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Point 공감] 영화. 왕과 사는 남자

하얀 고봉 쌀밥, 뽀얀 온기에 관하여

작은 미소, 작은 친절, 작은 나눔
'작은'은 작지 않다.

*스포일러

*내용 보고 봐도 상관없으나 애니웨이 스포일러


초반 30분 정도의 다소 과도한 웃음 유발 설정만 무사히 넘어가면 된다.
웃기려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다.
TV로 봤다면 처음 30분을 견디지 못했을 것도 같다.

단종을 싣고 유배지로 향해오는 나룻배가 뒤집어지던 순간부터, 마음을 씨게 흔들고 단디 붙잡는다.
'극장에서 보길 잘했어.'

600만 넘어 700만을 향해간다.
1000만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중이다.
700만에 닿는다면 700만 명이, 1000만을 넘는다면 1000만 명이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굶주리고 있는지를.


진정한 왕의 카리스마


유배지에서 내내 식사를 거부하던 단종은 우연히 호랑이로부터 마을 백성을 지킨 순간, 백성을 품는 왕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순간, 유약한 어린 왕의 품위와 카리스마가 거대하게 함께 터지기도 했다.
하지만, 상실감에 허덕이던 어린 단종이 진심으로 거듭난 순간은, 밥 한 그릇 뚝딱 비운, 그 순간부터다.
그런 생각이 든다.

처음 허기를 느낀 단종은, 유배지 백성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정성껏 준비한 밥상을 먹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호랑이 잡던 기개보다, 어린아이로 해맑게 밥을 먹는 모습에서 왕의 기품과 카리스마가 더 진하게 전해진다.
그 미소를 보는 모두가, 극장 안 어두운 침묵 속에서 함께 뜨끈해진다.

국 끓인 이를 궁금해하는 왕에게, 관리사의 답변이 너저분해진다. 국은 누가 끓였는지, 국속에 들어가는 재첩은 누가 쎄빠지게 캤는지, 나물은 누가 뜯었는지, 생선은 또 누가 구웠는지...
시시콜콜 생색내는 마음 앞에서 왕은, 그래그래 유심히 듣는다.

새하얀 온기가 담긴 고봉 쌀밥과 뭇국(재첩국처럼 보인다)과 생선과 나물가지를 남김없이 먹어치우며 그는 새롭게 눈을 뜬다.
이 소박한 밥상이 뭐라고, 저 작은 미소가 뭐라고, '무려' 다시 태어났다는 기분까지 안겨주는 걸까.
그는 백성을 보호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백성과 연결된 존재로 피어나는 듯했다.


마음을 나눈다는 것에 관해


처음 단종이 내치던 하얀 쌀밥 한 공기는
누군가에겐 생명 그 자체고
누군가에겐 삶의 목표고
누군가에겐 정성이며 마음이다.

왕이 투정처럼 거부한 밥상이 백성에겐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알려준 것도, 저 작은 밥상 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시간과 정성과 마음이 담겼는지 알려준 것도 배를 주린 빈곤한 백성이다.

마음이 들린다는 것,
마음이 닿는다는 것.
얼마나 놀랍고 귀한 일인가.

왕이란 결국,
이런 마음을 내치지 않고 수용하는 자다.
글로 쓰면 대단한 일, 거창한 행위가 실려야 할 것 같지만, 단종이 보여준 왕의 모습은 다르다.

정작 본인들은 굶주리면서도, 왕의 건강을 한 마음으로 기원하는 백성들을 한 명 한 명 벽 없이 마주한다.

오 그때 그 밥상, 국 끓인 이가 그대야?
아아~나물 캐느라 고생 많았구나...
어쩜 그리 맛나게 만들 수 있어?

시시콜콜 들어주고 알아주고
다독여주고... 베시시... 그저 웃고.

하얀 쌀밥 하나 얹힌 소박한 밥상을 사이에 두고 도란도란 오가는 수다 속에서 권력의 벽이 무너지고 빈부의 격차가 사라진다.
모든 경계가 무의미해진다.

온기
온기
오로지
온기만으로 꽉 차오른다.
새하얀 쌀밥 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처럼.

마음을 나눈다는 건
이다지도 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소소한 밥상머리 사이로 흐르는 쉽고 가벼운 수다 속 작은 웃음에 눈물이 터진다.

요 근래 살아오며 우연히 받은 가르침 중에, '작은 친절, 작은 미소, 작은 나눔'이 있다.
이 영화에서 '작은'의 힌트를 본 것 같다.


새하얀 고봉 쌀밥의 역습


작은 친절, 작은 미소, 작은 마음
이다지도 쉬운 것들이,
이지경(?)으로 불가능해진 요즘이다.

