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여가는 수첩, 늘어나는 아쉬움

장인은 연장 탓하지 않는 법이라지만…

by 나른히
도구를 갖춰야 글을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수첩을 사 모았던 적이 있었다. 출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에, 잠자기 전 머리맡에서 틈틈이 글을 쓰겠다는 이유로…. 가지각색의 수첩이 방 안에 쌓여갔다. 몇 년 전 교수님이 수업 때 했던 말을 떠올려 큼지막한 수첩을 사기도 하고, 가방 안에 쏙 들어갈 수첩을 사기도 했다. 수첩만 있으면 글을 잘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글쓰기 초창기에는 모니터의 하얀 화면만 보면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었다.

‘하얀 화면’만 보면 공포증이 걸린 것처럼 손끝이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네이버 메모’에서 배경을 수첩처럼 꾸미고 글을 쓴 적도 있었지만 그다지 효과가 있지 않았다. 그냥 컴퓨터 앞에 앉으면 생기는 병 같았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저절로 해결될 일이었다. 무섭든 말든 회사에서 업무를 마치려면 무조건 글을 써야 하니까….

아무튼, 당시에는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당장 어딘가에 메모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메모를 잘해야 한다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니까. 초조해하며 ‘하얀 화면’을 대신할 요량으로 수첩을 사게 된 것도 이쯤부터였다.


1473048058fce9bf3df8c648fa9d3ba1e445c90e2d__mn650006__w400__h264__f32788__Ym201609.jpg 지갑과 수첩의 마음이 이러지 않았을까.


그 많던 수첩들은 어디로 갔을까?

수첩뿐 아니라 기계식 키보드도 샀었다. 어디선가 기계식 키보드가 있어야 글이 잘 써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팔랑귀는 이래서 위험하다). 도저히 글이 써지지 않아서 별수를 다 쓰던 때, 그때 나는 차라리 책을 읽었어야 했다. 아니면 부담 없이 일기라도 조금씩 쓰던가.

분명 나 같은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도구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이제 와 깨닫건대 밖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은 방 안에 홀로 앉아 가만히 생각하지 않으면 별것 아닌 것들이었다. 단어로 툭툭 적어놓아 봤자 나중에 살펴보면 해독할 수 없는 암호가 되어 있었다.

출퇴근길에는 소란한 분위기에서 뭘 적을 수 없었고, 점심에는 글 쓰는 것보다 산책이 좋았다. 결론은 수첩이 그리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정말 필요하면 메모 어플을 열고 몇 마디 적어내면 그뿐이었다. 애초에 몇 마디만 써도 되는 일을 길게 써보겠다고 수첩을 사고 기계식 키보드를 산 것이다.


쓰면 쓰고, 아니면 말고

나의 기억력은 보통 그다지 좋지 않지만, 뭔가 좋은 아이디어 같으면 꽤 오랫동안 힘을 발휘했다. 아침에 떠오른 생각이 점심 내내 머릿속을 헤매다 저녁에 컴퓨터 앞에 앉으면 저절로 써지기도 했다. ‘하얀 화면’을 그렇게 극복했다. 쓰고 싶으면 저절로 쓰게 된다. 메모는 당연히 하면 좋지만, 굳이 하루를 메모로 가득 채우려고 애쓰며 스트레스받지 않기를 바란다.


쓰면 쓰고, 아니면 말자.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실패를 거듭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글을 쓰는 건 자신에게도 글에도 전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글이 안 써지면 조금 쉬었다 가면 어떤가. 어떤 작가는 몇 시간을 글쓰기에 집중하며 하루에 원고지 몇 매의 글을 써낸다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도 없고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다. 상사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퇴근했더니 집에서는 잠만 잤다가 다시 잔소리를 들으러 출근해야 한다. 무언가 쓰려는 당신의 시도 자체가 이미 용한 일이다.

힘들면 잠시 쉬었다가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면 될 뿐이다.



커버 사진: Photo by Sticker Mule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마감을 정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