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기고
내 모부님은 분식집을 한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토요일만 되면 손님들에게 떡볶이를 내놓고 테이블의 그릇을 치우고 닦고 설거지를 했다. 어른 손님은 나에게 물었다. “아이구 기특해라. 딸아, 몇 살이니?” 대부분의 손님은 나를 딸이라 부르고 엄마를 아줌마나 이모라 불렀다. 아빠는 사장님이라 부르고. 노동에는 노동에 적합한 직함이나 명칭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엄마와 내가 하던 것은 일이 아니었나? 엄마는 식재료의 재고를 파악하고, 발주를 넣고, 음식을 만들고, 인사를 관리한다. 아빠는 경리와 배달을 담당한다. 나는 서빙과 설거지 담당이다. 자본금은 부부의 재산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한 명은 김 대표, 한 명은 박 대표, 나는 박사원이 되어야 마땅한 거 아닌가, (현실에서는 지윤 씨겠지만…) 라는 생각은 몇 년이 지나 소설 합평 수업에서 하게 되었다.
A가 적은 소설은 코로나 시대에 자영업자의 비애를 담았다. 자영업자는 은퇴한 중년 남성이었는데 어쩐지 새로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디서 들어봄 직한 흔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A는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왜 주인공을 남성으로 했을까. 자영업자 중 중년 남성의 비율이 높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어 통계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높았다. 그 순간 나의 모부님을 떠올린 것이다. 부부가 함께 일할 때 남편만 사장으로 불리는 경우. 그러니까 나는 그 통계를 신뢰할 수 없었다. 역사가 승자의 언어로 기록되듯이 가부장제 속 노동시장에서 여성은 언어를 잃어버렸으니까.
나는 간헐적으로 쇼핑몰 모델 일을 한다. N잡러라는 언어를 파이어족이 만들어냈는지 최저시급에 간당간당한 월급을 주는 노동시장이 만들어냈는지는 모를 일이다. 여하튼 나는 사양산업에 종사하는 파이어족이므로 N잡러가 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다 잡은 일이 쇼핑몰 모델이었다. 앞서 말한 모부님이라는 언어를 쓰는 것만 보아도 알겠지만 나는 페미니스트다. 윤이형의 『붕대감기』에는 미용사이면서 동시에 탈코르셋 운동을 지지하는 지현의 이야기가 나온다. 촬영일만 되면 나는 매번 지현과 같은 착잡한 마음으로 컨실러로 잡티를 커버하고 뷰러로 속눈썹을 올리고 쉐도우로 턱을 쳐낸다. 그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모델이라는 직함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하지 않고, 메인 잡이 아니지만 나는 나를 모델로 칭하기로 했다. 모델은 일이고, 일에는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속성이 있으니까, 여성이 조금은 용서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염치가 생기는 것이다.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당연히 신념과 일치하는 직업을 가졌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뒤틀린 산업은 한두 개가 아니고 그 산업에서 일하는 여성들도 한두 명은 아닐 것이다.
사는 게 일이 되면, 살기도 힘들고 일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삶과 좀 떨어져 마땅한 대표의 대우를 받고, 누군가는 일과 조금 떨어져 자신을 용서하고, 그러면 언젠가는 성공한 여성 대표의 이야기가 아주 흔하디흔해서 지겨워지는 날이,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