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북은 한 권당 30개의 챕터만 발행이 가능한 관계로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30화까지를 1권으로 발행하고 31화부터 '타로카드 읽는 가게2'로 발행됩니다. 놓친 이야기가 없도록 마야의 브런치 구독을 꼭 눌러주세요!** 타로카드 읽는 가게 1권 바로가기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끝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불편한 내 마음과는 다르게 경서는 무척 신이 나 보였다. 내가 막장 드라마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자신은 그 드라마를 쓰는 작가라도 된 듯 했다.
"좋아요. 그날 아침 일찍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하고, 메이크업도 받고 가요. 내가 잘 하는 곳 소개해 줄게요."
"왜요?"
"최고로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이렇게 예쁘고 멋진 여자를 내가 찼다니! 하고 후회하도록."
"왜요?"
"너 없이도 난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산다, 아무렇지도 않다, 보여주려고. 나도 같이 갈까요?"
"왜요?"
"난 잘 생기고 멋진 남자친구도 사귀었다! 자랑하는 거죠. 너 같은 건 다 잊고."
나는 그의 들뜬 목소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농담을 어디까지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했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뗐다가도 아......어......음......하는 신음 소리만 나왔다.
"왜요?"
끙끙거리는 내가 답답했는지 이번엔 경서가 내게 물었다. 진심인가 이 남자......?
"너무 유치하지 않아요?"
나는 직설적으로 가기로 했다. 경서 같은 타입은 그 편이 더 소통하기 쉬우니까. 지금까지는 윤주 같은 사람과 소통하는 법에 익숙해 있었다면 이제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에 더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나에게 유치하게 나오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잖아요?"
경서가 천진하게 대답했다. 너무 당연한 걸 묻는 게 이상하다는 태도였다. 허! 하는 기막힌 웃음이 나옴과 동시에 말문은 막혔다. 좋아.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나까지 유치하게 나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경서는 내 말이 틀렸다는 듯 음, 음, 음, 음! 하고 같은 소리를 음이 다르게 끊어서 말했다. 이번엔 꼭 미드 속 주인공 같았다. 전화 통화가 아니라 직접 마주 보고 있었다면 집게 손가락을 양 옆으로 흔들어 보였을 것 같았다.
"아니, 이건 전투에요. 전투에 고결함이 있을 수 없죠. 유치하든 더럽든 이기는 것이 중요해요."
나는 두번째 헛웃음을 터뜨렸고, 다시 말 문이 막혔지만 경서는 아무 말 없이 내 대답을 기다렸다. 우리 사이의 정적이 길어지고 내 얼굴에선 미소가 천천히 지워졌다. 그 짧은 순간 만약 경서가 윤주를 만나러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가야하겠다고 우길까, 아니면 새로운 연인을 존중하는 의미로 만남을 거절할까. 내가 경서라면 어떨까?
"괜찮아요?"
경서가 물었다.
"경서씨는 괜찮아요?"
"뭐가요?"
"여자친구가 헤어진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거. 싫을 수도 있잖아요."
흐음, 하고 경서가 긴 숨을 내뱉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듯 하더니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헤어진' 남자친구 잖아요? 게다가 '곧 결혼하는'. 설마 세련씨 보고 같이 도망치자는, 진짜 뭐 그런 막장 드라마를 걱정해야 하는 건 아니죠?"
"흥미진진한 막장 드라마를 기대하는 줄 았았는데 아닌가 봐요?"
"내가 당하는 드라마는 싫어요."
늘 내가 당하는 드라마 속에서만 살아서일까? 경서처럼 생각하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이 상황이 전혀 흥미진진하지도, 누가 누구를 이기고 지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자리에 나가는 것은 '내가 아는' 윤주답지 않은 윤주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옛 정,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아닐지도 모르는 미련, 무언가 말 못할 사정이 있진 않을까 하는 은근한 걱정같은 끈적 끈적하고 묵은 감정 뿐이었다. 새로운 남자친구에겐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설명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렇기에 그의 기분이 나쁘진 않을까 조심스러웠는데 경서의 반응은 너무나 내 예상 밖이었다. 그가 내뿜는 가벼운 공기는 내 걱정을 희석시키고 산뜻하지 않은 상황도 웃음기 어리게 만들었다.
"선빵 필승, 몰라요?"
경서가 나즈막히, 하지만 진지하게 속삭였다.
"저 아기 가졌거든요."
