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에서의 빛나는 시간이 4개월 여가 남았다.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해 두었지만 아직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돌아가는 것이 실감이 안나는 나-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은 잘 마무리하라는 인사를 건넨다. 아직 나는 밴쿠버에서 즐길 것이 많이 남았는데...
사실 몇 달 전부터 새롭게 밴쿠버에 오게될 사람들로부터 우리 차는 언제 처분할 계획인지, 우리의 살림들을 이어받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연락을 드문드문 받곤 했다. 실례가 될 수도 있어 죄송합니다만, 식의 예의 바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메일 어디에서도 무례한 표현은 없지만 받고 나면 내 밴쿠버의 마지막이 가까워졌구나를 느끼게 되는, 짐정리를 재촉받는 느낌이라 즐겁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 두고 갈 것, 가져갈 것, 고민 중인 것 목록을 적어 내려가보았다. 집안을 둘러보며 목록을 채우다 보니 하나하나 살림살이를 마련하며 설레고 즐거웠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TV: 혼자 들고 오다가 너무 무거워 버스 정류장에 멈춰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집에 겨우 들고와 연결해보아도 방송이 나오질 않아 인터넷에서 찾아봐 안테나를 사서 연결해 보기도. (네, 이 스마트 TV 세상에 안테나라니요) 당연히, 실패!
-텐트: 반품된 텐트가 저렴하게 나온 걸 보고 사 와서 시도해 봤던 첫 캠핑. 사람들이 반품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통풍이 잘 안 되고 덮개도 없는 텐트. 우리는 역시 캠핑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깨달음.
-이케아 책장: 차가 없던 시절, 공유 차량을 빌려 이케아에 갔다가 주차비 폭탄을 맞았다. 정해진 구역 안에 주차를 해야 하는데 밴쿠버 옆 리치먼드는 공유차량 서비스지역이 아니었던 것.
-스키: 중고 스키를 사러 버나비까지 갔는데, 사고 나서 보니 스키 바인딩을 조절해야 했고, 스포츠첵에 가서 조절을 해달라고 했더니, 너무 오래된 스키라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버나비까지 쓰레기 사러 갔다 온 것(왕복 50km). 그래서 결국 새로산 스키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접어두고 꼭 두고 가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급하고 충동적인 내 성질머리.
어떤 사람은 일이 생기면 차분히 최선의 방법을 찾아 실수 없이 움직인다. 하지만 나는 발부터 동동 구르며 허둥지둥, 실수가 있어 나중에 아 맞다! 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래서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일을 두 번 세 번 하고, 몸이 고생하고, 마음도 고생이다. 그리고 해봤자 좋은 소리도 못 듣고 내가 왜 이렇게 했나. 하는 한탄과 늦은 후회까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하라고 한 사람도 없는데.
나는 왜 늘 조급해하는 걸까?
어제 있었던 일로 남편과 언쟁 중 남편이 말했다.
"넌 네가 최고로 잘난 줄 알아서, 조금이라도 비난받는 걸 참지 못하는 거야."
하지만 사실 그건 아니다. 전혀 아니다.
10명이 있으면 늘 지고, 100명이 있어도 늘 지는 사람.
세상의 멋지고 잘난 사람들—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 패배하는 사람.
나는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내가 잘났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당당함은 내 부족함을 숨기기 위한 방어기제인 것이다. 부족한 나지만 사실은 나는 유능한 사람이고 싶고 빨리 잘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다. 내가 부족하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누군가의 인정이 있어야만 나의 부족한 자존감이 채워지는 것-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너무 커서 일을 처리할 때의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이 되어, 부자연스럽고 긴장하고 더 예민하다.
밴쿠버에 나의 그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두고 가고 싶다.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내 마음이 편한 대로 살아가고 싶다.
내 기준에서 만족할 수 있는 삶, 중심을 단단히 잡고 서는 삶.
어떤 상황에서도 내공이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