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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정 maya Nov 01. 2024

새로운 스무고개



**브런치 북은 한 권당 30개의 챕터만 발행이 가능한 관계로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30화까지를 1권으로 발행하고 31화부터 '타로카드 읽는 가게2'로 발행됩니다. 놓친 이야기가 없도록 마야의 브런치 구독을 꼭 눌러주세요!** 타로카드 읽는 가게 1권 바로가기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12월 31일 점심에는 윤하 선배와 사장 언니를 만나기로 했다. 그 전번 만남이 재미있었는지 윤하 선배가 다시 우리를 불러 들였다. 원래대로라면 경서가 스키장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점심 때 그녀들을 만나고 저녁 때 경서를 만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경서의 귀여운 변덕으로 일정이 다소 틀어져 버렸다. 나만을 보기 위해 달려온 경서는 아이러니 하게도 그 덕에 다른 모든 일정이 텅 비어버려 홀로 심심한 연말을 보내게 된 것이다.

경서는 우리가 맞는 첫번째 해의 마지막날 하루 종일 함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지만 한 해의 마지막 날은 매년 돌아오는 것이니 그렇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우리는 저녁에 다시 만나게 될테니. 전화기 속 경서는 그런 나에게 '세련씨 T에요?' 라고 물었다.


"경서씨가 F가 아닌 건 알아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경서가 나에게 보이는 이런 저런 애정의 형태, 어떨 때는 과하고 어떨 때는 낯 간지러운 모습을 한 그것이 나는 경서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대체로 다정하고 달콤한 애인이었기에 F형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그저 그의 감정적 유희 같은 것이었다.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우러나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겉으로 보기엔 다소 무뚝뚝해 보이지만 뼛 속까지 F형의 남자를 만나 본 나로선 그 차이가 너무 잘 보였다. 

그 차이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데, 윤주를 만날 때의 나는 혹시라도 내가 감지하지 못하거나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가는 그의 감정이 있진 않은지 늘 조금 긴장해야 했다. 윤주를 속 좁은 남자라고 평가하고 싶진 않지만 가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고운 기분이 내 감지의 채를 통과해 버리는 순간 우리 사이에는 냉랭한 기류가 흐르곤 했다.

지난 그 밤도 그랬다. 달아오른 감정과 깨져버린 흥 사이의 이상한 나에게 경서는 몇 번이나 '왜' 그러냐고 물었고, 나는 그저 그의 품을 파고들 수 밖에 없었다. 윤주였다면, 그라면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 주고 뭔지도 모르면서 괜찮다고 해주었을 것이다. 뭔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경서는 그게 뭔지를 알고 싶어했다. 내 기분이 왜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지,  아무 답도 듣지 못한 채 포근히 나를 안고 토닥이는 결말은 둘 다 똑같았지만 나는 경서의 품 속에서 물음표의 에너지를 느꼈다. 묻고 싶은 열망, 알고 싶은 궁금증, 해결하고 싶은 의지 같은 아우라가 그가 잠들 때까지 뜨거운 열기로 나에게 전해졌다.

나는 그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가 느끼는 의문이나 나에 대한 답답함을 과연 말로서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을까? 육신은 누구보다도 가까운 거리에 붙어 있었지만 혼이 빠진 채 잠든 내 몸뚱이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영혼처럼 아주 먼 기분으로 그 밤을 지샜다.


"오늘 기분은 어때요?"


경서의 정찰기가 내 주변을 맴돌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했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내가 대답했다.


"좋아하는 음식은 뭐에요? 오늘 저녁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가리는 건 없고, 특별히 생각 해 놓은 것도 없어요."


"오늘 나랑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가고 싶은 곳이라던가."


"그냥 경서씨 얼굴 보는 걸로도 좋아요. 아는 곳도 별로 없고요"


스무고개 같은 질문을 이어가면서 나는 내 스스로에게 조금씩 질렸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 있나. 이런 나와 이 남자는 왜 연애 같은 걸 하려는 거지.


"좋아하는 영화는?"


경서는 지치지 않고 질문 보따리를 풀었다.


"엔딩이 있는 영화. 열린 결말 싫어해요. 영화를 본 건 좀 오래됐어요. 최근엔 본 게 없어요."


"좋아하는 색, 잘 어울리는 색은?"


"잘 모르겠어요. 어울리는지는 모르지만 검은 색, 회색 옷을 많이 입는 편이에요. 좋아해서는 아니고. 그냥 제일 편해서. 관리상의 이유로요."


