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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정 maya Dec 27. 2024

같은 메시지, 다른 주파수

**브런치 북은 한 권당 30개의 챕터만 발행이 가능한 관계로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30화까지를 1권으로 발행하고 31화부터 '타로카드 읽는 가게2'로 발행됩니다. 놓친 이야기가 없도록 마야의 브런치 구독을 꼭 눌러주세요!** 타로카드 읽는 가게 1권 바로가기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도 옆에서 나를 두고 하는 실랑이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예 안들리기라도 하면 모르련만, 모녀가 나를 두고 저 여자, 저 여자라고 계속 쑥덕거리는데 온통 신경이 쏠렸다.


"해 봐. 해 보고 말해. 저 여자가 알아서 말해 주겠지."


"못하러 해. 저 여자가 뭐라고 하든 그렇게 할 것도 아니면서."


"아니 그러니까. 해 보자니까. 맨날 제 3자가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며.."


"그렇다고 그걸 생판 모르는 여자한테 미주알 고주알 얘기하란 말여?"


"모르는 사람이니까 하지, 그럼 누구한테 말할 건데? 형자 이모? 용희 이모?"


"미쳤냐, 그것들한테.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


"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 여자한테 얘기하고 객관적으로 들어보잔 거지. 그냥 가볍게. 가볍게 조언 듣는다 쳐."


엄마로 보이는 중년 여성은 딸에게서 반대로 고개를 휙 돌리며 어이구 미쳤지, 미쳤어라고 투덜거렸다. 젊은 여자는 그런 엄마를 내버려 두고 내 테이블로 걸어왔다.


"선생님, 이거 타로점 지금 볼 수 있는 거죠?"


'저 여자'는 금새 선생님으로 둔갑해 있었고 그녀의 목소리는 싹싹하고 밝았다. 네, 그럼요, 하면서 나도 싹싹하게 자리를 권했는데 여자는 잠시만요, 하더니 중년 여성을 향해 엄마! 빨리와! 하고 소리쳤다.


"엄마랑 같이 듣고 싶은데 괜찮아요?"


"네, 같이 계셔도 괜찮아요. 그런데 두 분 중에 누가 보시나요?"


여자는 대답 대신 이제 거의 등을 돌리고 있는 여자를 향해 '엄마!' 하고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엄마는 깜짝 놀라며 힐끔 주위를 돌아 보더니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딸을 향해 걸어왔다. 


"조용히 좀 해. 미쳤어 진짜. 뭐 좋은 일이라고."


딸은 엄마의 거친 말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늘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한다던가,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그게 진심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는 엄마의 이야기에 귀를 닫은 채 옆 테이블에 양해를 구하고 여분의 의자를 하나 빌려 와 엄마와 나란히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저희 엄마가 볼 건데요."


여자는 다른 사람들은 듣지 않았으면 좋겠는지 테이블 앞으로 상체를 숙이며 소리를 줄였다. 속닥이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도 그녀 앞으로 몸을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관심없다는 듯 의자 등받이쪽으로 돌아 앉아있던 엄마도 슬쩍 몸을 우리쪽으로 기울였다. 딸은 엄마의 어깨를 탁 치며 그냥 봐 그냥, 하고는 엄마의 몸을 앞으로 돌려주었다. 엄마는 못이기는 척 돌아 앉았지만 시선은 저 멀리 천장쪽을 향해 있었다.


"어떤 게 궁금하세요?"


나는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저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이런 거 처음 해보는데 어떻게 물어보면 될까요?"


엄마가 슬쩍 내 손에 있는 카드를 쳐다보곤 다시 저 멀리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질문이든 괜찮지만 질문이 구체적인 것이 좋고요, 너무 먼 미래의 일보다는 3개월에서 최대 6개월 안에 있을 일에 대한 질문이 좋아요. 아니면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으니까요."


"어, 그러면......"


