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김밥이 너무 먹고 싶은 날이 있다.
20년 전과 달리 여기 영국에서도 이제는 흔하게 김밥을 사 먹을 수 있지만 내가 직접 말아서 먹는 김밥이 먹고 싶은 날이 있다.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료가 특별한 것도 없다. 싱크대 앞에 오래 서 있는 걸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서 식사를 준비할 때 최소한의 시간만을 부엌에서 보내지만 김밥만큼은 예외다. 그것도 남편이나 아이들을 위한 게 아니라, 순전히 나를 위해.
평소에는 나 한입 먹고자 부엌에서 요리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밥이 먹고 싶어지는 날에는 양손에 재료들을 한 아름 짊어지고 와서는 부엌에 풀어놓고 재료를 다듬고 쌀을 씻기 시작한다. 당근껍질을 깎아 채를 썰고, 시금치를 손질해서 데치고, 맛살을 두 갈래로 찢고, 어묵을 달짝찌근하게 간장에 조리다 보면 어느새 밥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갓 지은 밥을 참기름과 소금 그리고 깨소금으로 간을 하면 짭조름하고 고소한 냄새에 계속 손으로 주워 먹게 된다.
김 위에 밥을 얇게 펴고 재료를 가지런히 올려 돌돌 말기 시작한다. 손바닥으로 전해오는 밥의 따뜻함과 손에 닿는 촉감부터 왠지 모르게 든든하다. 하나 둘 만들다 보면 어느새 열 줄은 금세 쌓인다.
따듯한 김밥이 손으로 전해질 때 나는 늘 '엄마'가 떠오른다.
어릴 적 소풍 가는 날 아침이면, 설레는 마음이었는지 아니면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 때문이지 모르겠지만 일찍 눈을 떠진다.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부엌으로 가면, 이미 김밥은 한아름 쌓여 있고 찬합에 김밥이 줄 맞추어져 나란히 누워있다. 내 도시락, 선생님 도시락을 싸고 남은 꽁다리는 한쪽 켠에 고스란히 모여 있다.
꽁다리를 하나 둘 집어 먹다 보면, 어느새 배가 반쯤 찼던 기억도 난다.
그 시절 엄마의 정성과 따뜻함을 조금이나마 흉내 내고 싶은 걸까?
가족의 기호대로, 남편은 단무지를 듬뿍 넣고, 둘째는 마요네즈에 버무린 참치를 가득 넣어준다. 딸은 특별한 요구는 없어서 그냥 평범하게. 그렇게 한 줄 한 줄 말다 보면, 어느새 부엌 한편에 엄마가 그러했던 것처럼 김밥이 군대처럼 줄 맞춰 쌓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김밥을 썰고 난 후, 바로 하나를 집어먹을 때다. 꽁다리도 맛있지만, 가장 중앙에 있는 김밥을 집어들고 한입에 넣는다. 예쁘기도 하고 재료도 골고루 참신하게 들어가 있어서이다. 입 안에 퍼지는 고슬고슬한 밥의 온기와 고소한 참기름 향이 순간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참기름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깨어나, 엄마 옆에서 꽁다리를 집어 먹던 그 시간 말이다.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김밥 맛을 완벽하게 재현하긴 어렵지만, 이렇게 직접 만들어 먹으면 엄마의 온기가 살짝 묻어나는 것 같다.
세상에 맛있는 김밥집도 많고, 솜씨 좋은 분들도 많지만, 내겐 엄마가 싸 주시던 김밥이 가장 따뜻하고 그리운 맛이다. 가끔 이렇게 김밥을 말아먹으면, 비록 몸은 영국에 있어도 마음만은 엄마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엄마의 온기가 깃든 김밥을 한 조각 베어 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