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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혜경 Aug 28. 2023

작가를 오해하지 않기

읽다가 쓰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


직각으로 자르다

  긴장의 터널을 빠져나오면 자주 티타임을 갖는다. 두 시간 넘게 어깨와 눈동자가 경직되었으니 영혼에 촉촉한 단비를 뿌려야 한다. 어떤 수업이든 그 시간을 모양으로 표현하면 대체로 네모와 비슷하다. 네모 모양의 룸에 들어가 네모를 닮은 글을 읽고 흐트러진 생각들을 직각으로 자른다. 수업은 여러 순기능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생각에 눈을 달 수 있다는 점이다. 앞이 캄캄할 정도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다가도 네모 모양의 시간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막연했던 생각들이 그-런-대-로 정리된다. 그러나 생각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행동으로 이어져야 그 존재 가치가 빛난다. 불필요한 것들을 가위로 오려내듯 정리 후 몸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도려내면 남게 되는, '그-런-대-로' 정리된 것들에 언어의 옷을 입히면 기능을 갖는다. 뜬구름을 말로 낚아채 글로 뉘이는 과정도 모두 생각을 몸으로 옮겨 실천한 결과다. 자유 안에서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게 힘들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그림자가 물고 있는 밝음처럼 수업이라는 긴장의 터널 끝에서 만나게 될 즐거움 하나다.






그 작가 별로예요



  우리는 지금 기쁨을 마시고 있다. 텍스트에서 벗어나 눈과 볼 그리고 입꼬리의 표정을 읽으며, 수업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네모 나라에서는 질서가 중요했지만, 이 시간은 신호등이 없어도 대화가 충돌하거나 넘어지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의 문학성을 칭찬했다. 작품이 편하면서도 깊이 있다며, 무엇보다 글에 ‘겸손’이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도 익숙한 작가다. 읽고 쓰는 일에 진심이라 애써 칭찬하지 않아도 노력하는 작가임에 분명하다.


  이런저런 자랑으로 미소가 이어질 즈음 누군가 휴, 한숨을 몰아쉬며 비밀을 발설하듯 입을 조그맣게 열었다. 그녀의 강연을 본 적이 있는데, 첫인상이 엉망이었다나. 툭툭 내뱉은 말에서 막돼먹은 느낌을 받아 꽤 실망스러웠다고. ‘히스테리'라는 표현까지 덧대어, 사람이 별로인데 글이 겸손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며, 작가의 글을 어디까지 진실로 봐야 하는지 오히려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수의 칭찬이 누군가의 첫인상 하나로 우르르 무너졌다. 이런 일은 흔해 지금 이 순간도 이름만 바뀌어 불만을 자아내고 있을 것이다. 작가 이전에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는 단순하고 사소하며 때론 불손하기까지 하므로.






  글쓰기 강의 중이나 이야기를 나눌 때 자주 소개하는 작가가 있다. 바로 김훈, 조정래 그리고 김영하다. 외국 작가도 많지만 독서와 글쓰기를 막 시작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친숙한 국내 작가를 소개하는 편이다. 김훈의 묘사력은 탁월하다. 조정래가 다리 위에서 쪼그려 앉아 강을 내려다본다면, 김훈은 강물에 두 발을 담근 채 허리를 굽혀 물결을 살피는 작가다. 시각적인 묘사도 뛰어나지만 그 뒤를 따르는 심리적 묘사가 꽃 중의 꽃이다. 그렇다면 다리 위에서 구경하는 조정래는 김훈보다 정성이 부족한 걸까. 작가로서 무책임한 걸까. 그렇지 않다. 관찰하는 대상과의 멀고 가까움만으로 작가를 평가할 수 없다. 자세히 본다고 특별하고 멀리서 본다고 건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이라는 우주 안에서 보면 글은 점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고만고만 한 점 하나로 작가들을 비교하면 섭섭하다.  