"좋아하는 작가 있어요?"


"없어요. 읽고 재미있는 것이라면 작가는 상관 없어요. 특정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아요. 도서관에 가서 표지만 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거 좋아해요."


"여행 좋아해요? 가고 싶은 나라 있어요?"


"여행 가본 적 없어요. 어릴 땐 가난해서, 커서는 아르바이트 하느라 하루 이상 시간을 낼 수가 없었어요. 언젠가 간다면 바다에 가보고 싶어요. 들어가진 않고 그냥 바닷가에 앉아서 계속 바라보고 싶어요. 난 수영을 못하니까."


"뭐 할 때 제일 행복해요?"


"행복이 뭔지 먼저 정의 해 줄래요?"


"밤에 잠들기 전에 내일도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이 드는 기대감을 주는 일?"


"그럼 난 행복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불행하게 만드는 건 뭐였는데요?"


"내일이 없었으면 했던 순간? 많죠. 수 많은 밤들. 예전에는 단칸방에서 아기들이 밤새도록 울 때, 요즘은 이불 속이 너무 춥고 깜깜할 때."


"요즘 가지고 싶은 거?"


"아무거나?"


"응. 아무거나."


"물건은 아니고."


"그럼?"


"강아지. 봉구. 다른 강아지 말고, 그냥 봉구."


"좋아하는 남자 스타일?"


"......"


깊이 생각할 새 없이 계속 이어지는 경서의 질문에 답을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답을 하다보니 경서가 그날 밤 내게서 듣지 못했던 '왜'를 조금 돌려서 묻고 있다는 걸 알게됐다. 익숙한 방식이었다. 나였어도 그랬을테니까. 그러므로 나는 이 남자가 무엇을 알고싶어하는지도 알고 있었고 어떻게 답을 하고 어떤 이야기를 해야 그가 만족스러워할지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비슷한 면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서로의 배경이 어떻든, 살아온 환경이 어떻든 나는 그에게서 나를 느끼고 있었다. 


"좋아하는 스타일!"


경서가 다그치듯 물었다. 다그침 속에 장난기 어린 웃음이 묻어 있는 것처럼 들렸다. 


"나같은 스타일이라고 하지 말고요. 그건 너무 좀 반칙이니까. 오케이?"


그가 얼른 덧붙였다. 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대답할지, 혹은 자신이라면 어떻게 대답할지 알았기에.


"좋아하는 스타일......잘 생긴 사람."


내가 대답했다. 경서가 음, 하며 음미하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계속 하라는 뜻이었다.


"허튼 소리 하지 않고, 다정하지만 가볍지 않고, 솔직한 사람."


"또?"


"또......이야기를 하면 즐거운 사람."


"또?"


"또......사연 없는 사람."


"사연 없는 사람?"


경서가 되물었다. 나는 전화기 저 쪽에서 그가 짓고 있을 표정을 상상해 봤다. 얼굴 한가득 물음표를 띄우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겠지.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


"평범하고, 평온하고 일생이 그냥 재미없게 흘러 온 사람."


"왜?"


또 왜. 이번엔 내가 웃었다. 아니 왜? 하고 경서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 거렸다. 


"그래야 조금만 재미있어도 많이 재밌어지니까."


"그런 사람 많이 만나 봤어요?"


경서가 물었다. 이 질문에는 어떤 뉘앙스가 숨어있는 건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


"경서씨는요? 좋아하는 여자, 어떤 사람이에요?"


이제 내가 되돌려줄 차례다.








그 날의 이슈는 단연 내 연애 소식이었다. 언니들은 마치 TV드라마라도 보는 것처럼 반짝이는 눈망울을 하고선 그래서, 그래서를 연발했다. 덜어낼 건 덜어내고, 숨기고 싶은 건 숨기며 우리 사이의 일들을 요약해 이야기를 하자니 그녀들은 감질이 나는 듯 했다.


"그게 단데. 그냥 그게 다에요."


나는 두 손바닥을 그녀들에게 보이며 더이상 털어놓을 것이 없다는 걸 강조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했던 조언이 네 연애에 도움이 됐다는 거 아니야. 오늘부터 1일 말야!"


사장언니가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야, 뭐가 우리 조언이야! 내 조언이지. 넌 그거 촌스럽다고 했잖아."


"촌스럽긴 촌스럽지."


"근데 왜 이제와서 숟가락을 올려. 그거 내 조언이야!"


