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북은 한 권당 30개의 챕터만 발행이 가능한 관계로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30화까지를 1권으로 발행하고 31화부터 '타로카드 읽는 가게2'로 발행됩니다. 놓친 이야기가 없도록 마야의 브런치 구독을 꼭 눌러주세요!** 타로카드 읽는 가게 1권 바로가기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유대표에게서 받은 제안서를 꺼내어 봤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두번 세번 읽었다. 함께 일하고 싶다는 제안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무언가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그 기분을 홀로 완전히 만끽하고 싶었다.
내용은 마음에 들었다. 엄청나지는 않아도 이제 겨우 하나의 결과물을 낸 신인 작가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기엔 충분했다. 더군다나 카페의 폐업이 결정된 지금, 당장 고정적인 수입이 필요해진 나로서는 이 타이밍에 감사할 정도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연한 기회였지만 이렇게라도 글 쓰는 일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기도 했다.
그리고 수 많은 위기 속에서 내게 우연한 기회들을 끊임 없이 던져 준 윤하선배에게 감사했다. 생각난 김에 문자라도 한 통 보내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선배였다.
"문자 보내려고 했는데."
앞뒤 설명도 없이 반가운 마음이 먼저 튀어 나왔다.
"왜? 무슨 일 있어?"
새침한 선배의 목소리가 새삼 반가웠다. 오랜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고 내 곁에 있어준 건 가족도, 애인도 아닌 적당하고 느슨한 관계의 윤하 선배 뿐이었던 것 같았다. 갑자기 묘한 감사와 왠지 모를 미안함, 송구함이 밀려왔다.
"아니면 벌써 들었나?"
윤하 선배의 말에 마음 끝 부분 어딘가가 차갑게 얼어붙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좋지 않은 예감, 혹은 기분 나쁜 예감이 저 멀리에서부터 자자작 소리를 내며 내 마음을 얼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듣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혹시 들었니? 라고 시작하는 소식은 늘 듣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것 뿐이었다.
"윤주 결혼한대."
빠른 속도로 출렁이던 마음의 물결을 얼어붙게 만들던 예감이 그 빙판 위에 돌맹이 하나를 챙그랑하고 떨어뜨렸다. 작은 돌맹이에 빙판이 와장창 다 깨져버리진 않았지만 실금이 갔다. 그 작은 실금 곁으로 또 다른 실금이 퍼지고 그 옆으로 또 다른 실금이, 계속해서 금이 갔다.
그럴 수 있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수 있지. 중간 중간 얼굴을 보긴 했어도 헤어진지 벌써 일년이 다 되어 가고, 나 역시 다른 사람이 생겼고, 그러니 윤주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잖아. 우리가 그렇게 쉽게, 나를 그렇게 쉽게......
나는 고개를 새차게 저었다. 더 이상 생각하면 내가 너무 찌질해질 것만 같았다. 나는 분명히 윤주에게 차였다. 한번씩 미련을 보였지만 윤주는 선을 넘은 적은 없었고 나에게 보여줬던 친절은 오래된 연인에 대한 안쓰러움, 혹은 친구로서의 애정이라고 해도 비난할 수 없는 정도였다. 아니 그 모든 걸 떠나서 나는 지금 경서를 마음에 두고 있다. 그러니 이런 이상한 배신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만나는 동안 최선을 다했고 한번도 실망시키거나 충실하지 않았던 적이 없던 연인이었으니 윤주에게 '네가 어떻게'라는 말은, 그런 생각은 품어선 안된다.
"몰랐어요."
대답을 하는 내 목소리가 너무 떨려서 민망했다. 조금 더 당당하고 싶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싶었다. 그런 것에 상처 받은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동아리 애들한테 청첩장 모임을 할건데, 너도 나왔으면 한대. 직접 연락하기가 좀 그렇다고 나한테 물어봐 달라더라. 웃기는 새끼."