  작가에겐 자신만의 ‘거리감’이라는 게 있다. 보려는 지점과 볼 수 있는 시야, 나는 이것을 작가의 '문학적 스펙트럼'이라고 생각한다. 스펙트럼이란, 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컬러가 어떻게 분해되는지 살피는 과정을 말한다. 이것을 문학에 적용하면, 작가의 문학적 취향이 글에 투과될 때 어떻게 발현되는지 헤아리는 과정과도 같다. '어떻게'라고 말했지만 정작 넓이와 깊이 그리고 무게를 저울질할 어떠한 근거나 잣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현상과 즐겁게 조우할 뿐 계산이나 측량은 불필요하다는 뜻이다. 비평가나 평론가들도 이런 점을 주의해서 거론한다.


  조정래의 스펙트럼은 풍경 같다. 그에게는 세밀한 붓칠보다 결을 품고 있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태백산맥>의 묘사는 한 폭의 수묵화를 감상하듯 ‘심리적 번짐'이 독자를 매료시킨다. 마찬가지로 <정글만리>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그림 한 장에 담아내듯 굵직한 언어로 메시지를 전한다. 세밀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전체는 모든 부분의 합이 된다. '공감'의 맛은 문장 껍데기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안에서 은밀하게 착즙 된다. 그럼 김영하는 어떨까. 소설에서 보인 경쾌함이 산문으로 들어가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하듯 차분해진다. 김영하 식의 철학은 고뇌하는 소설을 만들고, 그의 사랑방정식은 입체적인 깨달음을 제조한다. 소설의 분위기가 그의 전부가 아니듯 에세이의 잔잔함만으로 그를 정의할 수 없다. 작가에게 중요한 건 인기 있는 서사보다 불안을 품고 끊임없이 안으로 질주하려는 고민 하나다. 각각의 스펙트럼은 넓이와 깊이 그리고 무게보다 그저 '보-여-준-다'는 행위 하나가 소중하다.


  글은 작가의 뒷모습과도 같다. 잘 차려입고 외출한 어느 볕 좋은 날의 모습. 거기엔 작가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욕심낼 수 있는 최대치의 이상과 바람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글을 잣대 삼아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발끝이 닿지 않는 깊은 물에 아이를 밀어 넣고, 왜 멋들어지게 수영을 못하냐고 다그치는 것과 같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라고 그 속에 함부로 눌러앉지 않는다. 단지 문장 속에서 자신의 옅은 그림자를 끌고 사라질 뿐 최대한 작품과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애쓴다. 이런 노력이 왜 필요할까. 글은 한 사람의 희망과 노력의 결과물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달력의 별표 같은 것이다.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옷장에서 아끼는 외투를 꺼내어 먼지를 털고 반듯하게 다린 후 단정하게 입는 행위 그 자체다. 그래서 후한 점수를 받은 작품 뒤에서 작가를 만난다면 화장기 없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동전 하나를 두고 앞뒤로 편을 나눠 어느 것이 진짜 동전의 정체성인지 고민하는 것은 놀이로서 충분하지만 사람과 작가는 동일하면서도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글'을 중심에 두고 인간성을 판가름하는 일은 어렵고 의미 없는 일이다. 


  ‘befor-after'에서 after를 보고 befor를 흉보면 안 된다. 그 둘의 관계는 순위가 아니노력의 과정 그 자체다. 대체로 독자는 “사람은 좋은데 글이 왜 그 모양이지?" 보다  "글은 멀쩡한데 사람이 왜 이래?"라는 반응을 선호한다. 대부분 사람보다 글에 더 관대한 편이다. 사람이 글보다 미완성 존재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작가의 거리감은 독자에게도 존재한다. 내가 김훈과 조정래를 구분하듯 누군가는 또 다른 거리감으로 작가에게 다가간다. 그만큼 거리감은 주관적이고 일방적이다. 문학적 취향이 운 좋게 맞아떨어지는 날이면 작가와 독자의 유대감도 느-닷-없-이 만들어진다. 소위 '막돼먹은' 그녀에게도 작가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주관적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 반대로 그녀가 당신을 오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Photo by Joanna Kosinska / Unsplash


