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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혜경 Jan 25. 2020

당연하지 않은 사람들

산책을 듣는 시간 | 정 은  


차별이 아닌 차이  ⓒ마혜경


복지 정책은 선진국을 구분하는 잣대가 된다. 각 국가들은 의료, 교육, 주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복지 향상에 집중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최대 다수의 행복에 목숨 걸지 않으며, 절대적 희생양이었던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미국처럼 다인종 국가일수록 세밀한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영국을 포함한 선진국들이 퍼스널 스페이스에 집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장 크게 선을 그었던  인종차별에 대한 의식은 어느 정도 건강한 상태로 성장했다. 이제는 국적이나 피부색으로 차별을 권력화하지 않는다. 퀴어에 대한 이해 수준도 변화되었다. 남성의 반대가 여성이 아니듯이 성(性) 결정권은 두 가지 잣대로 구분할 사항이 아니다. 이러한 흐름은 문학에서도 돋보인다.


현대 출판시장은 소수에 주목하며, 그들의 어조가 쉽게 어필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특정 장애를 다룬 작품이 앞다퉈 출간되고 있는 것을 보면 소수의 삶, 즉 개인의 일상이 존중받는 시대라 할 수 있다. 비록 작품 속 장애인들이 현실보다  소외된 채 주변인을 자처한다 해도 의식의 변화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발맞춰 출간된 작품이 있다.


'차별'이 아닌 '차이'를 말하는 정은 작가 「산책을 듣는 시간」은 이색적이다. 주인공 수지와 한민이는 장애를 버거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이 무거워 허덕이는 모습으로 일관하는 대상은 비장애인들이다. 독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작가의 의도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독자들은 낯설다. 하지만 인물들의 무모한 행동반경에 혀를 차다가도 결국 공감하게 된다.

산책을 듣는 시간 / 정 은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능력


「산책을 듣는 시간」을 읽기 전에, 장애인은 보살핌의 대상이라는 이데올로기부터 버리자. 주인공 수지는 듣지 못하는 장애를 오히려 남들에게 없는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식하기 때문에 독자의 동정심은 불필요해 보인다. 수지의 행위는 체념이 아닌 확고한 의지에 가깝다. '듣지 못함'이 가능한 수지는 이미 능력을 가진 셈이다.


청각장애를 '듣지 못하는 능력'이라고 말하는 수지를,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장애인을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 여기며 측은하게 바라볼 것이다. 이것이 수지와 우리들 사이의 '간격'이다. 비장애인은 장애를 장애 이상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있다. 비장애인들의 이런 시선을 수지는 오히려 장애여긴다. 


수지는 자신의 장애가 이름에서 기인한다고 체념할 정도로 유쾌한 인물이다. 수지 고모가 수지의 이름을 빼어날 수(秀)에 알 지(知)로 정했지만, 술김에 빼어날 수(秀) 대신 손 수(手)로 출생신고를 했기 때문에 수지의 이름은 '빼어나게 안다'가 아닌  '손이 안다'라는 뜻이 되었다. 그 후 수지의 최초 언어는 이름 그대로 '수화'가 되었다는 에피소드는 장애를 유머러스하게 유희하는 능력으로 해석된다. 청력 손실이 자신의 잘못된 이름에서 출발했다는 수지의 유쾌함은 체념과 함께 운명으로 거듭난다.




발로 부르는 노래


수지가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은 노래 지도를 만들며 노는 것이다.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할 때마다 발걸음을 재서 '서른여섯 걸음 짜리'와 '안방에서 옥상까지'의 노래가 탄생한 것은 수지 자신만의 가상 놀이 공간을 의미한다. 수지 옆에서 강력하게 주변인을 자처한 엄마는 수화보다 구화(입모양으로 의사전달) 배우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수지가 화자 입장이 아닌 청자의 자리에 위치하기를 희망하는 모습이다. 사회에 던져질 수지가 상대의 입모양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책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애인 가족의 애로를 작가가 감지한 대목이다.


청각장애인 수지는 시각장애인 한민을 만나면서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한민은 앞을 보지 못하지만 맹인견 마르첼로의 인도로 시야를 확보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는 능력은 이 두 사람에게 침묵과 어둠을 마주하지 못하는 장애로 전락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과 귀가 되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그것은 수지와 한민, 마르첼로가 즐겨했던 '산책'이다. 산책을 통해 고요함을 느끼고 그 고요 속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프로젝트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만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눈과 귀에 피로한 사회는 누구나 산책에 초대받기를 희망한다.


"진정한 고독은 자기 자신과 함께 있는 거야. 그것은 처음부터 둘이야. 너무 가까이 닿을 수 없는 둘이야."(p.163)


관계가 그물처럼 촘촘한 군중 속에서 누구나 외로움을 앓으며 살아간다. 고독이라는 감정으로 홀로서기해야 할 우리들은 외면에 치우친 삶으로 정작 주시해야 할 것에 눈과 귀가 멀어간다. 침묵의 관찰자가 되려만 군중에서 벗어나야 한다.




너는 어떻게 말해? 고맙다는 말?


한민이 수지를 처음 만났을 때 건넨 말은 "너는 어떻게 말해? 고맙다는 말?"이다. 대화의 주체를 상대 쪽으로 양보하는 이 말은 수지의 가슴을 한동안 울린다. '가득 찬 마음'이라는 수지의 표현은 한민의 행동을 고스란히 전달한 것처럼 읽힌다. 장애에 있어서'너'라는 대상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장애인 당사자의 안위가 중요하며 상대의 의중은 그다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으로 장애-비장애의 관계일 때의 모습이다. 한민과 수지는 서로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 세계에서는 또 다른 관계의 장이 필요한 것이다. 이들의 소통은 상대에게 무조건 배려하는 것이 아닌 서로를 맞춰나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극복에 강요를 금하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수지에게 한민이 건넨 임명장은 타인의 정체성이 빛나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 이들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주변의 관심과 배려보다 내면에서 일어난 자발적 의지이다.

강요가 전제된 극복은 곧 무너진다.


당연한 일에 당연하지 않은 사람들이 당연히 수동적일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들은 생각보다 건강하며  나약하지 않다. 오히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당하고 만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세상의 모습은  '당연하게' 돌아가는 것이 드물 정도로 다양하다. 당연하다는 해석만이 진부한 사고를 고집할 뿐이다.







수지 엄마가 수지를 남겨두고 떠난 것은 쉽게  무너지지 말라는 의미다.

수지 할머니가 고층 빌딩이 들어선 가운데 땅을 팔지 않는 이유는 주변에 물들지 말라는 의미다.

수지가 인공와우 장치를 자주 떼어내는 이유는 자신의 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한민이 각막이식 수술을 거부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함이다.

자발적으로 생긴 힘은 타성에 물들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걷는 길은 새로운 기준을 창조한다.

이들은 '산책을 듣는 시간'이라는 중의적인 표현을 프로젝트로 내걸고 세상에 맞서는 중이다.

그런 이들에게 무조건 극복하라는 강요는 폭력에 가깝다.

정작 이들의 언어를 이해 못하는 우리가 장애를 앓고 있는 건 아닐까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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