"어우, 치사해. 그래, 너 다 해라. 네가 짱이고, 네가 연애 천재다. 됐냐?"


사장언니가 윤하선배를 장난스럽게 흘겨보며 말했다. 


"짱이 더 촌스럽네. 그런 말 누가 쓴다고."


윤하 선배는 콧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나는 만담같은 그녀들의 대화를 지켜보며 연애가 주는 생기를 생각했다. 그게 비록 남의 연애라 할지라도 사랑은, 사랑의 시작이 뿜는 생기는 사람들을 흥분되고 행복하게 만든다. 아니, 그게 남의 연애라 더욱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좋다. 네가 연애를 한다니. 다행이야."


윤하선배가 안도의 큰 숨을 내쉬었다. 나는 나의 연애 소식이 왜 그렇게 그녀를 안심시키는지 몰라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 봤는데 선배는 왠지 내 눈을 피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 뭐 숨기는 것이 있나? 곰곰히 생각해 봤지만 딱히 그럴만한 것이 없었다.


"나도 얘기 할 거 있어."


사장언니가 윤하 선배를, 그리고 나를 눈으로 점 찍듯 꼭 꼭 바라보며 말했다. 


"뭔데 그렇게 심각하게 시작해?"


윤하선배가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며 물었다. 들을 준비가 됐다는 뜻이었다. 나도 조용히 언니의 눈을 쳐다봤다. 빨리 말해버리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스러운 마음이 서로 간질간질 한 눈빛이었다.


"나, 카페 그만 두려고. 이제 그만하고 싶어."


뭔가를 뱉듯 와르르 털어놓은 언니가 그렇게 말하곤 나를 쳐다 봤다. 마치 나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이 내 처분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그 눈빛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왜, 갑자기?"


나 대신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윤하선배가 언니에게 질문을 던졌다. 언니는 눈을 깔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그녀의 고개가 한번씩 갸웃거리듯 왔다갔다 했고 손톱 옆 거스러미를 뜯는 것처럼 손톱사이도 매만졌다. 적당한 말을, 단어를, 목소리와 우리를 이해시킬만한 예시를 찾고있는 게 분명했다. 나 역시 조금은 놀랐지만 그녀가 뭔가 다 그만두고 싶어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대답을 다그치고 싶지는 않았다. 카페 문을 닫았던 일주일 정도의 시간 동안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지금 가장 미안함을 느끼고 있을 대상이자 폐업의 걸림돌은 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우리의 관계는 순전히 그녀의 호의로 시작되었고, 둘 사이에 금전적인 문제나 계약 문제가 걸린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카페를 그만두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이 바뀌어서 나에게 당장 나가달라고 한다 해도 나는 그 말을 따라야 했다. 그녀가 느끼는 그 미안함은 그녀 때문에 곤란해질 나에 대한 순도 100%의 동정심과 애정 때문이었다. 


"나 안 행복한 거 같아."


그녀가 내리 깔았던 눈을 조심스레 들고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행복? 너 행복하려고 카페했니? 돈벌려고 한 거 아니고?"


윤하선배가 톡 쏘아붙였다. 이럴 때의 그녀는 얄밉기 그지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건 그녀 뿐이었다. 그녀의 질문들은 종종 얄밉지만 얄미운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또 아무렇지 않게 들어도 상관 없는 정도의 의도를 간직했다. 그래서 그 질문을 받는 사람 역시 솔직하고, 때로는 듣는 사람의 감정을 배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그런데, 행복하지도 않는데 하고 싶진 않아서. 이제 사람들 싫어. 찾아오는 것도 싫고, 내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그걸 보는 것도 싫어.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까지 세상 사람들이 다 싫어지기 전에 관두려고."


"그럼 얜 어떡해."


윤하선배와 언니가 동시에 나를 돌아다 봤다. 내가 뭐라고 해야할 것 같은데 뭐라 대답해야할지 몰라 그녀들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셋이 한꺼번에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그녀들도 함께 까르르 웃었다. 사랑받는 딸부잣집 막내동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사장언니가 한껏 꼬리가 내려간 눈을 하고 나를 바라 봤다. 


"아니에요. 언니 덕분에 집 나와서 마음 붙일 곳도 있었고 고정적인 수입도 벌었잖아요. 이제 다시 글 쓰는 일도 하고 있고 나 너무 걱정 말고 언니 하고 싶은대로 해요."