선배가 콧방귀를 뀌었다. 윤하선배는 나만큼이나 윤주와 가까운 사이였다. 둘은 비슷한 이름에 부내나는 여유로움도 비슷해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들을 남매 사이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주가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윤하선배를 통해서 했다는 건 조금 충격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헤어졌다고 해도, 그 소식이 너의 결혼이었다고 해도, 그래도 직접 해줄 순 없었나? 그런 이야기이므로 직접 이야기할 순 없었나?
"올거야?"
나는 망설였다. 윤주는 정말 내가 그 모임에 나오길 바라는 걸까? 우리가 그 오랜 세월 함께 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그 모든 사람을 모아 놓고 나에게 청첩장을 주고 싶어하는 걸까? 선배는 왜 굳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걸까? 아니, 윤주는 왜 선배에게 그런 부탁을 했어야 했을까?
윤주답지 않은 선택이다. 마음 속이 들뜨고 어지러웠다. 꼭 마구잡이로 흔들어 놓은 스노우볼이 된 것 같았다.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마구잡이로 일어나 내 주변을 감싸며 빙빙 돌았다.
"모르겠어요."
"거절하려면 거절해. 그 정도는 전해 줄게. 네가 거절해도 이상할 건 없잖아."
나는 내 마음을 생각해 봤다. 그리고 윤주의 마음도 떠올려 봤다. 그가 그답지 않은 일을 하는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상하게 마음이 아린데, 궁금하기도 했다.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기에 더욱.
나 결혼해.
세련아, 나 결혼해.
자기야 나 결혼해.
그는 어떤 목소리로 내게 그 이야길 건낼까? 아니,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정말 그것인걸까?
내가 말 없이 고민에 빠진 사이 선배는 골치아프다는 듯 휴, 하고 짧은 한숨을 내 쉬었다. 연인 사이에 끼는 것도 골치아픈데 헤어진 연인 사이에서 선배라는 이유로 달갑지 않은 징검다리 노릇을 하는 그녀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며언,"
그녀가 뭔가를 정리하려는 듯 말 끝을 길게 끌며 반복했다. 그려며언, 그려며는, 그러면....그럼 말이야.
"나랑 셋이 만나자. 애들 우르르 다 같이 나오는 자리 말고, 내가 그날은 시간 안된다고 하고 따로 약속 잡을테니까 그때 나와. 너, 보고싶은 거지? 그 새끼. 대체 뭔 소릴 할건지."
선배는 또 내 대신 상황을 시원하게 정리했다. 내 마음도, 그에 대한 내 생각도. 모두.
보고싶은 건가? 내가 지금 윤주를 보고싶어하는 건가? 그의 입에서 그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어하는 건가? 뭔가 조금 어질 어질한 기분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정리되는 내 마음을 듣고 있자니 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간단하고 건조했다. 그래, 그러면 되지 뭐.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폭풍우로 정신없던 스노우볼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약속은 일주일 뒤, 주말로 잡혔다. 원래 동아리애들과 다 같이 만난다던 바로 다음 날이었다. 윤하선배는 전날까지도 나오기 싫으면 안나와도 좋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무슨 뜻으로 그러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윤주라면 이유가 있을텐데, 이렇게 안 어울리는 짓을 하는 이유라면 알고 싶다고.
"불편하면 내가 빠질게."
마지막까지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있길 바랐다. 적당히 나를 안심시켜주고, 적당히 예의를 차리고 또 주변을 의식하게 해줄 사람으로 그녀가 필요했다. 청첩장을 내밀 윤주의 얼굴을 혼자 상상해 봤지만 적당한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아는 수많은 윤주의 표정 중에 그 어떤 것도.
아니, 아니, 아니다. 윤주의 얼굴 자체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 얼굴만큼이나, 어쩌면 내 얼굴보다도 더 익숙하게 보고 기억해 오던 그의 얼굴이 흐릿했다. 알긴 아는데, 너무나 잘 아는데 종이에 한번 그려보라고 하면 그리지 못할 것 같았다. 부분 부분 이어져야 할 부분들이 조금씩 닳아서 없어져 버려서.