여자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다가 딴청을 부리고 있는 엄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엄마가 직접 물어볼래?"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싫다고 진저리를 쳤다. 나는 다소 우스쾅스러운 모녀의 티키타카를 지켜보며 참 사이가 좋은 모녀간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싫다고 내숭을 떨어도 그게 싫은 게 아니란 걸 안다는 건 평소 엄마의 성향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고 딸의 제안을 거칠게 거절해도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알거라는 믿음 역시 둘만의 시그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둘이 티격태격 싫네, 좋네 하는 걸 멍하는 바라봤다.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이런 거는 많이 비싸요?" 


엄마가 갑자기 확인할 것이 떠오른 듯 나를 휙 돌아보며 물었다. 


"아유 엄마, 하나도 안 비싸. 내가 낼 거니까 그런 걱정은 말고 궁금한 거나 물어 봐."


"네 돈은 돈 아니냐? 얘가 돈 아까운 줄을 몰라. 이거 막 굿하라 그러고 부적쓰라 그러고 그런 건 아니지요?"


엄마는 딸을 가볍게 꾸짖더니 다시 내게 물었다. 딸은 나를 보며 이해하라는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엄마의 팔을 꽉 잡았다 놓았다. 


"저는 그런 거 못해요. 굿하고 부적쓰고 막 얼굴만 봐도 조상님 보이고 그런 거 아니에요. 어머님이 질문하신 거 듣고 여기 있는 카드를 직접 뽑으시면 그걸 보고 풀이를 해드리는 거에요. 지금 어떤 문제가 있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조언을 해드리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나는 최대한 그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했다. 엄마는 진지한 얼굴로 내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 끄덕 했다.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긴 했다.


"저희 엄마가 지금 아빠랑 30년 넘게 살고 있는데요, 얼마나 됐지 엄마? 31년?"


딸이 얼른 말을 가로챘다. 이번에야말로 엄마가 무언가에 직면하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야는 무슨 31년! 33년이다. 아이구 징그럽구로. 아이구 징그라."


엄마는 딸의 말을 바로 잡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여튼, 30년 넘게 살면서 엄마가 맨날 아빠랑 헤어지고 싶다고, 이혼할거라고 노래를 했어요. 어릴 땐 진짜 엄마랑 아빠랑 헤어지면 어쩌나 걱정한 적도 많았는데 사실 지금은 그냥 추임새같단 생각도 해요. 오늘 날씨 좋다, 배고프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엄마가 딸을 째려보며 등짝을 찰싹 때렸다. 딸은 별로 게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다 커서 보니까 엄마가 왜 그랬는지는 알 것 같거든요. 우리 아빠 남자로 별로에요. 다정다감하고 호탕하긴 한데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에서 더 좋은 사람, 무슨 말인지 아시죠? 남들한테 다 퍼주고 누가 등쳐 먹어도 사람 좋게 웃고 말고, 돈 떼어먹어도 사정이 있겠지, 뭐 그런 소리나 하고......"


다다다다 빠르게 내뱉은 딸은 숨이 차는지 후, 하고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닌지 다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곤 다시 와다다다.


"그렇다고 돈을 잘 버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한량 체질이거든요. 집안은 엄마가 다 먹여 살렸어요. 생활비며 나랑 동생 학비며 뭐며 아빠 돈 사고 치는 거 틈틈이 다 해결하고. 아빠도 나이 좀 들고 이제 철 좀 들려나 정신 좀 차리려나 하고 있는데......"


딸은 여기까지 말 하고선 엄마를 힐끔 돌아봤다. 엄마도 딸을 슬쩍 쳐다봤다. 그렇게 둘의 눈길이 공중에서 마주치고 말이 잠시 끊어졌다. 이렇게 솔직하게 다 얘기해도 될까, 괜찮을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그들의 결정을 가만히 기다렸다. 딸은 다시 엄마가 얘기할래? 하는 눈빛을 보내고 엄마는 나는 못하니까 네가 해, 하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몇번인가 침묵의 미루기가 왔다 갔다 하더니 딸이 더욱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대요. 엄마한테 이혼하자고......"


