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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두만 Nov 02. 2022

길고양이에 대한 단상

인간의 공감능력에 대하여


 채식 및 동물들의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신기함을 느낀다. 개구리를 불쌍히 여기는 뱀도 없고 사슴의 입장을 고려하는 호랑이도 없지만 가축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하는 인간은 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획기적이다. 타 생명의 결정권자인 포식자가 자율적으로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피식자의 입장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주체의 본질을 판단하는 기준을 이성이 아닌 감각으로 보는 논의들을 보며 나는 종차(種差)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성이고, 그 이성이 끝내 공감의 형태로 발현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공감, 감수성이 올바르게 작동되기 위해서는 정돈된 이성이 기저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타 존재를 이해하려는 모습은 숭고하지만 충분한 이성이 바탕으로 되지 않을 경우 그 본 뜻을 곡해받기 쉽다. 흔한 예로는 길고양이를 들 수 있겠다. 길고양이의 처우에 관한 논의는 분명 생명을 다루는 중요한 주제이지만 실상은 그러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길고양이가 인간의 생활에 끼치는 해악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무시하며 온정 어린 시선을 보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길고양이를 돌봐야 하는 이유를 합당한 근거가 아닌 외모지상주의로 채웠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만약 고양이가 바퀴벌레처럼 생겼다면 고양이에 대한 처우 논의는 이루어질 틈도 없이 사회적 해악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국민청원에 올라와서 전국적인 길고양이 토벌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생명존중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으나 사람은 존중하지 않는 이중 잣대의 상황에 직면하는데, 그 허술한 논리의 틈을 외모지상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더불어 인간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과도한 자연의 보호를 추구한다면 에코 파시즘이라는 비판의 여지마저 생긴다. 물론 생태계와 인간의 삶이 완전히 윈윈 할 수 없기에 절충이 필요하겠으나,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감수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외모지상주의가 빚은 모순된 생명존중이 차별적 에코 파시즘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거칠게 요약한다면, 그는 자연의 최종 목적이 인간이라고 보았으며, 인간의 궁극 목적은 행복이라고 보았다. 즉 인간의 행복 실현이야말로 자연이 가지는 목적의 궁극 점이다. 최종 목적인 인간과 다른 동물들은 분명한 종차를 가진다. 개와 고양이의 애교는 사랑스러우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보다 우위에 설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동물과 인간을 동등하게 바라보지 못할 근거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자율주행이 도입된 미래에 트롤리 딜레마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될까? 사각에서 튀어나온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핸들을 꺾어 동물을 희생시켜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동물이 아닌 사람을 살려야 한다고 판단할 것이다. 실제로도 동물과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에서 동물을 살린다고 선택한다면 법적 처벌을 받을 것이다. 분명 생명의 우선순위는 여타 동물보다 인간이 절대적 우위에 있다.


  그럼에도 나는 개체적 자아(self)가 아닌 대자연(Self)을 다루는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로 프랑스의 법학자 바삭은 인권을 자유, 평등, 연대의 세 가지로 분류한다. 권리의 영역이 개인에서 타인, 공동체로 확대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초국가주의적 현상에 직면한 상황에서 연대권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구는 하나와 같은 낭만적인 슬로건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대한 담론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논리적이고 합당한 이유가 명분을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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