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과 뜨거운 물의 전쟁
영국에 처음 왔을 때, 기대했던 로맨틱한 유럽의 분위기와 달리 현실적인 불편함들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래전 한국을 떠나왔지만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영국에서는 다르게 돌아갔다. 때론 당황스럽고, 때론 답답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아니 아직도 많다. 대영 제국이라 칭함을 받던 나라에서 20년을 넘게 살고 있지만 선진국이라 하기에는 시대에 뒤처진 시스템에 때로는 적응이 안 되기는 부분도 있고 이제는 그럴려니 하고 적응할 시점에 한국을 방문하면 영국의 시스템과 서비스가 참 불편함을 비교 함하게 된다.
제일 처음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영국의 오래된 건물의 수도꼭지이다.
아직까지도 영국은 여전히 찬물과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사용하는 곳이 있다. 손을 씻을 때 한 얼음장 같은 찬물이, 다른 한쪽에서는 손이 데일 정도의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실제로 겨울에 뜨거운 물이 그렇게 콸콸 나오는지 모르고 손을 내밀었다가 화들짝 놀란적도 몇 번 있다. 그야말로 찬물과 뜨거운 물의 전쟁이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몇 번 놀램을 경험하고 나서는 나름 터득한 방법은 찬물과 뜨거운 물을 민첩하게 번갈아 오가며 빠르게 손을 씻는 방법이다. 찬물과 뜨거운 물을 오가면 차지도 뜨겁지도 않게 손을 씻을 수 있다. 아니면 세면대에 물을 받아놓고 온도를 맞춘 후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처음엔 이 시스템이 너무 답답했으나 알고 보니 이는 과거 영국의 오래된 배관 시스템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엔 찬물과 뜨거운 물이 다른 저장 탱크에서 나오기 때문에 온수를 섞으면 오염될 위험이 있어 이렇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요즘 새로 지어진 건물들은 대부분 원터치 수도꼭지를 사용하지만, 여전히 많은 가정과 공공시설에서는 이 ‘고전적인’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불편함보다는 옛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지키는 영국의 모습이기도 하다.
수도꼭지 외에도 영국의 오래된 시스템에서 오는 불편함은 수도 없이 많다.
예를 들면, 영국의 집들은 여전히 카펫 문화를 고수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나무 바닥이나 타일 바닥을 사용하지만, 영국에서는 심지어 화장실까지 카펫이 깔린 곳도 있다. 위생적인 면에서 관리가 어렵고, 물이 튀었을 때 금방 마르지 않아 비위생적인 경우도 많지만, 단열 효과와 전통적인 인테리어 선호 때문에 여전히 카펫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국은 불편하더라도 전통을 지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오래된 건물과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태도가 불편함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이 멈춘 듯한 유럽 특유의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인지 한국에 갔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면, 이 오래된 수도꼭지를 보며 ‘아, 다시 영국에 왔구나’ 하고 실감한다. 비록 불편함이 많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익숙한 영국의 일부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