엄마는 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하고 아유, 증말 창피스러워서! 하며 다시 몸을 휙 돌아 앉았다. 딸은 내 눈치를 보며 있고, 엄마는 뭐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망할 놈의 영감쟁이, 아유 세상 부끄러워서! 이 망할 놈의 영감쟁이, 다 늙어서 미쳐가지고, 라는 말을 거의 주문을 외듯 하고 있었다. 

나는 이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엿들으며 분명 비극적인데 웃음이 자꾸만 나오려고 해서 난감했다. 헌신한 엄마, 철없던 아빠, 불안한 유년 시절, 그리고 이기적인 이유로 엄마의 헌신을 철저히 배신해 버린 아빠.

키워드로 정리해보면 사연과 사건 자체는 분명 좌절할만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충분히 울분을 토하며 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 눈앞의 모녀의 대화는 꼭 꽁트 코미디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궁금하신 건......?"


내가 조심스럽게 모녀의 세계로 끼어들었다. 딸은 무엇 때문에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잠시 깜빡했다가 생각이 난 듯 아, 네네네, 하며 수선스럽게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엄마가 아빠랑 그만 이혼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빠가 가장 역할을 한 적도 없지만 이제 저나 동생이나 다 커서 아빠가 더이상 가장으로서 필요하진 않거든요. 이제 아빠도 자기 인생 찾아 간다는데 굳이 엄마가 거기서 방해꾼 역할을 할 필욘 없잖아요. 근데 엄마는 저랑 동생 결혼도 해야하니까 이혼은 안 하겠대요. 정말 이해가 안 가요. 아니, 정말. 진짜 이해가 하나도 안된다니까요. 아빠보다도 엄마가요. 두 집 살림 하는 걸 그냥 두겠다니. 첩 살림 하는 아빠가 있는 게 더 부끄럽지 이혼한 부모가 뭐가 부끄러워요. 저랑 동생은 엄마가 저희 때문에 30년 넘게 자기 인생 갈아서 희생하는 거 더는 못 보겠어요."


"아이구, 그놈의 영감쟁이! 자식보기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엄마가 추임새를 넣었다.


"아무래도 엄마가 이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 생각은 그런데......?"


내 쪽으로 잔뜩 몸을 기울이며 열변을 토한 딸이 나를 슬쩍 올려다 보며 물었다. 옆에 있던 엄마도 딸을 따라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들 쪽으로 몸을 숙이며 다가갔다. 그 모습이 꼭 묘안을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맞댄 삼총사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짧은 정적을 깨고 말을 꺼냈다.


"따님은 어머님이 이혼을 했으면 한다는 거고, 어머님은 그냥 참고 이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싶다는 뜻이신 거죠?"


모녀가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그랗고 조금 주름진 한 명과, 그녀와 눈매가 붕어빵처럼 닮았지만 얄쌍하니 위 아래로 조금 더 길게 늘려 놓은 것 같은 한 명. 둘은 비슷하면서도 얼마나 다른지. 


"어떤 분의 질문으로 카드를 볼까요? 어머님? 아니면 따님?"


"둘이 많이 다를까요?"


딸이 물었다. 


"이혼에 대한 질문이긴 하지만 방향이 반대니까, 다르지 않을까요? 따님의 시선으로 보는 엄마의 이혼과, 엄마 본인의 시선으로 보는 이혼은 같은 이혼이라도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죠."


"......"


"......"


모녀는 다시 말없이 마주 보며 눈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엄마가 할래? 내가 할까? 엄마가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네가 하쟀으니까 네가 해라. 그들의 눈빛 대화를 따라 내 눈길도 동그란 그녀를 봤다, 길쭉한 그녀를 봤다, 네트를 오가는 탁구공을 따라가듯 양쪽을 오갔다.

