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명을 만나도 9000명을 만나도 채워지지 않을 거야
나를 끝없이 올리는 가상 연애
나를 한없이 내리는 현실 연애
솔직히 말하면 이 서비스, 상용화된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수요의 문제인데,
수요는 이미 있다. 이 드라마가 그걸 증명했다.
처음 두세 명은 어색하다.
생소하고 거부감도 든다.
그런데, 익숙해지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예전에 내가 만나온 사람들에 대한 경험치가 겹치면서 금방 적응한다.
그다음부턴 갈아치우는 데 부대낌이 없어진다. 900명을 만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어느 순간 자유로워진다.
이게 어느 측면에선 좀 무섭다.
어쨌든 가상이지만, 사람을 갈아치우는 데 익숙해진다는 거니까.
내가 만나는 캐릭터가 다른 사람들도 만난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허탈하다.
내 주변 모두와 공유하는 존재라는 걸 인지할 때 실망감, 상실감이 온다.
더 흥미로운 게 있다.
나만을 위한 특별한 상대에 대한 욕구, 이게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나만을 위한 완벽한 서비스를 받으면서도 결국 "실제 나만의 것"을 원하는 욕망이 튀어나온다.
900명을 자유롭게 갈아치우던 사람이 갑자기 소유욕을 느끼는 거다. 가상인데도.
인간 욕망이란 게 징글징글하다.
본색일까, 본질일까?
자유를 줘도 결국엔 독점을 원한다.
드라마는 이 부분을 가볍게 지나쳤다. 근데 이걸 제대로 건드린 게 '블레이드 러너 2049', 'Her' 같은 영화들이다. 그 영화들이 잠시 겹쳐 생각났다.
월간남친은 그나마 깨발랄 코드다.
가볍게 넘어가 다행이다.
요즘은 머리 아픈 게 질색이다.
가상 연인과 시간을 보내다 현실로 돌아온다.
눈앞의 사람이 낯설다.
이 사람을 향한 내 감정이 진짜 이 사람을 향한 건지, 아까 가상에서 만난 그 사람을 향한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더 복잡한 건, 가상의 그 남자가 현실 누군가와 겹칠 때다.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 아직 정리 안 된 감정,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
네가 왜 여기서 겹쳐서 튀어나와?
내가 선택한 캐릭터인데 왜 이 얼굴이지?
이건 가상 연인을 향한 감정이 아니다. 내 안에 오래 쌓인 것들이 눈앞의 가상 남친에 투영된 거다.
내 눈앞의 현실 남친이 가상 남친과의 잔상과 비교된다.
그게 잔인하다.
현실 연인은 실제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비교 대상이 되는 거니까.
가상 연애 서비스가 좀 무서운 부분
서강준 캐릭터가 있다.
기존에 내가 사귀었던 '선배'와 겹치는 가상 연인이다. 서비스가 끝난 이후, '그로부터 몇 년 뒤' 컨셉으로 새롭게 재등장한다.
대학생 선배에서 멋진 어른 직장인의 모습이다.
무방비 타이밍에 허를 찌르며 나타난다.
다시 만나게 되는 유혹을 만들어낸다.
가상 연애 서비스가 무서운 점 중 하나다.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며 "이번 한 번만 더"를 이끈다. 꿈꾸는 연애에 중독되기 시작하는 지점으로 보였다.
유혹에 약한 나는, 아예 발을 들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레절레.
900명이 있어도 성에 안 차서 구독 취소하려는 순간, 내 모든 취향을 쏟아 넣은 최고 이상향이 등장한다. 구영일(901)-작명센스 인정이다.
근데 그것도 결국 같다.
완벽한 상대를 만들어낸다 해도 내 욕망은 끝이 없는 게 문제인 거니까.
이런 서비스가 익숙해지면, 현실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지 않을까.
현실에선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힐링타령하며 가상 연애로 들어갈지도.
지금도 충분히 성에 안 차면 손절, 선긋기, 차단이 익숙한 세상인데.
이보다 더?
이 지점을 생각하면 숨통이 막힌다.
개인적으로 '그놈의 힐링타령' 주의다.
한마디로 나한테 맞지 않는 것들에 대한 피로감이라 생각해서다.
나를 불편하게 해도, 상대를 향한 나의 수용치를 넓혀주는 현실 연인 vs 내 모든 걸 맞춰주는 가상 연인.
어느 쪽이 진짜 가치 있는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세상이 오고 있다.
둘 다 병행하며 조율점이 찾아질 수도 있겠다.
같은 서비스, 다른 연애
똑같은 가상 연애 상대를 두고 이용자마다 서로 다른 연애를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명확할수록 이 서비스를 누리는 방식의 주도권이 달라진다.
그래서 모두가 멋진 남주에 홀릴 때 머슴 서브 캐릭터에 시선을 뺏기는 웹툰 작가 장면에서 폭소가 터졌다.
아 취향이여. 저럴 수도 있구나.
여주인공의 친구 중 연애를 자유롭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여자가 가상 세계로 들어가서 한방에 주도권을 갖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어쨌거나, 내가 주인공'이라고 했던가?
가상 세계로 들어가서까지 벌벌거릴 필요가 없다는 건데...
이런 부분의 마인드셋은 꽤나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 같다.
나는 초반엔 좀 찌질하다가 후반부로 접어들면 저런 모습일 수도 있겠는데? 싶었다.
현실에선 안되니까 대리만족용으로 한 달만 무료이용해 볼까?
근데 무료 이용은 항상 키스 직전에 서비스 끊어버릴 예정일 거 같으니까, (치사한 것들) 좀 더 계산 좀...
현실 연애는 부대끼고 불편하다.
끊임없이 상대를 맞추기 위해 나를 내려놓는 작업의 연속이다.
거기에 이제, 가상 연애와 현실 연애를 병행한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실제 현실 연인인 상대방이 느끼는 혼란도 더해질 것이다. 이건 이 서비스가 상용화되면 반드시 오는 문제일 것 같다.
'A는 안 그런데 너는 왜 그래?'
이런 류의 비교질이 가상 연인과 현실 연인과 비교하는 코드로 바뀔 것도 같다.
으으... 이건 좀...
여친이 월간남친을 구독하는 것을 알게 되고, 그중 한 명의 가상 연인이 자기와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그런 여친을 수용하며 달려가는 현실 남친 주인공이라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어서요'
이게 이 드라마의 최고 레벨 판타지 캐릭터다.
최고의 판타지 연인은 결국,
심드렁해도,
현실에 있다.
박경남이 멋있는 이유다.
서인국이어서 설득력을 가졌다고 치자.
아무튼 현실 연인에게 힘을 실어주는 마무리,
땡쓰하다.
마무리
상대에 대한 나의 부대낌과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 한,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자기 깎기가 없는 한, 현실 연애는 건강하게 발전하지 않는다.
무조건 나에게 맞추기 원하는 가상 남친 구독 서비스, 과연 내 정신을 건강하게 할까?
900명을 만나도, 9,000명을 만나도,
90,000명을 만나도 채워지지 않을 거야.
그거 하난 알겠네.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 네이버에도 같은 글이 있습니다.
더 많은 글은 네이버에 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