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로 일상이 제한된 지 일 년이 넘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큰 그림이 있었다면 그 그림을 다시 스케치하는 시간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가장 먼저 손이 간 부분은 사회를 질서 있게 움직이는 몇 개의 제도다. 가령, 다수의 인원이 포함된 모임을 규제한다거나, '사회적 거리'라는 슬로건에 맞게 개인 간의 철저한 위생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망각의 동물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쉽게 익숙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마스크가 당연한 소지품이 되는가 하면, 손 소독제나 물티슈가 필수품이 되어 몸값을 올린 지 오래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익숙함에 더 익숙해지기 위해 누구나 노력하는 요즘이다.
교육면에선 어떨까. 수요와 공급 두 측면에서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대면 수업에 특화된 교사들은 비대면 수업 준비로 예전보다 많은 시간 공을 들이고, 수업을 받는 학생 입장에서도 익숙지 않은 수업 방식에 적응하느라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래도 안심이 되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대면 수업보다 비대면 수업의 몰입도가 더 높았다는 것이다. 물론 하루속히 코로나에서 벗어나야겠지만,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이제 비대면 수업의 편리성에서 벗어나긴 어려울 듯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거론되는 것이 바로 온라인 에티켓이다. 필자도 겨울방학 동안 몇 개의 온라인 수업을 진행했다. 아이디와 암호를 통해 접속한 아이들과 토론과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그 능력을 평가하는 수업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모니터 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치 아이들 옆에서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아이의 발표와 글쓰기에 간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치를 어느 순간 능가하거나 그것과 어긋나 있을 때이다. 그것은 단어 하나로도 드러나며 발표하는 태도와 어조로도 읽을 수 있다.
내 아이가 가장 뛰어나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가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록 그대로 지켜봐 주는 것도 부모 아니 어른으로서 보여야 할 당연한 태도다. 수업 내내 눈치를 보는 아이가 있었다, 누가 봐도 자유롭지 않아 보였다. 즐거워야 할 독서교실이 그 아이에겐 숙제가 된 것 같아 대신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부모들도 줌을 통해 자신의 아이보다 뛰어난 아이들을 제대로 구경했을 테니 자신의 아이가 분명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1년에 한두 번을 제외하고는 교실 안의 수업을 학부모들이 참관하는 걸 제한하는 것이다.
이제 우린 다른 시대로 건너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체가 아닌 부분만을 보이며 서로 교류하고 공유할 수 있는 시대다. 보이지 않는다고 지켜야 할 사항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기억해야 할 에티켓이 많다. 아이가 온라인 수업을 하면 조용히 방문을 닫고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의 실수를 일반화하지 않기 위함이다. 이렇게 부모의 에티켓이 쌓이면 아이는 자유 속에서 창의성이 짙은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