윤주의 약혼자가 차분히 털어놓았던 그 순간, 내 머리속에 떠오른 것은 경서가 말한 '선빵 필승'이었다. 대비 없이 제대로 된 펀치를 쾅 얻어 맞은 것처럼 눈 앞이 번쩍했다.
"오해하지는 마세요. 아기 때문에 억지로 결혼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둘 다. 임신 한 건 결혼 얘기를 나누고 나서 알았어요."
그녀는 자기가 날린 선빵이 내게 제대로 먹혀들어갔다는 것을 금새 눈치챘다. 나는 한순간 훅 하고 들이 마셨던 숨을 다시 후 하고 내뱉었다. 숨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 자연스럽게 들이마시고 뱉는 박자감을 잃어버렸다. 숨을 이상하게 쉬는 기분이었다. 그 타이밍을 놓쳤더니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누가 봐도 당황한 사람처럼.
"그걸 알려주려고 굳이 이 자리를 만들었다는 거에요?"
호흡의 순서를 놓쳐버린 나를 대신해 윤하 선배가 물어봐 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황당함이 묻어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여자가 무어라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 선배의 전화 벨이 울리고 당장 차를 빼달라는 다급한 요청이 수화기 밖까지 터져나왔다.
"아우, 나 미치겠네."
선배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튀쳐나갔다.
"......오빠가 같이 가서 주차 자리 좀 봐 줘요."
여자가 윤주를 돌아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윤주는 나와 여자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며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어, 하고는 일어나 후다닥 윤하 선배를 쫒아 나갔다.
그리고 나는 봤다. 그녀의 어깨를 짚고 일어난 윤주가 동그스름한 그 어깨를 따뜻하게 꼭 쥐었다 놓는 모습을. 내 심장이라도 꾹 쥐었다 놓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코미디야.
나는 이 요상하고 난처한 상황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내가 이걸 왜 알아야 하지? 내가 이걸 다 알아야 하나? 말문은 막혔지만 입은 떡하고 벌어지고 말았다.
"오빠와 결혼 생활은 분명히 행복할 거에요. 만족스러울 거고."
여자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마음에 걸렸던 건 언니였어요. 나는 처음부터 오빠에게 언니 얘기를 들었으니까. 언니는 나를 몰라도 나는 알고 있었어요. 언니는 몰랐어도, 나는 오빠를 만나는 내내 언니를 신경쓰고 있었고요."
나는 여자가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 거슬렸다.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달리 부를만한 적당한 호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도 그걸 알기에 그렇게 부르는 거겠지만 그녀가 나를 그런 친근한 말로 부르는 게 너무 이상했다. 이상하기도 이상한데다가, 싫었다.
그치만, 그럼 뭐라고 하라 그래?
혼자 생각해 봤지만 마땅한 것이 떠오르진 않았다. 다시 만날 일도 없는 사이에 호칭 정리를 하는 것도 우스웠다. 이름을 부르라고 할까도 잠시 고민했지만 그 여자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좀 소름끼쳤다. 내 이름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그걸 부르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 이름을 평생 듣고 살아야 하니까. 그 여자가 부른 내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찻잔의 티백을 천천히 들어내 밖으로 꺼냈다. 푸르스름한 찻물이 우러나와 섞였다. 천천히 한 모금을 마시는 여자를 보며 정말 보이는 것만큼 태연할까 궁금해졌다. 마치 모두 다 지난 일인 듯, 이제는 괜찮아진 듯 말하지만 그게 정말일까?
"오래 사귀었으니 겹치는 지인도 많을테고, 지인들과 함께 만날 일이 있을 때도 있겠죠. 아니, 만나지는 않아도 가끔, 누군가의 실수로라도 서로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는 있을 거에요.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오빠가 나를 배려한다 해도 그런 우연이 아예 없을 순 없겠죠. 그런 상상을 하면서 무척 괴로웠어요. 내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둘 사이에 아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이 너무 싫었어요. 오빠는 이미 다 지난 일이라고 했지만 내가 알 수 없는 거고, 말리거나 못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마음쓰이는 게."
다다다 빠르게 내뱉은 여자는 후련하다는 듯 큰 숨을 몰아 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만들면 뭐가 달라지는대요? 애틋했던 마음이 원수처럼 바뀌나요?"
내가 물었다.
