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된다는 건,또 다른 인격체가 내 안에서 자라나는 일이다.
동시에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야만인을 깨우는 일이기도 하다.
자녀를 양육하면서 때로는 인내의 끝을 경험하게 한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 기쁨보다는 우울이 먼저 찾아왔다.
밤새 진통 후 양수를 뒤집어쓰고 나온 2.8kg 딸,머리부터 발끝까지 팔뚝만 한 아이를 품에 안고 나는 서럽게 울었다.내 나이 스물일곱,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이였다.나의 엄마는 22살에 나를 놓자마자 하루만 쉬고 바로 일을 나갔다고 하는데 나는 그럴 기력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냥 서럽게 울기만 했다.신생아 털이 다 빠지지도 않은 채 붉은 피부의 한 작은 존재가 내 앞에서 힘겹게 끙끙대고 있는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며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우니.." 라며 걱정만 가득했다.
몇 달이 지났지만 처음 하는 엄마 노릇에 나를 말똥말똥 바라보던 아이에게 순간 화를 내고, 그 자리에서 후회와 미안함에 또다시 펑펑 울었다. 제 앞가림도 못 하는 내가,매일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일은 이를 꽉 물고 참아야 하는 일이었다. 영국이라는 낯선 동네에서 독박 육아를 해야 하는 상황이 더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기가 태어난 이후 기본적인 권리 또한 포기해야 했다.
조용히 혼자 있을 권리, 제때 밥 먹을 권리, 깨지 않고 잘 잘 권리, 제대로 된 옷차림을 입을 권리까지 모두 내려놓아야 했다. 밤잠을 설치는 건 기본이고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가슴을 내놓은 채 같이 잠이 드는 민망함을 감수해야 했다. 아이를 안고 화장실을 오가야 하는 상황에는 그야말로 족쇄를 찬 기분이었다.
첫째를 유치원에 보내던 시기에는 둘째를 업고 시간에 맞춰 가려고 양말도 손에 잡히는 대로 신고 학교를 데리고 가는 일에 급급했고, 30분이라도 나의 시간을 누려보겠노라 누군가를 만나 수다를 떨어도 아이 픽업 시간이 늘 머릿속에 걸려 있었다. 둘째를 낳고 나서는 거울 한 번 제대로 볼 시간도 없었다. 해가 강한 영국땅에서 선크림은 언감생신 바를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좀 커가면서 몸은 편해졌지만 레벨이 다른 고민거리로 내 발목을 붙잡았다.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아이들 성장 속에서 내 것을 포기하고 어떤 때는 하루하루 인내하며 내 마음을 다스렸다.
속이 상하기도 하고 가슴이 쿵 내려 앉는 사건을 맞주대하면서 아이들은 훌쩍 커버렸고 그 사이 나도 모르게 나도 성장을 했다. 주름도 지고 몸 구석 마디마다 늙어가지만 성숙해져가는 내 모습을 지나고 나서야 바라볼 수 있다.
인간의 성숙이란 어쩌면 낯선 존재와의 갈등, 대립,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인내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다. 그렇게 가족 안에서 함께 버무려지고,서로를 알아가며 살아온 시간 끝에 이제는 대학생이 된 아이와 친구처럼 웃으며 대화를 나눈다. 고민을 털어놓으면 오히려 아이가 나를 위로해 준다.
어느 날은 내 생일이라며 직접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거금을 들여 밥을 사주기도 한다.
속상해서 울고 있는 나에게 살며시 안아주며 토닥거려주는 손길.
그 작은 손이 나를 이끌어주던 순간,엄마로 산다는 것에 행복을 느끼며 나는 또 한 번 울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