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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두만 Nov 04. 2022

낯 선 곳, 낯익은 곳

익숙함 뒤편에는 낯선 풍경이 자리하고 있다


  몸이 기억하는 출근길은 기계처럼 일정하다. 오른쪽 보도를 일정한 보폭과 일정한 속도로 걸어 사거리에 도착하고, 항상 같은 시간에 바뀌는 도보 신호에 맞추어 횡단보도를 건넌다. 정해진 시간에 바뀌는 신호등에 맞추어 차들은 움직이고, 교통체증이 심하거나 심하지 않은 구간들을 지나 버스에서 내리는 시간은 대개 비슷하다. 나의 아침은 9시 출근이라는 데드 라인에 최적화되어 있다. 난 항상 다니는 길을 한 가지 방식으로만 움직여서 목적지에 도착한다.


  출근길의 목표는 단 하나, 정해진 시간까지 정해진 자리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 목표를 위해 다른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제보다 구름 낀 하늘과 그새 야위어진 나무, 같은 버스를 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난 많은 것들을 눈에 담지 못했다. 버스가 몇 분 뒤에 도착하는지, 환승해야 할 다음 버스는 또 너무 빨리 오거나 너무 늦게 오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휴대폰만 쳐다봤다.  

익숙한 건물의 뒤편에는 실외기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출근길의 데드 라인은 시간에 얽매여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게 한다. 그 속박에서 벗어나 느릿하게 움직이면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보게 된다. 가지런한 길을 벗어나서 마주한 모습은 내가 이곳에 거주한 주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색하기까지 하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실외기, 자주 가는 떡볶이 가게의 뒷문,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상상이 안 되는 창고 비슷한 곳까지. 익숙함 뒤편에는 낯선 풍경들이 숨어있고, 그곳에는 어릴 적 숨겨둔 비밀편지 같은 설렘이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속도가 달라지면 주위의 세상도 변한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너는 할머니, 태권도 학원에서 나와 집으로 뛰어가는 어린이, 장을 보고 아파트 현관 번호를 누르는 아주머니. 모두 동네를 거닐다가 지나쳐 본 사람들이다. 생각해보니 난 그 사람들을 인식한 지 꽤나 오래됐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이웃이 아니라, 근처에 사는 '남'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를 에워싼 것들에 관심을 가질 때 나의 세계는 더욱 명료해진다. 음악을 잠시 멈추고 이어폰을 가방에 넣으니 지금껏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학원을 마친 아이들의 대화 주제나 단지 한편에서 고추를 너는 할머니의 표정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하면서도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상대가 아닌 나에게 원인이 있으리라. 석양이 내리는 단지의 모습은 평소 같으면서 평소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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