"미안해, 세련아. 내가 너무 무책임한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황송한 기분이 들었다. 그 누구도 내게 나를 버려두는 것에 대해 미안해 한적 없었는데 알게 된지 이제 겨우 일년도 안된 인연이 내게 이렇게까지 미안해한다는 게 참 이상했다. 

나는 내가 운이 좋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가끔 이럴 땐 운이 좋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모든 인생이 죽어라고 나쁘기만 한 건 아닌 건가 싶기도 했다. 이렇게 헷갈리게 만들어서 인생이 한번 살아볼만 한거라고 착각하게 만들려는 신의 속임수인건가?


"당장 그만 두는 건 아니야. 부동산에 가게도 내 놓아야 하고, 권리금이라도 좀 챙기려면 카페를 인수할 사람도 찾아봐야 하니까. 그때까지는 잘 부탁해."


언니가 내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조금 쓸쓸하고 따뜻했다.







경서의 얼굴을 꼭 봐야겠다는 언니들을 진정시키고, 뿌리치고, 그가 기다리는 곳으로 뛰어가면서 나는 몇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짓궃은 언니들이 어디선가 숨어서 나를 따라오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내 뒤에서 히히호호 웃으면서 세련이 좀 봐, 저 남자 좀 봐, 어머머 둘 좀 봐, 얼레리 꼴레리, 유치한 장난이라도 걸어올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입가에도 히히히 하는 유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나는 뭐라고 할까?

아이, 언니들 그만 하세요. 언니들, 인사하세요.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에요. 언니들 어때요, 제 새 애인이. 멋있죠?

저 멀리서 차에 기대고 서서 기다리던 경서가 그런 우스운 상상을 하며 히죽 히죽 웃는 나를 발견했다. 그는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하다는 듯 바라 보고 있었다.


"뭐 재미있는 일 있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을 저으며 또 뒤를 한번 힐끔 쳐다봤다. 경서가 나를 따라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을 쳐다 봤다. 왜요, 왜 하고 묻는 그의 등을 떠밀며 차에 태우고 나도 얼른 따라 탔다.


"이제 우리 뭐해요? 뭐 먹어요?"


내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높고 발랄하게 차 안에 퍼졌다. 경서는 차갑게 언 내 손을 잡고 호 따뜻한 입김을 불어주고 두 손을 모아 감싸쥐어 녹여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언니들하고 즐거웠나 봐요. 샘나게."


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한껏 가벼운 마음으로 신나게 이야기를 꺼냈다.


"어, 사장언니가 카페를 그만 하고 싶대요. 곧 정리 할 거라고 했어요."


경서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에? 그게 재미있는 얘기에요? 너무 갑작스러운데?"


나는 또 그 상황이 재미있어서 으히히 웃었다. 내가 이상해 보일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가벼웠다. 쓸데없는 수다를 떨었던 시간들, 소녀들처럼 호들갑스럽게 나누던 연애 얘기들, 그리고 순수한 걱정의 순간들이 모두 다 뿌듯했다. 


그런 기분을 뿌듯하다고 하는 게 맞나? 


나는 이상한 내 감정의 정의를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확실히 무언가 뿌듯해 하고 있었다. 


"그거 알아요? 나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잔뜩 나누면서 살고 싶어했거든요. 한참 떠들고 헤어졌을 때, 집에 가는 길에 오늘 무슨 얘길 했더라? 하는 그런 거 있잖아요. 분명히 열심히 이야기했고, 다들 열 올리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돌아갈 땐 아무것도 남지 않는 얘기들."


"아, 그런 거 있죠. 보통 친구들을 만나면 그렇잖아요. 영양가 없는 얘기들만 하면서 낄낄 거리는 거."


경서가 공감했다. 


"네! 그거. 영양가 없는 얘기들."


"그게 좋았어요?"


"네. 너무. 나는 내가 영양가 없는 얘기들을 하게 될 줄 몰랐거든요. 그게 꿈이었다고 하면 이상해 보이겠죠?"


"응. 너무."


경서가 나 말투를 따라하며 놀리듯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보통은 그런 만남이나 대화를 나누고 나면 허무해 하죠."


"허무한 것에 집중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죠?"


"늘 그렇게 사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는 알죠."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와 난 다르다. 같아지려고 할 노력 생각도 없지만 그게 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느끼게 된다.


"그래도 세련씨가 좋아하는 거라면 언제든, 얼마든지 해요. 그건 괜찮을 것 같아요."


경서가 내 뺨을 슬며시 만지며 말했다. 그의 눈빛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근데, 그렇게 자주 할 수 있을만큼 한가롭지는 못한 일상이라서요. 언니가 카페를 정리하면 어떻게 해야할지 나도 이제 고민해야 될 거 같아요."