경서에게는 말 못했다. 마지막 통화를 한 것도 지난 미팅 전이었다. 회사 앞에서 그렇게 헤어진 후로 문자가 한 두통 오갔지만 주로 일 이야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왠지 모르게 서로 서먹하기도 하고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윤주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혹시나 가지 말라고 하면 어떡할지 몰라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하자고 한동안 서먹했던 사이에 전화를 걸긴 좀 어색하고, 문자로 말을 꺼내자니 막막했다.
이 나이를 먹고도 연애가, 연인과의 자존심 싸움이 이렇게 어렵다는 게 우스웠다. 경서가 벌였던 며칠 전 그 황당한 짓에 대한 화는 이미 누그러졌다. 몇몇 호사가들의 입에 한동안 오르내릴 수 있겠지만 매일 볼 사람들도 아니고 다시 그들을 만날 일이 있을 때 쯤이면 그다지 핫한 뉴스도 아닐 일이었다. 어쩌면......그렇게 폭탄 던지듯 휙 던져버리고 시침떼던 경서의 방법이 가장 작은 물결을 일으킬 돌맹이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다 알고 있었는지도.
일요일에 영화 볼래요?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리며 경서의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경서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잠겨 있던 화면을 풀고 메신저를 열어 다시 한번 그가 보낸 그 글자들을 바라봤다.
경서는 이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고민을 했을까? 이 한줄의 문장에는 그의 고민이 얼마나 들어 있을까? 그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나 혼자 과대해석 중인걸까?
일요일, 언제?
내가 답을 보냈다. 그는 내 대답에서 무엇을 읽을까. 읽긴 읽을까?
"저, 타로 보고 싶은데요. 지금 볼 수 있어요?"
휴대전화에 고개를 박고 있는 내 앞에 스르르 그림자가 지더니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날 불렀다. 살랑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듯 나긋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우유같은 여자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갛고, 깨끗하지만 불투명한 느낌. 흰 얼굴에 캄캄한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보통의 검은 눈동자가 아니라 아예 물기가 없는 것처럼, 반짝이는 안광이 없는 아주 새까만 눈동자였다.
"네, 그럼요. 앉으세요. 어떤 게 궁금하세요?"
나는 웃으며 내 앞의 의자를 권했다. 여자는 느리지는 않지만 느긋한 몸짓으로 의자를 뒤로 빼고 앉아 자기의 몸에 맞게 조절했다. 조금도 급할 것 없어 보이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나까지 느긋해지는 것 같았다.
"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하고 싶은데 해도 되나 싶어서."
여자가 까만 눈동자를 하고 빙긋이 웃었다. 쌍꺼풀 없이 길고 가느다란 눈매가 미소를 머금고 살짝 휘어졌다. 쑥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밀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왜요? 어려운 일인가요?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나는 천천히 카드를 들어 섞기 시작했다. 이일을 하다 보면 연애에 관련된 질문만큼이나 많은 것이 직업이나 직종에 관한 질문이다. 이직을 넘어서 완전히 새로운 직종으로의 변화를 꿈꾸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 하는 일하고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여자가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나를 보는 건지, 내 대답을 기다리는 건지 조금 헷갈렸다. 그녀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기에 나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마른 몸에 햇빛을 잘 보지 않는 듯 허연 피부, 힘 없이 착 달라 붙은 가느다란 머리카락에 빛이 들지 않는 까만 눈동자가 마치 밀납인형처럼 보였다. 여자는 한번씩 한쪽 틱처럼 눈가를 찡긋거렸다. 그 모습이 픽 하고 비웃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언짢은 것을 본듯 찡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묘했다.
"......연기를 하고 싶어요."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여자가 말했다. 또 한번 눈가가 찡긋하고 찝혔다.
"배우가 되고 싶으신 거에요?"
"네."
"지금은 왜 할 수가 없을까요? 다른 일을 하고 계셔서?"
"네."
"배우를 꿈 꾼건 얼마나 오래 됐을까요?"
