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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정 maya Nov 15. 2024

보호 받지 못한 아이


**브런치 북은 한 권당 30개의 챕터만 발행이 가능한 관계로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30화까지를 1권으로 발행하고 31화부터 '타로카드 읽는 가게2'로 발행됩니다. 놓친 이야기가 없도록 마야의 브런치 구독을 꼭 눌러주세요!** 타로카드 읽는 가게 1권 바로가기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경서는 집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오랜만의 전체미팅 날이었다. 새로 런칭할 웹툰 프로젝트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모여 그 동안의 진행사항을 공유하고 컨텐츠의 오픈일에 맞춰 플랫폼에 추가 제안할 웹드라마와 관련 굿즈 디자인, 마케팅 사항들까지 조율하기로 했다.

나는 일개 스토리작가로서 그게 다 무슨 소린지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는 우리 둘만 나누고 협의했으면 됐을 일을 더 많은 눈과 입이 함께 하게 된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런 자리에 함께 손이라도 잡고 들어가자는 거냐고 책망하듯 말하며 거절했지만 그는 장난처럼 웃으며 왜 안돼? 하고 되물었다.


"맞잖아. 사귀는 것도 맞고, 손 잡는 사이인 것도 맞고, 자랑하고 싶는 것도 맞고."


일부러 더 어린애처럼 구는 건지 알 순 없었지만 경서는 진심으로 이 상황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제일 로망을 가지는 게 뭐 같아요?"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고 물었더니 경서가 다시 내게 물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뭐고, 가져야 하는 로망은 또 뭐람. 나는 경서의 즐거움에도, 그의 질문에도 아무런 공감을 하지 못했다.


"프리랜서들이 해보고 싶어도 못하는 거. 사내연애! 그것도 비밀 사내연애. 난 그게 로망인데?"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는 내 싸늘한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장난스럽게 내 코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그건 심각해지지 말라는 우리 사이의 새로운 사인이었다. 녜에녜에.


"비밀 사내연애가 로망이면 비밀을 지켜야죠. 왜 자꾸 오픈하려고 해요?"


내가 쏘아붙였다.


"그거야,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으니까.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세상에 자랑하고 싶잖아요?"


경서는 내가 이해 안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의 얼굴에 앞서 다른 여러 얼굴들이 겹쳐 보였다. 제일 먼저 보인 건 그의 형이자 내게 일용할 계약금과 월급을 밀리지 않고 제 때 제 때 입금해 준 대표님의 푸근한 얼굴이었다. 경서보다 둥글고 따뜻한 인상이지만 묘하게 닮은 미소가 지워버릴래야 지워버릴 수 없이 계속 그의 얼굴에서 연상됐다. 내게 철없는 막냇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어 버린 걸 알면 어떤 반응을 하려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라고 생각하려나? 뭔가 양심도 없이 뻔뻔한 여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계단을 오르는데 긴장감이 몰려왔다. 나는 일부러 약속된 회의 시간보다 10분쯤 일찍 도착했다. 괜히 사무실 앞에서 경서와 마주치면 더욱 어색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사무실 앞에 막 도착했을 때 경서는 자긴 10분쯤 늦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차피 10분 정도는 다들 쓸데없는 얘기로 아이스브레이킹을 하고 있을 거라 상관 없다는 핑계도 함께.

나는 회의실에 앉아서 의기양양하게 들어오는 그의 얼굴을 어떤 표정으로 봐야하나, 고개를 숙이고 딴짓을 해야하나, 아무렇지 않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해야하나 고민이 됐다.


"어, 작가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출입문을 문잡고 안절부절하는데 누가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유대표였다. 진주의 형. 아니 경서의 형.


"아유, 제가 너무 놀래켜 드렸나봐요! 괜찮으세요?"


너무 놀라 가슴을 쥐며 쓸어내리자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었던 유대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 봤다. 나는 왠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내가 잘 달래서 일에 집중하게 하라던, 애지중지하던 동생을 꼬드긴 여우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게 맞는 얘기일지도 모르고.


"네, 네네. 괜찮아요. 안녕하셨어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인사를 건냈다. 유대표가 내 어색한 태도에 이해못하겠다는 이상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았지만 나는 여전히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진주작가 통해서 간간이 보고는 받았고요, 두분이서 잘 맞는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원래 펑크 잘 내는 진주작가 일하는 패턴 생각해서 일정도 넉넉하게 잡은 건데 생각보다 별 문제 없이 1차 마감을 지켜주셔서 저희는 작가님께 너무 감사드리고 있어요. 마케팅팀에서도 차질 없이 스케줄이 진행될 수 있겠다고 너무 좋아하고요. 그 덕에 야근이 반으로 준 셈이니까요. 하하."


