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래 함께했으면 좋겠다
설을 맞아 오랜만에 시댁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반가운 얼굴들이 거실을 채우고, 익숙한 웃음소리가 집 안을 맴돌았다. 분명 따뜻한 시간이었는데, 올해 설은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이 자꾸 내려앉았다.
할머니 때문이었을까. 남편의 외할머니는 내게도 특별하다. 나는 나의 할머니를 많이 사랑했는데 일찍 보내드려야 했기에 할머니가 있는 사람들이 늘 부러웠다. 그래서 결혼 후 ‘나에게도 할머니가 생겼다’는 사실이 참 좋았다.
그런데 얼마 전 할머니께서 허리 수술을 하셨다고 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예전처럼 자유롭게 움직이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도 약수터를 다니고 자전거를 타실만큼 체력이 좋으셨는데 천천히 걷는 모습, 자리에서 일어나실 때 잠시 숨을 고르는 모습, 그리고 예전보다 확연히 줄어든 식사량까지 많은 점들이 불과 1~2년 사이 달라져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바라봤지만 사실은 자꾸만 눈길이 갔다. 아마 남편의 기억 속 할머니는 더 애틋한 존재일 것이다. 언제 가도 같은 자리에서 손주들을 맞아주고, 밥을 차려주고, 손을 잡아주던 그런 따뜻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가족이 된 뒤로 그 따뜻함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할머니에게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 설날 나는 처음으로 느낀 바가 있다. 흐르는 시간은 추억만 쌓아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까지 함께 보여준다는 것을.
설날 식탁에 둘러앉아 시댁 부모님을 바라보다가도 마음이 먹먹해졌다. 언제나 나보다 크고 강하다고 생각했던 부모님 역시 이제는 노후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부모님의 시간이 멈춰 있길 영원히 바라고 있었다. 항상 지금 모습 그대로이기를.
하지만 아니었다. 부모님도 할머니처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시간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사실이 갑자기 너무 슬퍼졌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오래 머물러 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알고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도 멈춰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전의 설날에는 새해 인사를 건네고, 덕담을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 아무 생각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올해를 기점으로 시간이 더욱 소중해졌다. 좋은 사람들이랑, 가족들이랑 더 자주 보리라. 이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자 평범한 순간들이 귀하게 느껴졌다.
당연했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걸 새삼 배우고 있는 중이다. 나이가 들수록 새해 소원도 단순해진다.
대단한 성공도, 거창한 계획도 아니다. 그저 모두 아프지 말고 건강하기를. 우리 오래 함께하기를.
이보다 더 진심인 소원이 있을까. 더 자주 찾아가고, 더 많이 안부를 묻자고 남편과 다짐했다.
돌아오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슬픔은 어쩌면 나쁜 감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만큼 내가 이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시간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함께하는 시간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일은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다.
올가을쯤에는 조금 더 건강한 얼굴로 다시 만나기를. 그리고 그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우리가 이렇게 계속 서로의 새해가 되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