한참을 그렇게 눈빛과 턱끝으로 서로에게 미루던 둘은 뭔가 결심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딸이 입을 뗐다.


"엄마의 관점에서 보고싶어요. 엄마가 이혼을 하지 않는 게 더 편안하고 행복할지 궁금해요."


나는 다시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33년을 함께한 부부 사이에도 의리는 헐값으로 처분될 수 있다. 그것만으로 최악이다. 그런데 그 의리를 나 혼자 지켜오고 있었다면?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상대에겐 그 최선조차 지긋지긋하고 꼴보기 싫었다면? 그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내 정신을 파괴할 수 있지 않을까? 눈만 마주치면 질리도록 투덜거리고 험한 말을 쏘아대는 것이 그 잔인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아무렇지 않게 여기려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려는 노력이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까?

마음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방식의 감정 표현이 특이한 건 아니다. 좋지만 싫다고 하는 것. 원하지만 필요 없다고 하는 것. 아껴주고 싶으면서 오히려 놀리고 짓궂게 구는 것. 

자아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는 어린 아이들의 사이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 그 마음을 그대로 돌려 받을 수 있을지 몰라 두려운 아이들은 좋아하는 아이에게 더 차갑게 굴고, 못되게 굴고, 굳이 그 앞에서 난 널 싫어한다고 해버린다. 지극정성 온 마음을 다해 바치는 마음을 외면 받는 것 보다 싫어할만한 행동을 하고 미움을 받는 게 마음이 덜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너 안 좋아해. 나도 너 미워해. 그러니까 네가 나 싫어하는 거 아무렇지도 않아.

언제나 긍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것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공식은 단순해 보이지만 은근히 어렵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본능이므로.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전을 추구한다. 그게 육체적이든 심리적이든 일단은 손상이 적은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나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상처를 줘 버리는 비겁한 방어기제를 선택하지 않도록 늘 경계해 왔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그게 동물적이라는 반사신경이라걸 깨닫지 못하면 언제든 그런 못난 행동이 툭 하고 튀어 나오게 된다. 그래서 나 같은 애들은 이런 후진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게 되기가 쉽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태어 날 때부터 뾰족한 세상에서 살다보면 모든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굴지 않을 거라는 걸, 그리고 모두에게 사랑 받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배울 기회가 많지 않다.

나는 그녀의 툴툴대는 말투가, 자꾸만 상황을 외면하려는 태도가 사실은 사랑에서 기인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마음을 되돌려 받지 않아도 되지만 상대는 되돌려 줄 생각조차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아는 게 비참한 게 아니라 그걸 알면서도 베풀고 있다는 걸 상대가 알아차리는 것이 훨씬 비참하다. 적어도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상한 심술로 자신을 꽁꽁 싸맬 수 밖에.

딸은 자신을 위해 엄마의 인생을 희생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쩌면...... 어쩌면, 딸은 이해 할 수 없는 엄마의 사랑을 정당하게 보여질 수 있도록 꾸며주는 장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둘 사이의 모순을 당위성이 되어 줄, 찬란하고 귀한. 


"지금 상황도 그렇고, 그대로 지낸다고 하면 미래에도 그렇고......"


"안 좋죠? 그쵸?"


내가 카드를 읽기 시작 하자마자 딸이 내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너는 좀! 기다려 봐라,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누굴 닮아서 성질이 그렇게 급하냐?"


엄마는 딸의 팔을 잡으며 스읍! 하고 어린애에게 하듯 혼을 냈다.


"소문이 안 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막을 순 없을 거고요, 당연히 갈등도 피할 순 없겠죠. 아버님은 지금 이혼을 원하는데 들어주지 않으면."


"아이고 그놈의 영감쟁이......"


엄마는 계속해서 남편 욕을 주문처럼 중얼 거렸다.