문학,
가깝고도 먼


  불안정을 뜻하는 'precario'라는 말은 기도를 뜻하는 'prex'에서 출발한다. 구걸을 통해 얻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prex'는 'quaestio'와 달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폭력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불안정' 안에는 약함과 강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사고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강약이 공존하는 무대는 얼마든지 많다. 그중 하나가 문학의 공간이다. 문학은 인간의 잠재된 사고를 그 모양과 분위기를 차별하지 않고 언어로 형상화한 결과물이다. 인간의 수만큼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문학은 불안정을 지닌 채 탄생할 수 있다. 그 무덤이 불안정 형태를 취해도 참된 죽음으로 간주되는 이유다. 이것이 문학의 공간이며 그곳의 주소다.


  사람들은 기뻐 날뛸 때보다 부러지거나 구겨졌을 때 문학의 공간에 머물길 원한다. 무리에서 덩그러니 떨어져 홀로 사색하길 바란다. 그러나 다가갈수록 까마득히 멀어지는 게 문학이다.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넘긴다고 쉽게 열리는 곳이 아니다. 마치 씨앗 한 알이 무덤덤하게 기다린 세월 위에, 나무 한 그루로 버틴 몇 백번의 계절을 얹어, 노래를 닮은 울음 또는 울음을 닮은 노래 그리고 찢어질 듯 가벼운 날갯짓을 이어 붙인 시간을 모두 곱해야 계산이 가능한, 어쩌면 그것조차 불가능한 먼 곳이 문학이다. 나무가 종이가 되어 책으로 완성되기까지의 시간을 넘어도 가닿기 힘들다. 텍스트를 읽었다고 문학에 도착한  아니다. 그러므로 작품을 읽었다고 그 작가를 탐사했다고 생각하면 큰코다친다.


  많은 작가들이 노력을 노력한다. 노력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 노력 자체로는 힘이 없다. 목표를 향한 노력이 잘 걸어갈 수 있도록 뒤에서 밀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앞서가는 노력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뒤따르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 눈엔 그녀만큼 노력하는 사람도 드물다. 특히 유명한 작가이면서도 글쓰기에 고민하는 모습이 무척 인간적이다. 삶을 반추하며 다소 거친 면은 부드럽게, 모난 부분은 납작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그녀는 자기 고발적이다. 스스로 손가락질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반성한다. 체면을 차려도 될 법한데 애써 자신을 책망한다. 어쩌면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의 결핍을 잘 알기 때문에 글로 마음을 다지는 중일지 모른다.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한 인간의 그림자는 자로 잰듯 반듯하거나 누구의 마음에 들기 위해 획일적일 수 없다.



작가는 '잘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텍스트와 만나는 물리적 거리는 30cm 안팎, 그러나 심리적 거리는 까마득하다.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해 필요한 사람, 바로 작가들이다. 그들은 문학의 공간에 입장한 손님을 위해 길을 내고 이정표를 만든다. 깊이 스며들 수 있도록 서사의 외투를 짜고 보푸라기를 다듬는다. 이 모든 것이 언어 울타리에서 가능하지만 제작자에 따라 경로와 의미가 달라진다. 왜 그럴까. 모두 언어라는 재료로 작업하는데 말이다. 작가는 각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다. 김훈과 조정래가 그랬듯이 공 들이는 방향과 지점이 다르다. 그러나 한결같이 입을 모으는 것이 있다. 문학이라는 절대성에 꽂을 깃발의 속성이다. 오직 불안정을 치유하고픈 의지 하나 말이다.  'precario'라는 단어 안에 기도라는 의미가 숨어있듯이 모든 작가의 가슴에는 한 사람의 '나약함'이 웅크리고 있다. 그것이 어떤 눈부심 하나를 만나면 서사의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자가 그 나약함을 읽어내지 못하면 교만한 작가, 막 나가는 작가가 등장할 뿐이다. 혹시 알아요? 당신도 읽다가 쓰게 될지...



*타이틀 이미지 : Photo by Moodywalk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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