"지금 하는 일을 하기 전부터요. 아주 오래 전부터. 아주 어릴 때 부터."
"그렇게 좋아했던 일인데 왜 그 일을 계속 하지 않고 진로를 바꾸셨을까요? 경제적인 이유로?"
"그럴......수도 있고요. 경제적인 이유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거고 그때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야 내가 사니까. 꿈을 이루자고 죽을 순 없잖아요."
"그렇죠."
나는 카드를 천천히 섞기 시작했다. 오늘의 내담자는 자기 속을 툭 털어보이는 타입은 아닌듯 했다. 카드를 그 사람의 상황에 맞춰 해석하기 위해서는 내담자의 현재 상태나 과거, 주변 환경 등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래야 똑같은 카드를 가지고 각각의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의 상황이 천차만별인것처럼 질문자들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 그들이 내게 제공하는 정보의 전달 방식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사람은 투머치라고 할만큼 가감없이, 가끔은 부담스러울정도의 사생활까지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나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맞추는 것을 구경하는 것처럼 알쏭 달쏭한 말만 늘어놓기도 한다. 나는 최대한의 정보를 얻기 위해 그들과 이런 저런 문답을 나누지만 경계심이 너무 심한 사람들은 그런 질문 마저도 날카롭게 반응하곤 했다.
이 여자는 날카롭진 않지만 모호했다. 모든 것을 터 놓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얼마나 맞추는지 보자, 그런 건 알아서 뭐하게? 같은 반응도 아니었다.
"연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막상 그만두니까 그쪽은 또 그쪽대로 죽을 것 같은....그런걸까요?"
"네, 그런 셈이죠."
"그래서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 포기했던 꿈이 포기가 안되시는 거고?"
"네. 다시 해 보고 싶어요. 그때가 제일 즐거웠거든요."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도전하시기에 뭐가 장애물이 되고 있을까요? 아니면 병행할 수는 없는 일인가요?"
나는 슬슬 이 지루한 스무고개를 끝내고 싶었다. 여자는 나에게 솔직히 다 털어놓을 생각이 없다. 적어도 지금은. 여자의 카드는 모호하고 애매한 해석 밖에는 풀어줄 수 없으리라.
"......언니, 지금 답답하죠?"
여자가 눈가를 찡긋거리며 물었다. 줄곧 무표정했는데 슬쩍 미소를 지은 것도 같았다.
"제가 그렇게 뛰어난 타로리더는 아니라서요. 앞 뒤 사정을 제가 알아야 정확히 해석해 드릴 수가 있는데 조금 부족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괜찮아요."
여자가 카드를 섞는 내 손등에 손을 살짝 올렸다 뗐다. 파리한 손가락이지만 따스했다. 나는 카드를 내밀고 질문을 생각하며 여자에게 섞고 싶은 만큼 섞고 달라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언니가 대신 해 줘요."
"하지만, 제가 대신 뽑으면......"
그건 당사자가 아닌 제 3자의 필터가 한번 씌워진채로 뽑는 카드이기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어요, 라고 설명을 하려는데 여자가 다시 내 손등에 손을 올렸다. 괜찮다는 뜻 같았다.
"내가 뽑으면 너무 많은 사념을 담을 것 같아서 그래요. 내가 마음을 비우고 순수하게 뽑을 자신이 없어요. 그러면 안되잖아요."
내 손 등에 올린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응원하는 것처럼 툭툭 두드렸다. 나는 깜깜하게 빛이 꺼진 눈을 잠시 들여다 보곤 설득됐다.
"질문은요?"
여자는 눈을 잠시 감고 생각에 잠긴듯 하다가 번쩍 떴다. 그 순간, 아주 아주 짧은 순간 나는 여자의 눈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누군가 그녀의 눈에 쳐 놓은 두꺼운 암막 커튼이 아주 잠깐 걷히고 그녀 자신이 불쑥 나왔다 들어간 느낌이었다.
