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이비스 스타일, 13만원
누구나 ‘어른’ 했을 때 떠오르는 이상적인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내게는 일을 끝마치고 도시 야경이 내려다보는 호텔 고층 객실에서 와인을 마시는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27살 생일, 그 이상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10대엔 호텔은 내가 함부로 발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비싸고, 어른들만 가는 곳이며, 엄청나게 격식을 차려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20대가 되고 고정적인 수입이 생기며 간간히 호텔에 머물기 시작하며 착각의 일부가 깨지긴 했지만 (엄청나게 비싸다던가, 격식을 차려야 하는 곳은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도 여전히 내게 호텔은 어른의 장소였다. ‘퇴근 후에 체크인 한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호텔’ 은 더더욱.
생일날 호텔을 예약했다. 용산에 위치한 이비스 스타일, 슈페리어 더블룸. 월초부터 13만원을 쓰자니 조금 부담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1년에 한 번 오는 생일이란 생각을 하자 망설임없이 예약할 수 있었다. 마침 생일도 반차를 내기 참으로 적절한 금요일. 2시에 허겁지겁 일을 끝마치고 퇴근해 호텔로 향했다.
낮 3시쯤 입실한 호텔은 너무 너무 마음에 들었다. 23층을 배정받았는데, 용산 전자상가가 내려다보이는 뷰가 마음에 들었다. 이젠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낮 시간 동안 다른 볼 일을 모두 보고 8시 쯤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와인 한 병과 초리조, 살치촌, 벨큐브 치즈를 사들고. 역시 와인엔 치즈와 소시지 아니겠습니까... 정말 안주 선정까지 너무 맘에 들어.
우선 땀에 절은 몸을 씻고 나와 프런트에 전화해 와인 오프너를 요청했다. 호텔 프런트에 와인 오프너를 요청하는 나... 너무 커리어 우먼 같고 멋졌다. 와인을 살 때 함께 구매한 플라스틱 와인 컵에 한 잔 따라 나 자신과 건배했다. 방금 씻고 나와 보송한 몸, 서울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고층의 호텔, 그리고 와인 한 잔. 어릴 적 꿈꿨던 어른의 모습 그대로였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올라 누워 바라본 천장마저 좋았다. 피부에 감기는 침구의 느낌마저도. 호텔 침구는 무슨 브랜드길래 이렇게 푹신한 걸까? 지금보다 좀 더 어른이 되면 더 비싼 호텔에 가서, 더 비싼 방을 잡고, 그 때는 와인도 비싼 걸 먹어야지. 한 5년 쯤 지나면 TV에서만 보던 고급 호텔에도 머물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내게 주는 보상이자 미래의 생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