영화 속 조선 단종의 시대,
영화 속 백성들은
새하얀 고봉 쌀밥을 보며
침을 꼴딱,
몸의 굶주림을 느낀다.

영화 밖 AI의 시대,
영화 밖 관객들은
새하얀 고봉 쌀밥에서
정신이 홀딱,
마음의 굶주림을 바라본다.

고봉 쌀밥 한 그릇에 꽉꽉 눌러 담긴 사람 마음의 온기를 보는 것이다.

역설이란 이런 것이다.
현대인 중에 흰쌀밥 한 공기를 목표로 달리는 이는 없다. 거의 없다로 정정한다.
우리 조상들에겐 그토록 절실했던 쌀밥은, 빌어먹을 외모지상주의에 밀려 '당 폭주 아이템, 살찔템'으로 가치가 곤두박질쳤다.

밥상머리 온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바빠서, 뭐 그리 바쁘다고 효율 효율 효율을 부르짖으며 냉랭해졌다.
간혹 함께 앉은 밥상머리에서도 카페 테이블 앞에서도 눈을 맞추며 웃는 일도 귀하다.
그 사이엔 스마트 폰이 서늘한 장애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 속 작은 한토막에서 한가닥 피어오르는 온기에 충격 수준의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가 허기진 것은 몸뚱아리 배가 아니다.
마음이다.
우리는 모두 진심이 담긴 사람다운 나눔에 굶주려있다. 미쳐버릴 정도로.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서 받은 감동이 값지다.

하얀 쌀밥의 역공은 '왕과 사는 남자' 이 영화에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습게 기피한 쌀밥은, 마음을 허물고 녹이며 복수(?)에 성공한다.


마음이 따뜻한 곳으로


강물에 떠내려오는 단종의 시신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건져낸 관리인은, 단종에게 가족이 되어주었다.

아니, 이들이 밥상을 함께 마주한 순간부터 혈연을 떠난 가족 관계는 이미 시작되었을 거다.


단종 역시 같은 마음이다.

한명회 앞에서 자신의 계획이 무너지던 순간, 자신의 죽음 앞에서 관리자를 기꺼이 기어이, 필사적으로 살려낸다.

그에게도 역시, 관리인은 가족으로 남았다.


관리자가 지키려 한건 단종의 영혼이다.

단종의 뻣뻣해진 육신을 끌어안으며

'춥죠~따뜻한 곳으로 갑시다'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은 몸뚱아리에 영혼이 있을 거라 믿는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백성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디 있을지 모를 그 정체 모를 영혼이 따뜻하길 바라는 한줄기 마음은 고이 나빌레어 분명히 어딘가에 닿을 것이다.


악역이란 없는 것일 수도


권력에 탐욕스러운 자들에 대한 묘사는 과감히 덜어내어 설득력이 진해졌다.

영화 속에서 수양대군은 아예 등장도 하지 않고, 피를 토하는 권력 다툼도 없다.

한명회의 입장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요즘으로 치면 초등 5학년;) 17세(요즘 고1학년;;;)에 서늘한 시신으로 강가에 둥실거리던 단종의 마지막 모습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했다.


이 어린 왕의 죽음은 조선왕조 실록에 얼마나 조촐히 기록이 되어있을까 궁금하다.

왕권에서 밀려난 왕의 묘사는 구구절절하지 않을 것 같다. 그저 드라이한 몇 줄 혹은 한 바닥 수준일까.


그러니, 그런 기록에서 이렇게 현재롤 사는 사람들에게 온기를 전하는 시선에 감동을 받을 수밖에.


지금 내 앞에 작은 미소, 작은 마음을 나누며 밥상머리 시간을 공유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감사함을 대충 뭉개고 지나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다.


끝물 단상


좋은 영화의 조건이 꼭 연출의 기능, 연기의 기술 등 능력만이 다는 아니다.
그 너머에서 전달되는 마음의 온기가 좋았다.

아마 이 영화를 투자했거나, 이 영화를 선택한 모든 배우들은 시나리오를 통해 이런 온기와 굶주림을 봤을 것 같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느꼈을 것만 같다.

진솔한 마음은 결국 기술과 기능을 넘는다.
서툴든 능하든.
굳이 글로 표현하면 이런 것을 증명하는 영화다.
영화는 확실히 좋은 소통 도구다.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
네이버에도 같은 글이 있습니다.
영화글은 네이버와 브런치 버전을 다르게 해서 올리려 했는데, 이 영화는 그대로 올리고 싶네요.

두 공간의 운용 전략이 아직은 미숙한 때라 살짝 머리가 아프네요^^
여기에 올리는 것도 맞는 거 같고, 저기에 올리는 것도 맞는 거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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