듣는다. 이것은 매우 경험적인 것이기에, 직접 겪어보지 않는다면 글이나 말과 같은 언어적 설명만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저 신비롭거나 혹은 미신처럼 들릴 수 있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자기의 인식이 확장된다던지,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없어진다던지 하는 말들이 신비로운 체험으로 들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경험한 사람에게조차 그 경험이 여전히 ‘신비로운 체험’으로 설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경험이 '일상적 체험'으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을 자는 중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들, 그것이 잠 속에서만 머문다면 일상의 삶과는 분리되어 있을 뿐이다. 잠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깨어 있는 삶 속에서 그 깨우침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 낮의 삶에서도 그 상태를 유지하도록 수행해야 한다.


명상을 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다. 이들중 여전히 일상적인 문제에 치이며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좋은 책을 읽고, 미술관에 가고, 음악을 듣고, 철학을 공부하면 마치 더 큰 세계와 접속된 것 같고 내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명상센터나 미술관, 음악당, 학교와 같은 특정한 조건을 벗어나, 내가 살아가는 삶의 체계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이미 굳어진 삶의 구조와 습관이라는 강한 식(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하다. 수행은 상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꿈이나 잠 속에서 하는 것도 아니다. 눈을 감고만 하는 것도 아니다. 수행은 몸이 하는 것이다. 몸이 삶의 방향을 밀고 나가야 한다. 그렇기에 깨달음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전차 경주를 통해서 어떤 나그네가 결국에는 자신의 여행 목적지에 도착하듯이, 인간도 도덕적 원칙들을 갈고닦음으로써 종국에는 자유와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유와 행복은 그 궁극적인 성과나 목적을 이루게 되어,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은 혼란으로 점철된 일상의 생활을 인식과 자비로 이루어진 생활이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팔정도)이라고 묘사된다.

정견正見 (올바른 견해), 정사유正思惟 (올바른 사유), 정어正語 (올바른 말), 정업正業 (올바른 행위), 정명正命 (올바른 생활), 정정진正精進 (올바른 노력), 정념正念 (올바른 주의), 정정正定 (올바른 집중)"

- 출처.『불교철학사』칼루파하나 지음


깨달음이나 해탈(궁극의 행복과 자유)이 목적지라면 그곳에 가는 길을 걸어야 한다. 다른 길을 걷게 되면 그만큼 목적지에서 멀어진다. 간혹 삶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언변 속에서 정말로 무언가 특별한 경험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착시가 일어나기도 한다. 나 역시 작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아는 체하거나 우쭐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팔정도라는 지도를 펼쳐 든다. 나는 지금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를 묻는다. 깨달음 현실을 초월한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쁨과 슬픔이 가득한 이 지극한 현실 속에서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상태이다. 폭우 속에서도 파도가 일지 않는 심연처럼, 생과 사의 경계가 사라진 바다처럼 동요 없이 깊고 고요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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