"적어도 나를 봤으니 오빠를 만날 일이 있을 때 내 생각이 나겠죠. 오빠 이야기를 들을 때나, 가끔 생각이 날 때도 내 얼굴, 우리 아기......뭐 그런 것들이 떠오르지 않겠어요? 애틋해질 틈 없이 오빠를 볼 때면 내가 자동으로 생각났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여자는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자꾸만 말문이 막혔다. 숨이 막히는 것 같기도 했다. 여자는 매우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라면 절대로 생각해 내지 못할, 그리고 절대로 누군가에게 내뱉지 못할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걱정할 수도, 생각할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다. 공감을 할 수 없을 뿐.
나는 그녀가 생각해낸 그 방식이라는 게 너무, 너무 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기적이었다. 그녀는 최소한의 노력과 최소한의 만남으로 나와 윤주의 사이를 최대한으로 망가뜨릴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망가질 것이 남지 않은 사이였다. 끝났으니까. 앞으로가 아니라 뒤로 남겨진 시간들과 추억 뿐인 사이였다. 여자는 우리가 얌전히 묻어두기로 한 그 시간조차 싫었던 것이다. 묻혀진 것들이 언젠가 드러나 다시 불붙지는 않을지,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진 않을지, 그런 걱정조차 남겨두기 싫었던 것이다.
나는 윤주가 어떤 마음으로 이 만남을 허락했을지 생각했다.
처음에는 원망했다. 이 머저리. 멍충이. 의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개자식. 이게 뭐야. 나를 왜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해. 왜 나를 둘 사이에서 이렇게 이용해.
그리곤 동정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을 선택한 마음을. 그에게 생긴 더 중요한 것,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것, 앞으로 더 오랫동안 그의 곁에 있을 것. 그런 것을 위해 우리가 고이 묻어 놓은 것들을 다시 파헤쳐야 했던, 파헤쳐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을 그를. 너도 참 불쌍해. 어떻게 보면. 나 때문에 겪고싶지 않은 이 수모를 너 역시 겪는 거잖아.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얘기하는 건 언니도 저를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서에요. 오빠는 아기가 생긴 걸 알고 무척 기뻐했어요. 애기가 태어날 날만 너무너무 기다리고 있고요. 가정적인 남자니까.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고. 둘이 얼마나 어떻게 사귀었든, 이젠 제 남편이고 우리 애기 아빠가 될 거에요. 그걸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여자는 무턱대고 나를 예비 상간녀 취급하는 말을 했다. 기분이 너무 나빴지만 결국 그녀가 원했던 게 이런 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분이 망쳐지는 것. 서로를 지긋지긋하게 느꼈으면 하는, 뭐 그런 거. 그것을 위해 악역을 자처하고 온갖 구질구질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밉고 짜증났다. 하지만 여기까지 듣고 보니 실체없는 불안과 싸우며 윤주의 마음을 차지하려 애썼을 그녀가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했다.
그래, 그의 비겁함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는 비겁하게 입을 꾹 다물어 버렸던 그의 모습을 알고 있다. 네가 조금 참으면, 네가 조금만 양보하면, 네가 조금만 모른척 하면,을 꾹 눌러 담아낸 그의 마음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게 여전히 내 몫이라니. 우리는 이미 헤어졌는데.
나에게 그런 애틋하고 안쓰러운 이별까지도 사치가 되게 만들어 버린 윤주를 미워하는 게 맞았다.
"걱정 마요. 미련 같은 거 없어요. 앞으로도 그렇고. 나 사귀는 사람 있어요."
윤주보다 훨씬 잘생기고, 능력있고, 멋있고, 젊고, 날 더 사랑해요!
나는 마음 속으로 이런 웃기는 대사를 소리쳤다. 경서라면, 그가 여기에 있었다면 그렇게 말하라고 코치해 줄 것 같았다. 너무 유치하고 오글거리고 토할 거 같은 말이지만 경서라면 그렇게 말하라고, 그래도 된다고 응원했을 것이다.
그게 뭐 어때서. 사실이잖아요.
나를 보며 능글맞게 웃는 그의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순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전화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경서였다. 이 타이밍 좋은 남자. 윤주보다 훨씬 잘생기고 능력있고 멋있고 젊고 날 더 사랑하는데다가 기가 막히는 타이밍까지 가진 남자.
다시 숨이 쉬어졌다. 나는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얘기 아직도 안 끝났어요? 할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아. 진짜 도망가려는 건 아니죠?"