나를 에스코트해서 회의실로 데려가며 유대표는 활달하게 진행사항과 근황을 말해주었다. 나만 고개를 떨군채 비굴하게 네, 네만 반복할 뿐이었다.

대회의실 안에서는 한창 미팅준비 마무리 중이었다. 긴 회의실에는 그만큼이나 긴 테이블이 가운데 있었다. 테이블 끝에 놓인 커다란 TV에는 '타로카드 읽는 가게 런칭 계획 및 마케팅안'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프레젠테이션이 띄워져 있었고 젊고 어린 직원들은 자리마다 커피와 다과를 1인분씩 세팅 중이었다. 자리는 절반 이상 채워져 있었는데 유대표가 회의실로 들어서자 다들 벌떡 일어나 고개를 꾸벅 했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그의 옆에 서 있다가 그들을 향해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몇몇은 내 얼굴을 아는 눈치였고 또 몇몇은 옆 사람에게 '누구야?' 라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여기는 신세련 작가님. 이번 작품 스토리 작가님이에요. 첨 보는 분들도 계시죠? 신작가님 덕에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마감을 하게됐습니다. 자, 박수~"


자연스럽게 회의실 입구에 가까운 상석에 자리를 잡은 유대표를 두고 조용히 안쪽 구석으로 가 내 자리를 찾아 앉으려는데 갑자기 어색한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나는 아까보다도 더 어색하고 이상한 표정과 몸짓으로 다시 고개를 꾸벅 숙여 답례했다. 난처했다. 이런 자리, 이런 주목, 이런 소개. 다.


"아,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가 어느정도 마무리 되면 저희가 준비하는 신인 작가가 있는데 작가님이 그 분하고도 한번 일을 해 주시면 어떨까....합니다. 물론 저희와 일하는 게 마음에 드셨다면 말이죠. 진주 작가를 컨트롤해서 이 정도까지 결과물을 이끌어 내실 수 있는 분이면 그 어떤 작가가 와도 천하무적이실테죠."


유대표가 나를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가장 상석의 대표 자리와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향했던 탓에 그는 큰 소리로 내게 이야기를 해야했다. 중간 중간 회의 참석자들이 서너명 쯤 더 들어오는 바람에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그들은 나와 유대표를 번갈아가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파악하려고 집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소위 '회의'를 하는 것도, 그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아 본 적도 처음인 나는 등에서 식은 땀이 날 지경이었다. 경서와는 다른 결로 사람을 당황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오늘 미팅이 끝나면 저와 전속 계약에 대해서도 한번 얘기를 나누고 가시죠? 시간 괜찮으시죠? 저희 회사 소속의 작가님들 중에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유작가와는 비교도 안되게 실력도 좋으시고 성격도 좋으신 -"


"오늘 미팅이 저 씹는 거에요?"


회의실 입구쪽에서 경서가 유대표의 말을 막으며 등장했다. 순간 회의실의 모든 사람들이 휙 하고 고개를 돌려 진주의 등장을 쳐다봤다. 나까지도. 나의 그의 주인공스러운 등장을 발견하고는 뭔가 더욱 부끄럽고 창피해졌다. 부디 조용히 넘어가길. 오늘의 미팅이 무사히 끝나길.

경서는 아는 직원들과 눈인사를 가볍게 나누며 천천히 회의실로 들어왔다. 가장 안쪽, TV 바로 앞 구석에는 내가 앉아 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만 와라. 그만 와라. 거기 앉아라. 거기 앉아라. 염불 외우듯 중얼거렸다. 경서는 성큼 성큼 걸어서 안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의 시선 역시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안 쪽에 앉았어요? 여기 앉으면 화면 잘 안 보이는데."


내 옆자리에 털석 앉으며 경서가 말했다. 따라오던 시선들이 투두두둑 내 앞에 함께 쏟아졌다. 나는 그에게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내가 곤란해 하는 이 상황이 무척 재미있어 보였다. 나는 그의 차를 타고 왔었어야 했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신경쓰이지 않는 척 했어야 했다. 경서의 장난스러움이 누군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시큰둥하게 반응했어야 했다.


"신작가님 전속 계약 하려고요?"


나를 보며 키득이던 경서가 돌연 회전의자를 휙 돌려 유대표를 향했다. 유대표는 싱글거리며 일단 작가님과 얘기 해보고, 라고 대답했다.


"작가님이 이번에 유작가랑 일하고 나서 우리한테 완전히 질렸을 수도 있잖아."


