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줍기 다크초콜릿 01. 분류의 감옥

분류의 함정 (feat. 안티 MBTI)

이해인가 오해인가
이해인가 편견인가
그런 분류 틀에 나를 넣고 싶어?


인간은 늘 ‘이해’라는 이름으로 ‘편견’을 만든다.
그 시작은 언제나 똑똑한 누군가였다.
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이름 앞에 권위를 단 사람들.
그들은 인간을 다루기 위해 표를 만들고,
그 표를 다루기 쉽게 하기 위해 ‘유형’을 발명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 데이터가 되었다.

그 틀은 처음엔 분석의 도구였지만, 이내 통제의 언어가 되었다.
‘E형이라면서 왜 이리 소극적이야?'
'T라며 왜 그리 감정적이야?.’
‘그 사람은 사주에 금이 많으니까 냉정해.’

MBTI라는 이름으로 16개 분류 체계 안으로 우겨넣고 이해한다고 말한다.
더 촘촘해봐야 사주팔자,
결국엔 생년월일 시때에 맞춰 유형을 메긴다.
이걸 이해하는 게 진짜 자기를, 타인을 이해하는 거라 믿는다.

사람은 점점 설명된 존재로만 소비되고,
이해는 사라지고, 분류표만 남는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이해일까?

분류체계의 잔혹함은
복잡한 인간을-모호한 뉘앙스로 가득찬 인간을 두부 자르듯이 정돈하려는 데 있다.
우연과 예외, 변화의 여지를 지워버리고, 몇 글자짜리 틀 안에 사람을 눌러 담는다.
그건 편리함을 가장한 폭력이다.

사람들이 분류를 사랑하는 이유는 이해의 욕망이 아니라 도피의 심리 때문이다.
스스로를 모르는 공포, 타인을 모르는 불안을 줄이기 위해
“나는 INFP니까 그래요”
“그 사람은 ESTJ라서 그런 거예요”
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분류체계 감옥 안으로 기꺼이, 기어이 밀어넣는다.
그 감옥은 끼리끼리 편견으로 열리고, 안심이라는 이름으로 잠긴다.

지식의 부조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해’를 명분으로 인간을 정리하고, 고정하고, 예측 가능한 상품으로 만든다.
생각의 넓이는 좁아지고, 감정은 몇가지 고작 몇십 혹은 몇백의 단어로 매뉴얼화된다.

학문인가?
아니, 불안의 산업화로 읽힌다.
“너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문장 하나로 세상을, 나를 정리한 듯한 착각을 판다.

그러나,
그 틀의 바깥에도 사람은 산다.
그들은 틀 안의 사람들 눈엔 이상하고 불편해 보이기도 한다.
아니다. 틀 안의 사람들은 틀 밖에 사는 사람들을 절대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의 틀 안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정작 그 바깥의 사람은 편안하다.
숨을 쉬고, 흔들리고, 바뀌고, 멈추기도 하며 그 어떤 분류체계로도 들어가지 않고, 어떤 공식으로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체계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편안하게 수용한다.
그 모든 부조리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가식없이 따사로이 품는다.
이런 사람들이 그립다.
갈구하기도 한다.

불편해 보이는 건
언제나 틀 안에 갇힌 자의 시선이다.
자기들만 보이는, 세상엔 존재하지도 않는 선을 부르짖으며, 그걸 넘는 순간 선을 넘었다며 파르르 떤다.

틀 밖의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벽을 잊었다.
불편한 게 생기면, '나는 지금 어떤 선 안에 갇혀있어 답답한 걸까'
그저 스스로를 돌아볼 뿐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이해받으려 하지 않는다.
틀 안이라는 것도 틀 밖이라는 것도 없다.
그냥 존재한다.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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