"연기를 해도 될까요? 지금 하는 일을 하면서 병행해도 아무에게도 탈이 나지 않을까요?"
조금 이상한 질문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고 내 손등에 놓인 여자의 손등을, 그녀가 했던 것처럼 툭툭 두드려주었다. 여자의 손이 스르르 물러나고 나는 그녀의 온기를 손등에 그대로 느끼며 한번 더 카드를 꼼꼼히 섞고 펼쳤다. 그리고 그 여자가 되어 일곱장의 카드를 뽑고, 다시 나로 돌아와 두 장의 카드를 더 뽑았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답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바람을 털고 질문만 생각하며 카드를 뽑으려고 했다. 그녀는 그런 마음을 피하고자, 정말 카드가 보여주는 답을 받아들이고자 나에게 대신 카드를 뽑아 달라고 한 것이니까.
나는 뽑은 카드를 한 장씩 천천히 제 자리에 놓았다.
과거, 현재, 미래.
현재의 문제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이것, 미래가 될 원인은 이것, 그 원인의 결과는 이것.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들려줘야 할 내 조언 카드는 이것.
내가 카드를 뒤집을 때마다 여자는 옅은 한숨을 쉬기도 하고 고개를 작게 갸웃, 하기도 하고 끄덕이기도 했다.
모든 카드가 다 드러나자 여자는 카드 쪽으로 쏠려있던 상체를 일으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설명을 다 들은 표정이었다.
"언니 생각은 어때요?"
그녀는 나에게 타로상담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무언가 회의를 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처럼 물었다. 보통은 내 생각을 묻는 게 아니라 카드에 어떻게 나왔냐고 묻는다. 이렇게 질문을 한다는 건, 그녀는 이미 카드의 답을 대략이라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타로 카드를 볼 줄 아세요?"
나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여자는 아는 걸 모르는 척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그냥, 느낌."
여자는 어린 소년처럼 혀를 낼름 내밀더니 장난꾸러기같은 미소를 보였다. 순식간에 얼굴을 갈아끼운 듯한 여자를 보자 갑작스레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니가 뽑은 것도 설명해 주세요. 나 그건 안보여요."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영락없이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 모습이었다.
"혹시, 무당이세요?"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타로나 점사를 볼 때 다른 무당이 와서 시험해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더니 그런 건가 싶었다. 나로선 신내림을 받거나 신기가 있는 점술가가 아니었기에 이런 시험이 의미가 없었지만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언니가 무당해도 되겠다!"
여자는 재미있다는 듯 박수를 치며 까르르 웃었다. 그 해맑은 어린 아이 같은 목소리에 주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힐끔 힐끔 우리 쪽을 돌아봤다. 여자는 그 틱 같은 표정을 찡긋 찡긋 몇번 짓더니 다시 밀납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슬퍼보였다.
"미안해요."
"......"
"소용없는 거 아는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인간이잖아요."
여자는 잠시 신이 들렸던 순간을 경계로 빗장을 풀듯 마음을 훅 풀어버렸다. 그녀는 오랜 동안 무병을 앓았다고 했다. 사춘기가 시작됐을 때부터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다고 했다. 늘 어딘가 아프고 불안하고 주변이 뒤숭숭했다고.
고등학교 때쯤 연극반에 들어가 연기를 시작했는데 무대에 서는 것이 너무 즐겁고 청소년 대회에서 몇번인가 수상을 할 정도로 나름의 실력도 있정 받았다며 행복하게 웃어 보였다.
무병을 앓는 동안은 잘 있다가도 한번씩 다른 사람이 된듯, 말 그대로 뭐에 씌인듯 말하고 행동할 때가 있었는데 그게 일상 생활을 할 땐 남들에게 숨겨야 할 일이었지만 무대에서는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오히려 연극을 하는 동안에는 신병 증상이 나타나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한참 연기에 빠져있을 땐 '신들린 것 같다'는 칭찬이 칭찬 같이 들리기도 했다. 이렇게 연기를 하면서 신을 누르며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연기 전공으로 입시도 준비했다.