대표의 장난같은 말에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하하, 웃어주었고, 경서 역시 싱긋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에이, 그럴리가. 그랬으면 나랑 사귀겠어요?"


쿵 쾅.


어수선했던 실내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마치 비디오의 일시정지를 누른듯 찰나였지만 세상 모든 것이 멈추고 볼륨을 죽인 듯 고요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내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심장이 덜컹 하는 소리를 들으며 경서를 휙 돌아봤는데 그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회의가 시작됐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순식간에 내 얼굴이 뜨끈하게 붉어지는 게 느껴졌고, 경서의 뜬금없는 폭로에 사람들의 눈이 번뜩 하고 켜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키보드를 두드리고 휴대전화를 만지작 거리는 것을 봤다. 내가 촌스러운 건지, 내 반응이 과민한 건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모두들 경서가 한 말을 못 들은 척 침착했다.

오직 나만 좌불안석이었다. 나는 감히 유대표의 얼굴을 다시 쳐다볼 생각도 못했다. 그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에게 자신이 없었고, 내 일을 다 끝마쳤지만 그와의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경서에게 왜 그랬냐고 따져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노트에라도 적어서 물어볼까 했지만 괜히 회의 시간에 딴 짓 하는 사람처럼 보일까싶어 아예 경서가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나는 뭐가 그렇게 무서웠던 걸까?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의견을 주고 받았지만 내 귀엔 그들의 이야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의기양양하게 우리의 연애를 공표해 버린 경서와 전전긍긍 한 내 마음만 생각했다.

나는 늘 누군가의 눈에 띄는 것을 두려워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싫었다. 나는 늘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으로 무리에 끼어있길 원했다.

아주 오래 , 초등학교에서  남자아이들이 '우리 반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 주제로 투표를  적이 있었다. 아직 관심있는 이성 친구에게 짖궃은 장난만   아는 어린애들이었지만 이성에 끌리는 것은 본능이었는지 한번씩 돌아가며 그런 실없는 투표를 하곤 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갖는 정도로 관심이 있었지만 그 이상의 관심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런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만큼 가까운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애가 누구야?' 하고 누군가 소리를 치면 아이들이 '누구가 제일 예뻐!' '아니야 걔보다 누구가  예뻐!' 같은 솔직하지만 다소 잔인한 공개 투표를 하는  조용히 들었다.

보통은 여자 반장이 그 반의 최고 예쁜 애 왕좌를 차지하곤했다. 그 아이들은 자신감이 넘치고, 발표도 적극적으로 하고, 남자아이들과 하는 거친 놀이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 반면 나는 조용했고, 내 자리에서 잘 벗어나지 않았고, 시험 성적 발표 날이 아니면 이름이 불리는 일도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내가 같은 반이라는 것도, 내 이름도 잘 모르고 있다가 중간고사가 끝날 때쯤에야 나라는 존재를 인식했는데 보통은 내가 반에서 1등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조차도 크게 관심이 없던 얌전하고 조용한 내가 1등을 하면 선생님들은 깜짝 놀라며 '세련이가 1등을 했네!'라고 아이들이 모두 듣는 곳에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이들은 세련이가 누군지도 모르다가 갑작스럽게 내 존재를 인식했다.

그리고 어느날, 아이들이 드디어 나라는 존재를 알게 된 후 어느날의 투표에서 어떤 남자아이가 '세련이가 제일 예뻐!'라고 소리쳤다. 갑자기 튀어나온 내 이름에 나는 움찔, 하고 목을 움츠렸는데 그 뒤를 이어 몇몇 아이들이 '맞아!' '세련이가 우리반에서 제일 예뻐!'라고 맞장구를 쳤다. 난생 처음 받아본 관심이었다.

뭔지도 모르면서 기분이 슬쩍 좋아지려고 할 때 우리 반에서 제일 친구가 많던, 종종 나를 벌레 보듯 쳐다보며 지나갔던 여자애가 흥! 하며 소리쳤다.


"야, 쟨 아빠도 없는 애잖아. 쟤네 엄마 술집년이잖아."


거짓말이었다.

아니, 일부는 진짜였지만 어딘가에서부터 시작된 뜬 소문과 어린애들 특유의 자극적인 면을 과장하는 습성이 합쳐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빠가 없는 건 맞지만 엄마는 술집년이 아니야? 그런 말을 한다고 놀림이 멈췄을까? 이상한 소문이 바로 잡혔을까?