"먹고사니즘 문제?"


먹고사니즘 문제.

언니는 잠시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오래는 아니지만 아주 잠깐은 잊고 살아도 될 만큼은 벌어놓았다고도 했다. 그 상태가 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지만, 이라고 하며 멋쩍게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오래 걸려도 어쨌거나 도달은 했으니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아주 잠시 그녀를 부러워했다.


"그래서, 벗어나서 뭘 할건데? 그냥 멍때리기?"


윤하선배가 물었다. 아무것도 잊고 살 필요 없는 사람은 여유가 생길 때 무엇을 할까? 하루가 온통 여유인 사람의 여유는 뭘까? 나는 윤하선배의 벗어남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벗어나야 할만큼 쌓아 두지 않았을테니.


"여행갈거야. 꽃 배우러."


"꽃? 뭔 꽃?"


선배는 전혀 예상 못한 소리에 얼굴을 잔뜩 찌뿌리며 되물었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는 표정이었다.


"프랑스에서도 잠깐, 영국에서도 잠깐, 조금 더 여유가 된다면 벨기에에서도 잠깐. 거기에 진짜 한번 만나 보고싶은 플로리스트가 살거든. 사진 보여줄까? 그녀의 꽃이 얼마나 예쁜지?"


윤하 선배는 그야말로 벙찐 표정이었고 핸드폰을 들이민 언니의 눈은 반짝였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되고 저런 얼굴을 한번이라도 봤던적이 있었나 싶었다. 선배는 됐어, 하며 전화기를 손으로 치웠다.


"갔다 와서 뭐 하게? 이번엔 꽃집이라도 하려고?


"아니, 절대 꽃은 안 팔거야. 커피 팔다가 커피까지 싫어진 참인데 꽃까지 싫어하게 될 순 없어. 좋아하는 걸 돈 때문에 싫어하게 되는 일은 이제 그만 하고 싶어. 나이들 수록 좋아하는 것도 점점 없어질텐데."


"그럼?"


"그건 그냥. 정말 좋아해서 해보려고 하는 거야. 죽기 전까지 내가 스스로에게 좋아하는 것만 해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냐 싶어서."


"욜로가 되시겠다? 유행도 다 지난 이 시점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뭐 그런 거겠지. 근데 꼭 뭔가 그렇게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싶은 건 아니고, 오래 참은 내가 대견해서 선물을 주고 싶은 거야. 너도 백 사잖아. 뻑하면, 무슨 날입네 하면서. 난 나한테 빽 대신 꽃을 사줄라 그런다."


윤하선배는 백 얘기까지 나오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우리 중 가장 유복한 가정에서 알뜰히 보살핌을 받고 자라, 우리 중 유일하게 사회적 통념에 가장 근접한 삶을 살고 있는 여자의 눈에는 그녀의 친구가 꽤 걱정스럽게 보이는 듯 했다.

그녀에게 우리는 가진 것도 하나 없으면서 큰 대책도 없고, 꿈이 있다곤 하지만 그다지 열정적이지 않고, 열정보다도 재능은 별 볼일 없는, 근심스러운 지인들이었을 것이다. 

그게 인생이 공평하다는 뜻이 될 수 있을까? 걱정 근심 없는 그녀의 삶에도 어떻게든 걱정과 근심이 피어난다는 것.

자신의 삶도, 가족 친지들의 삶도 별 다른 문제가 없으니 아끼는 주변 사람들이 걱정스러워진다는 건 인생의 평균이 어떻게든 맞춰진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먹고사니즘도 고민해야겠죠. 다시 과외 알바를 구해볼지, 진주 작가님께 다른 작가님 소개를 받아 스토리 작가 일을 더 해 볼지, 아니면 집 근처에서 편의점 알바라도 하면서 글을 써서 출판사에 투고를 계속 해 볼지. 나 정말 오늘까지만 열심히 놀고 새해 부터는 고민하고 결정할거에요."


나는 씩씩하게 웃으며 경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 나도 그의 부러울 것 없는 인생에 하나의 작은 근심거리가 되려나?

정말,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제발 윤주에게와는 조금은 다른 짐이 되길. 내가 그를 조금씩 적시는 검은 물 같은 근심거리가 되진 않길 바랐다. 






Three of Batons (세개의 막대기): 안정적, 가정의 화목, 새로운 도전의 기회,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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