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대포항 홍게 세트
‘봄바람 휘날리며~’
다니는 곳곳마다 벚꽃 연금이 흘러나오는 3월이 되었다. 3월에 부는 봄바람은 집 나간 며느리도 더더욱 멀리 보내버린다고 했던가. 가만히 있어도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계절이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군고구마와 귤을 까먹고 옷 정리를 시작했다. 묵었던 봄옷들을 꺼내놓고 겨우내 입었던 코트는 서랍 깊숙한 곳으로 벗어던졌다. 갑자기 찾아온 봄이 낯설어서일까, 추위에 굳었던 관절들이 풀린 게 어색해서일까. 지나가버린 겨울이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 아끼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어 놓고도 겨울 동안 위축되어 있던 것이 사실이다. 뜨끈한 순댓국이 땡길 때도 6천 원 아끼자고 집에서 밥을 해먹었고, 겨울 특산품인 과메기와 한라봉도 비싸서 안 사먹었다. 떠나간 겨울이 아쉽기만 했다.
그래, 더 늦기 전에 겨울 송별회를 열자. 군고구마와 귤껍질을 까던 추억은 다음 겨울을 향해 기나긴 여정을 떠나버렸고, 남아 있던 나의 코트 한 꺼풀마저 벗겨내었으니…
지나간 겨울을 추모하며 마지막으로 대게 껍데기를 까야겠다!
사실 대게를 제대로 먹어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게살 볶음밥, 게맛살 따위는 종종 먹을 일이 있었지만 있는 그대로의 대게를 식탁 위에서 언제 마주쳤는지는 가물가물했다. 커다란 등딱지를 탁 열었을 때 튀어 오르는 뽀얀 국물과 다리 껍데기 사이로 쭉쭉 빠져 나오는 게살 말이다. 부드럽고 달콤한 대게살로 가득 채울 뱃속을 생각하니, 여간 허전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대게 하나만 바라보고 계획도 대책도 없이 여자친구와 속초로 향했다. 무턱대고 끊어버린 크로스핏을 함께 다니느라 체력 소모가 심한 여자친구에게 꼭 대게를 대접하리라.
맛좋고 인심 좋기로 소문난 대게 전문점은 미리 찾아봐두었다. 우린 대포항에 도착하자마자 식당으로 향했다. 홍게 세트를 시켰는데 5분도 되지 않아 첫 스키다시가 나왔다(밑반찬이 바른 말입니다. 하지만 횟집에서만큼은 신성한 단어이니 이번만 봐주세요^^). 스타트를 끊은 게살 죽은 끝내줬다. 죽 속에 들어간 작디작은 게살이 품은 부드러움에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이 가격에 이 구성이 가능해? 바가지를 덜어도 너무 덜으셨어요, 사장님ㅠㅠ’ 소리가 절로 나올 뻔했다. 광어, 도치, 멍게, 해삼, 한치, 조개회, 전복, 바지락 탕…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 스키다시는 스키를 태우듯 맛의 향연에서 지상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내려왔다.
이윽고 본 게임이 시작되었다. 새빨간 거인처럼 거대한 찐 홍게 2마리가 등장했다. 대게를 먹는 자, 말이 없다고 했던가. 살을 바르느라 식당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
여자친구와 나도 ‘핵꿀맛이네…’ 이 한마디를 끝으로
게살 바르는 데 온정신을 집중할 뿐이었다.
길쭉한 홍게 다리 사이로 대게 전용 포크를 쏙 집어넣으면 무조건 반사처럼 큼직한 살이 쑤욱 빠져나왔다. 김밥 옆구리에서나 보던 가짜 게맛살과는 차원이 달라 비쥬얼 쇼크 그 자체였다.
‘오오... 반갑습니다. 홍겟살님이여...’
한 톨의 부스러기라도 떨어질까 고귀한 존재를 영접한 듯 한 손으로 고이 받쳐 나머지 한 손으론 포크에 게살을 매달아 입으로 가져갔다.
‘향부터가 다르다…!’
나는 까무라칠 뻔했다. 씹을 필요도 없이 혀 위에서 녹아버리는 홍게! 설레는 마음만 잔뜩 부풀려 놓고 이렇게 금방 사라져버리다니… 너무 이기적이었다. 사실 번복하자면 본 게임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홍게 라면과 홍게 등딱지 볶음밥이 등판한 것이다.
놀라지 마시라. 이 모든 것이 8만 원이었다. 아끼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내 마음이 무색할 만큼 저렴한 가격이다. 혹시 모를 바가지와 ‘카드 사절’을 대비해 현금을 두둑이 챙기기까지 했는데, 괜히 사장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만큼 저렴하고 실속 있는 맛집이었다. 강원도까지 달려온 시간도, 돈도 마음도 아끼지 않은 하루였지만, 이날만큼은 덕분에 즐거운 추억이 아낌없이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