아이들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거친 단어가 나오자 교실 앞 쪽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담임 선생님이 고개를 길게 빼고 우리 쪽을 쳐다봤다. 잠시 우리의 기색을 살피는 듯 하더니 투닥거리는 싸움으로 이어지지 않아서였는지, 그 애의 말이 별로 심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런 얘기를 들어도 별 상관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는지 금새 흥미를 잃고 다시 책상위에 펼쳐진 서류 더미로 눈을 돌렸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엄마가 무슨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정말 어린 아기였을 시절엔 어느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었다는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일을 하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들이 늘어나더니 어느 날부터는 아침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주변 이웃 아줌마들이 해다 주는 반찬과 언니 오빠들이 입던 헌 옷, 조금씩 나오는 정부 보조금 같은 게 우리집 소득의 전부였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만약 엄마가 정말로 술집에 나갔다면 매일 비슷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출근이라도 했을 것이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치장이라도 했을 것이다. 돈 몇푼이라도 벌어왔을 것이다.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안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가 나가고 싶을 때 나가고 들어오고 싶을 때 들어왔다.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먹고 마실 때 만나는 사람들은 있는 것 같았다. 그때말고는 연락을 하거나 따로 만나지는 않았기에 그들이 정말 친구인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도 이게 그녀가 가진 최소한의, 엄마로서의 양심과 자긍심이라고 봐야할지, 아니면 그마저도 못하는 구제불능이라고 봐야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일로 돈벌이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애교도, 살가운 말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돈 벌자고 자기의 감정을 포장해서 아양을 떨 성격도 못됐다.

절반쯤만 진실인 나의 비밀이 폭로되자 나를 예쁘다고 했던 남자아이들은 언제그랬냐는 듯 나를 무시했다. 교실에서나 운동장에서나 시도 때도 없이 아이스께끼를 하고 도망가고, 내 필통이나 노트를 숨기고, 신발 주머니를 화장실에 던져버렸다. 소문을 퍼뜨리던 여자애들은 그 모습을 의기양양하게 지켜봤고 조용한 아이들은 내 가까이에도 오지 않았다.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예쁘다는 게 오히려 그들에게 나를 마음껏 다뤄도 된다는 빌미가 된 것 같았다. 차라리 아무도 나를 모르던 때가, 너도 우리반이었어? 하고 놀라던 그 때가 훨씬 살기 편했다.

그때부터 누군가 내가 예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면 하며 살았다. 늘 어두운 얼굴, 대충 묶은 머리, 누구와도 마추지 않는 눈을 하고 그냥 기억나지 않는 대중 속 '지나가는 사람 1'로만 남아있길 바랐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공부만 열심히 했다. 그것만이 내 능력으로 이뤘다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몰래 쪽집게 과외를 한다거나, 학군지에 있는 유명한 학원을 다니거나, 추가 실기 점수를 얻기 위해 촌지를 찔러줄만한 배경이 없었으므로 오히려 내 성적에 대해 그 누구도 의혹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런 배경이 있는 아이들이 1등을 하지 못해 불만이 있고 내가 눈엣 가시처럼 느껴지더라도 말이다.

경서의 한마디는, 그래서 갑작스레 나에게 집중된 이목은, 그날의 기분을 떠오르게 했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웬 연애질이야. 저 여자는 대체 뭐야? 저 여자가 꼬셨나 봐. 이 일도 진주가 꽂아준 거 아냐? 둘이 연애나 하려고 지금 우리를 이용하는 건 아냐? 아무도 하지 않는 소리가 내 귓가에 소란스럽게 들려 왔다. 그런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밤을 새고 몇번이나 퇴고를 하고 또 고쳐썼는데.

잠시간의 정적이 지나고 여러 사람이 준비해 온 자료를 발표하고, 의견을 나누고 조율하며 차분한 회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나 혼자만 내 마음 속에서 던져대는 비난과 변명으로 시끄러웠다.

나를 이런 혼돈으로 예고도 없이 던져버린 경서는 혼자서만 싱글벙글하더니 얼마 안 있어 내 속으로 점점 가라앉는 나를 발견했다. 외부로 열린 귀가 닫히고 시야가 좁아지는 나의 눈에도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나를 살피는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괜찮아요?


그가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대답할 순 없었다. 내가 괜찮지 않으니 잠시 쉬어가자고 하기라도 한다면, 호들갑이라도 떤다면 나는 더더욱 쪼그라들게 될 것이니까.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책상 위에 놓인 회의 자료에 시선을 고정한 채 회의가 끝날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실제로는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게 할 순 없지만 내가 아무도 보지 않음으로써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었다. 수풀 속에 머리만 박고 숨은 꿩처럼.








"신작가님, 우리 잠깐 둘이서만 얘기 할 수 있을까요?"


