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가 몇 살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눈을 뜨자마자 엄마, 아빠를 찾아야 했던 나이였던 것 같다.
낮잠에서 깬 아이가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와, 엄마를 찾으며 울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한참을 울고 있었고, 엄마가 아닌 누군가가 다가왔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부터일까. 내 첫 기억은 어둡고 외로운 감정으로 시작된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기억도, 밝지는 않다. 열 살이 되기 전이었던 것 같다. 몸이 불편한 오빠가 있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인지하게 된 시기.
나는 동생이었지만 늘 양보해야 했다. ‘오빠는 아프니까’라는 말은 가족 사이의 침묵 속에 자연스럽게 통용되었고, 무엇을 하든 오빠가 먼저였다.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엄마 아빠의 관심과 사랑조차도. 나는 남은 사랑을 바라며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야 했다.
오빠는 매년 절반 이상을 병원에서 보냈고, 엄마 아빠는 큰 수술을 감당해야 하는 오빠 곁을 지켰다. 나는 혼자 빈집을 지켰다. 새벽까지 방문이 열릴까 봐 눈을 떼지 못한 채 창밖을 바라보던 어린 내 뒷모습이 지금도 기억 속 한 장의 사진처럼 남아 있다.
그래도 나는 잘 먹는 아이였다. ‘아프면 안 돼.’ ‘엄마를 걱정시키면 안 돼.’ 어린 나는 그런 사명감으로 스스로를 다독였고, 늘 활기찬 모습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려 애썼다.
오빠는 일반 초등학교에 함께 다녔고, 학교 친구들도 모두 오빠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특히 친한 친구들은 오빠를 부축하고 가방을 들어주며 아침마다 우리 집으로 들러 함께 등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따뜻하고 사려 깊은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오빠의 존재가 점점 부끄러워졌다.
왜 우리 집엔 아픈 오빠가 있을까. 등굣길에도, 쉬는 시간에도, 나는 늘 오빠를 걱정했다.
‘혹시 다치지는 않을까?’ ‘오늘은 무사할까?’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나는 마음 놓고 놀 수 없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당연했던 일들이 점점 불편함이 되었고, 불평으로, 그리고 부끄러움으로 번져갔다. 사춘기 무렵, 그 감정은 나를 조용한 아이로 바꿔놓았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표정도 감정도 표현하지 않았다. 할줄 몰라서가 아니라 눈치껏 있는듯 없는 듯 지내야 하는 것이 나의 역활이라 생각했다.
어린 내가 느낀 감정도, 참았던 외로움도, 부끄러움도 그냥 가슴에 담아두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애썼는지, 참 잘 견뎠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씩 꺼내어 본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 속에서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나는 시간, 그것이 어쩌면 지금의 나를 이해하는 첫 걸음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