"그게 유예기간인줄도 모르고 신나서 날 뛰었어요."
여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입시는 치르지도 못했다. 그 후로 몇년간 정신 병원이며 절이며 교회를 오가다 결국 신내림을 받았다. 그때의 기억은 희미해서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고 또 몇년 무당으로 살다 보니 무대가 그리워졌다. 그녀는 뭐에 씌인 것이 아니라 무언가 자기가 가지지 못한 다른 삶을 연기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왜 직접 물어보지 않았어요?"
내가 물었다. 용한 무당이라면, 자신의 앞 길을 막고 다른 길을 터준 신이 있다면 그에게 먼저 묻고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궁금했다.
"무서웠나보지. 단박에 거절 당할까 봐. 믿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들킬까봐도 무섭고."
여자의 목소리에 묘하게 낮은 노파의 음색이 묻어났다.
"나는 차라리 내가 정신병에 걸린 거였음 좋겠다 했어요. 그러면 치료라도 할 수 있으니까. 언젠간 나을 수도 있잖아."
까만 눈이 나를 보고 눈을 깜빡 깜빡 감았다 떴다. 나는 저 커튼 같은 눈 뒤에 숨어 있는 여자가 안됐다고 생각했다.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들키고 싶은 마음,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 무엇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 무기력해 보이는 몸짓 속에 깃든 강렬한 자의식의 에너지가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제 조언카드 궁금하세요?"
나는 내가 뽑아 놓은 카드 두장을 슬며시 쓰다듬었다. 여자가 물끄러미 그 카드들을 내려다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적당한 단어와 뉘앙스를 골랐다.
"아마도 질문자님의 신은 자기 주장이 강하고 권위적이며 다소 이기적이고 자존심이 센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밀당을 잘 하는 밀당의 고수 같달까?"
"할매 얘긴가 보다!"
여자가 파하핫! 하고 웃었다. 소년이 다시 찾아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밀당을 잘한다는 건 늘 자기 주장만 밀어붙이는 건 아니라는 거죠. 밀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고. 흥정을 잘 하니까 그 점을 잘 활용해 보세요. 서로 양보하고, 욕심낼 것들을 따져보면서. 그리고 이거 보이죠?"
나는 할매가 내 이야기를 듣길 바라면서 마지막 카드를 톡톡 건드렸다.
"이 카드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카드에요. 새로운 모임에서요. 연극 동아리든, 극단이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면 분명 질문자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에요. 그런 행운을 놓칠 순 없죠. 안그래요?"
여자가 배시시 웃었다. 나는 이 웃음의 주인이 누군지 몰라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여자는 별 말 없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 책상위에 슬며시 올려 놓았다.
"언니야, 재밌네."
여자는 지갑 가방에 넣더니 갑자기 또릿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는 게 다 그렇다. 풍파는 누구에게나 온다. 크든 작든간에. 누구는 큰 걸 몇번이고 맞아서 자꾸만 쓰러질 수도 있고, 누구는 운이 좋아서 작은 것만 올 수도 있다. 근데, 그건 어쩔 수가 없어. 그게 팔자고 운명이야. 억울할 것도 없다. 그걸 뭘 어째. 그렇게 태어났는데. 지나간 거 고치는데 너무 맘 쓰지 마라. 태어난 건 그냥 그대로 두고 할 일 하면서 살아라. 자기 탓, 누구 탓 하지말고."
여자는 내가 뽑은 미래 카드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렇게 흘려버리면서 사는 것도 운명이다. 그건 그냥 일어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어. 그래야 계속 살 수 있고 새 날이 온다. 알았나?"
그리곤 벌떡 일어나 짐을 챙기더니 내 책상 위에 있는 사탕 하나를 꼭 쥐며 말했다.
"이거는 내가 가져갈게."
Five of Cups (다섯개의 컵) : 내버려 두면 좋았을 일을 잘하려다 망치고 스스로 상처받는다.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이기심 때문에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