끝날 것 같지 않은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후속 업무들을 논의하며 웅성이며 회의실을 빠져나갈 때 유대표의 목소리가 내 뒷덜미를 턱 낚아챘다. 경서는 회의가 마무리되기 직전 급하게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밖에 있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보니 유대표가 인자한 미소를 띄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끌려가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천천히 똑바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그의 가까이 다가가자 유대표는 '이리로' 하며 나를 앞장서 걸었다. 그의 등 뒤에 서서 따라가는데 복도에서 마주치는 직원들이 벽 쪽으로 붙으며 목례를 했다. 그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유대표의 등 뒤에 어깨를 움츠리고 따라가던 날 뒤늦게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민망했다.


"아, 참. 놀랐습니다."


대표실에 들어선 내 뒤로 조심스레 문을 닫자마자 유대표가 말했다. 뭐라 대꾸해야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죄 지은 사람처럼 굴고싶진 않았지만 내 태도가 딱 그랬다.


"거, 참.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는데. 작가님이 워낙 미인이셔서. 그 녀석이 워낙 예쁜 분들을 좋아해요. 근데 아, 거, 참. 그래도 조금 놀랐어요."


유대표가 소파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 나는 엉덩이 끝만 걸치고 불편하게 앉았다. 얘기가 끝나자마자 얼른 튀어 나가기 위해서였다. 유대표는 자기 책상에서 얇은 서류더미를 가지고 와 내게 내밀었다.


"뭐. 다 큰 성인끼리의 일을 제가 참견할 건 없죠. 놀란 건 놀란 거고. 일은 일이니까."


나는 그가 내민 서류를 내려다 봤다. 회의 시작 전에 잠시 말을 꺼냈던 전속 작가 계약과 관련된 내용의 서류였다.


"이건......?"


나는 그제서야 그의 얼굴을 바로 올려다볼 수 있었다.


"두 분 일이야 어찌됐든, 저는 신작가님이 계셔서 이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돌아갔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더군다나 그 까다롭고 제멋대로인 녀석을 붙잡고 마무리까지 하셨으니까......방향을 잘 못 잡는 신인 작가들의 그런 어떤......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그런 역할까지 함께 하는 그런 일을 좀 맡아서 같이 해 주시면 어떨까 해요."


"......"


나는 그를 바라보고, 다시 서류를 내려다 봤다.

우리 일이야 어찌됐든.

뼛 속까지 철저한 사업가인 그 앞에서 나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아마추어가 된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안도했고, 한편으로는 그가 내게 내미는 새로운 기회에 감사했다. 다행이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한번 천천히 보고 의견 주세요. 메일로 파일도 보내놓으라고 하겠습니다."


"네."


나는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슬쩍 미소지었던 것 같기도 했다.


"다 큰 성인들이니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다 큰 성인이라고, 알아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단 뜻처럼 들렸다. 그는 여전히 동생을 완전히 믿고 있진 않는 것 같았다. 방 문이 벌컥 열렸다. 경서였다.


"나 빼고 무슨 얘기 하는데?"


"무슨 얘기는. 작가님과 계약 얘기지. 신인 작가들 전속 스토리작가로 스카우트 하고 싶어서."


유대표는 아무렇지 않게 능글 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경서가 내 옆에 붙어 털석 앉아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 전속 아닌가? 난 그렇게 계약하고 싶은데?"


나는 지금 이 상황도, 사람도, 대화도 너무 불편했다. 어깨를 감싼 그의 팔을 풀어냈다. 여기서 이런 식으로 거들먹 거리는 건 너무 어린 애 같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뭘 과시하고 싶은지, 자기를 애 취급 하는 큰 형 앞에서 얼마나 어른인 척 하고 싶은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형이 나름의 감시역을 겸해 붙였던 나를 온전히 자신의 편으로 포섭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지.


"천천히 살펴 보고 말씀 드릴게요.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대로 일어나 유대표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서류를 들고 나왔다. 경서가 나를 따라 나오는 것 같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오랜만에 사람들 사이에서 진을 뺀 기분이라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같이 가요. 뭐가 그렇게 급해요?"


경서가 내 팔을 잡았다. 휘청하며 경서 쪽으로 몸이 돌아갔다.


"화났어요?"


경서가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지금 당장 눈을 감았다 뜨면 집에, 내 방에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도 없이, 혼자. 누구나 그런 시간이 필요하니까.






King of Swords (검의 왕) : 긁어 부스럼. 섣부른 선택. 공격적이고 따지는 거 좋아하는 사람. 성격이 급하고 인간미가 없다. 고독하고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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