"그래도,"


딸은 내 입만 쳐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엄마는 조금 고단한 사랑이라 믿고, 딸은 무가치한 희생이라 믿는 오래된 무언가를 단념시킬 수 있을만한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래도, 그게 어머님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면 저는 그렇게 할 것 같아요."


엄마의 눈이 딸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왜요!"


딸은 내 판결에 불복했다.


"앞으로의 먼 미래는 알 수 없지만 당장 가까운 미래로만 보자면 이혼 자체가 어머님의 마음을 달래주거나 정리해 주진 못할 것 같아요.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하는 이혼이 어머님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고요. 당장의 편안함과 행복에 대한 답을 원하시는 거라면 저는 아직은, 이라고 대답할게요."


딸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올라서 당장이라도 짜증에 북받쳐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안다. 이런 결론이 그다지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다는 걸. 딸이 나에게 원했던 건 지극히 논리적인 설득이라는 것도. 만약 딸의 입장에서 질문을 했더라면 나는 엄마를 시간을 들여 천천히, 부드럽게 설득해 보라고 조언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님."


나는 예상치 않았던 내 응원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좋아하고 있을 그녀에게 말했다.


"아버님이 밉고 야속하더라도 지금 당장 헤어지고 싶은 게 아니시면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주세요."


"하이고, 됐다! 그 놈의 영감이 그런다고 첩 냅두고 나 좋다고 할 위인인줄 아요?"


엄마는 카페가 다 울릴 정도의 큰 소리로 콧방귀를 흥, 뀌었다.


"아버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을 어쩔 순 없죠. 그래두요. 내가 좋아했다는 걸, 그래서 최선을 다했다는 걸 나한테까지 속일 필욘 없잖아요. 아버님이 예뻐서가 아니라 내가 충분히 사랑했다는 걸 내가 납득하면 그 다음은 더 편해질 거에요. 그러면 굿도 필요 없고 부적도 필요 없어요."


엄마는 다시 등을 돌렸고, 딸은 결국 눈물을 떨궜다. 








모녀를 보내고 휴대전화를 보니 경서의 메시지가 한 가득이었다.



가기 전에 깨우지도 않다니 너무 매정해요.


하지만 꿀물 메시지라니 달콤해.


오늘부터 당분간 바쁠 예정이라 자주 연락 못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보고싶으면 언제든 메시지 남겨줘요.


볼 수 있으면 짧게라도 달려 갈게.



전날 숙취로 온 몸이 두드려 맞은 듯 했지만 따뜻한 연인의 짧은 문장들에 눈이 번쩍 뜨이고 힘이 났다. 주파수가 잘 맞는 따뜻한 마음은 에너지로 변환되곤하니까. 물론 이런 문자들이 특별할 건 없었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사이좋은 연애를 하는 사람이라면 주고 받았을 평범한 내용이었다. 사귄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연인이라면 이 보다 더 다정하고 오글거리는 말들을 주고 받을지도 모른다. 진주의 전 여친들도 받았을 것이고, 나 역시 윤주와 수도 없이 주고 받은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같은 메시지라도 틀어진 주파수를 다시 조율하고 올바른 수신자를 새로 찾아내면, 다시 완벽히 새로운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은 너도 같을 거라는 생각, 나는 또 똑같은 결말을 맞을 거라는 불온한 예언이 저 깊은 곳에서 자꾸만 이곳으로 넘어오려고 틈을 엿보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자라왔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니 그런 정체없는 불안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는 모녀를 떠올리며 자연스럽지 않은, 내 본능에 반하는 회신을 적어내려갔다.



자주 연락 못해도 되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요.


언제든 보고싶으면 말해줘요.


내가 갈게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계속 해 보기로, 상처는 두려워 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다독였다.







Judgement (심판) : 판결, 심판, 불안, 기대, 희생, 기다림. 지난 날을 잊어야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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