경서가 투덜댔다. 지금 막 날 구해준 것도 모르고.
"끝났어요."
"그럼 빨리 와요. 나 바로 앞에 있는데. 더 오래 있으면 주차 단속 사진 찍힐 거에요. 10분 내로 나올 수 있어요? 아니면 나 한 바퀴 더 돌고."
"지금 나가요."
나는 전화를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벗어 놓은 외투를 후다닥 챙겨 입고 빠르게 가방을 둘러멨다. 테이블 위에 잠시 내려 놓은 전화기를 거의 던지듯 가방에 넣으며 그 옆에 놓여있는 청첩장을 내려다 봤다. 가져갈까, 말까. 가져가는 게 맞을까, 아닐까.
윤주의 약혼자는 말 없이 짐을 챙기는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 사이에 더 할 이야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 대한 경고도, 조롱도, 심지어는 임신 소식까지 아주 효율적으로 한번에 끝마쳤으므로 더이상 날 잡아 놓을 이유도 없었다.
"저 갈게요."
나는 활짝 펼쳐진 청첩장을 그녀 앞으로 다시 밀어 주었다.
"먼저 간다고 얘기 잘 전해 주세요."
"네."
여자가 자신의 청첩장을 받아 다시 고이 봉투에 넣었다. 처음부터 내게 줄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결혼 잘 해요. 윤주는 분명히 멋있을 거에요. 10년 전이 더 멋있었지만."
선빵은 못쳤지만, 잽 정도는 날리고 싶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경서는 꽃다발을 손에 들고 있었다. 지금껏 내가 본 적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카락, 당장 상견례에 나가도 손색없을 만큼 밝고 단정한 옷차림, 반짝이는 신발과 그와 비견될 정도로 반짝이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나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너 어디가?"
그를 발견한 순간, 지긋지긋한 주차 문제를 해결한 윤하 선배와 윤주가 돌아와 문 앞에 서 있던 나를 잡았다.
"얘기 다 했어? 괜찮아?"
선배는 누가 날 때리기라도 한 듯 내 여기 저기를 살피며 연신 괜찮냐고 물어댔다. 나는 건성 건성 응, 응, 괜찮아요. 나 갈게요, 하고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그 와중에도 내 눈은 경서를 향해 있었다. 꼭 드라마 같았다. 본 적은 없지만 본 적 있는 것 같은 그런 드라마. 처음부터 열심히 보지 않아도, 누구라도 이제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는 그런 스토리.
나를 향해 미소짓는 그를 보자 나도 자동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가 거기 그렇게 서 있는 것이 참 유쾌하게 느껴졌다. 윤주는 내 눈치를 조금 살피는가 싶더니 곧 내 눈길이 향하는 곳을 쳐다 봤다. 그의 표정이 칙칙해졌다. 경서를 발견한 것 같았다.
"연락 할게요. 나 먼저 가요."
나는 그들을 뒤에 내버려둔 채 거의 뛰어가며 소리쳤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돌아보지 말자. 신경쓰지 말자. 그도 나를 신경쓰지 않았으니 나도 이제 신경쓰지 말자. 무슨 기분을 느끼든, 어떤 이분이 들든 내 알바 아니야. 이젠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너, 나의 감정이고, 우리의 추억이 아니라 너, 나의 기억이야. 그러니 남아 있는 찌꺼기는 우리 각자 알아서 관리하자. 나는 저 멀리 서 있는 바비의 남자친구 같은 저 남자에게 바비 인형처럼 뛰어 갈 거야.
나는 어린 아이처럼 뛰어가며 점점 마음이 가벼워졌지만 왠일인지 눈 앞은 점점 뿌예졌다. 눈동자 아래로 뜨거운 물이 부풀어 오르듯 불쑥 가득찼다.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얼굴이 마구 구겨졌다. 으앙, 하고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멋쟁이 켄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경서가 내 얼굴을 보더니 코트를 양 쪽으로 벌려 활짝 열어주었다. 나는 금방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그대로 달려가 드라마의 엔딩 장면처럼 그의 품 속에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내 머리 뒤로 빛이 닫히고 나는 깜깜하고 따뜻한 방안에서 혼자 울 수 있게 되었다.
The Emperor (왕. 황제) : 이루고자 하는 일들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강하게 행동한 만큼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보수적이고 완벽한 연애의 추구, 공격적인 투자. 강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