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생각이 너무 많을 때, 나는 한라산에 갔다

무기력에서 빠져나온 방법

생각에 갇힌 사람에게
산에 가보라 하고 싶다

사진
2026.2.12일 관음사 코스


생각 지옥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에게, 산을 권한다

생각에 짓눌려 무기력 시즌을 길게 겪었던 적이 있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깝고, 몸이 더 이상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때 — 한라산 겨울산으로 내 몸을 끌고 갔다. 운동량이 최저 바닥인 상태로. 무모하게.

생각이 너무 많다는 건 사실 짓눌린 게 아니다.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가 문을 잠근 거다.
생각은 가만히 있을수록 커진다.
방 안에 있으면 방을 다 채우고,
침대에 누우면 머리 위를 뚫고 천정까지 올라온다.
멈춰 있는 사람한테 생각은 절대 친절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불친절하게 몸을 끌고 나갔다.


정상은 꼭 보지 않아도 된다.
겨울산에 필요한 장비와 먹거리는 최선을 다해 꼼꼼하게 챙긴다.
겨울산에서 얼어 죽거나 어디 다치기는 싫으니까.
그게 전부다.

눈이 미친 듯이 쏟아져 정상엔 통제가 걸린 날이었다. 정상을 찍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져 오히려 좋았다. 부담 없이 오르는데 — 오르는 순간 통제가 풀렸다. 나는 내 계획과 상관없이 그렇게 한라산 정상 백록담에 있었다.


백록담에 대한 감동? 그런 건 없었다.
무기력의 완치? 그런 것도 없었다.
오르는 내내
'내가 무슨 낙을 보자고 이 짓거리냐~~~우씨'
이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것조차 생각할 틈이 없었다.
한 번 들어선 산은, 무조건 내려와야 했으니까.

주저앉고 싶었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누군가 들고 날라줬으면 싶었다.
근데 나는 헬기를 부를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다.

사람 몸은 살기 위해 엉덩이로 쓸고서라도, 기어서라도, 밧줄에 온몸을 의지해서라도 내려오게 되어 있다.
몸을 무조건 움직여야 할 때,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 발 더 가야 할 때 — 몸은 생각을 밀어낸다. 살아남는 데 집중해야 하니까.

산에선,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다.
생각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걸 막을 수는 없어도, 거기에 끌려갈 새가 없다.
산의 오르막과 내리막은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죽고 싶지 않으면, 어디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지금 내 한 발에 집중해야 한다.
산은 그러라고 말하지 않지만, 그렇게 만들어버린다.


그때 이후로 나에게 무기력은 핑계가 되었다.
완치된 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습관처럼 무기력한 날이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알게 된 게 있다 — 생각이 나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생각 없이 몸을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걸. 한라산이 온몸으로 가르쳐 줬으니까.

그래서 나는, 쓸데없는 생각에 갇혀 무기력을 합리화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하루 정도는 오만 핑계를 내려놓고 산에 가보라고.
산 입구까지만 가도 된다.
들어가다 힘들면 돌아와도 된다.
정상 따위 몰라도 된다.

근데 딱 하나만 — 내 발로 걸어 나와야 한다.
누가 데리러 오지 않는다.

거기까지 했다면, 이미 문을 연 거다.

혼자 갈 수 있다면,
혼자 가길 권한다.

딱 나 같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죽어라고 이런 방식이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 거다. 패스하면 그만이다.


지금의 나는, 꼭 한라산 꼭대기로 나를 데려가지 않아도 된다.
서울 산도 동네 산도, 굴곡 없는 동네 공원도, 차가 다니는 도로 옆도 다 괜찮다.
그곳으로 몸을 끌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걸 안다.

나는 여전히 내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고,
언제든 다시 무기력의 늪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최소한, 산을 갈 수 있어서 감사하고 다행이라는 건 안다.
단 한 번의 경험이 주는 힘은 위대하다.

그 이후엔 뭐든 괜찮았다.

설거지도,
빨래도,
구석구석 청소도.

내 쓸데없는 생각을 밀어내는 데, 작은 것들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여전히 가끔 산에 간다.
산에 다녀온 글을 써볼까 한다.
나는 이 단 한 번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PS.

나는 이제. 한라산 꼭대기는 날씨 보고 간다.
2026년도 올해 초에 눈꽃이 만발한 맑은 날의 백록담을 맞이했다.
겨울산을 벗어나 봄, 여름, 가을도 가보고 싶다.
계절마다 어떤 풍경이 될지 보고 싶다.
그 옛날 그 한 번의 경험으로 한라산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 서울에도 주변 곳곳에 널린 산이 많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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