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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Oct 25. 2024

망령




**브런치 북은 한 권당 30개의 챕터만 발행이 가능한 관계로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30화까지를 1권으로 발행하고 31화부터 '타로카드 읽는 가게2'로 발행됩니다. 놓친 이야기가 없도록 마야의 브런치 구독을 꼭 눌러주세요! https://brunch.co.kr/@mayaflor  **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타로카드 읽는 가게 1권 30화: https://brunch.co.kr/@mayaflor/173

 






경서는 크리스마스 직후, 올해의 마지막 스키를 타러 스키장으로 떠났다. 나와 사귀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사고에 가까운 갑작스러운 이벤트였고 연말, 연초면 스키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기에 이미 오래전부터 잡혀있는 일정을 틀기가 쉽지 않은 듯 했다.

떠나기 전 나에게도 함께 가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전혀 엄두가 나질 않았다. 스키를 못 타는 건 둘째치고 알지도 못하는 장비를 빌리는 일, 거기까지 갔다가 오는 일, 그리고 제일 신경쓰였던 건 마음껏 속도를 내며 활강하고 싶은 그를 붙들고 평생 스키 폴대 한번 잡아본적 없는 나에게 지루한 스키강습을 시켜야 할 내 마음의 불편함이 주된 이유였다.

'오늘부터 1일'을 선언한 다음 날부터 일주일이나 얼굴을 볼 수 없는 애인의 부재는 새 여자친구가 삐지고 토라져도 흠이 될 것 없는 일이었기에 경서는 아주 살짝 내 눈치를 보며 그래도 같이 가서 스파라도 즐기면 되지 않겠냐고 한번 더 권했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 다만 혹시라도 전 여친을 다시 만난다면 꼭 새로운 연인이 생겼음을 은연중에라도 티 내달라 부탁했다. 그건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럼 우리 커플링이라도 할까?"


경서가 내 손가락을 매만지며 물었지만 그다지 진지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떠나는 길에 집앞에 잠시 들러 내 얼굴을 보러 온 거면서 반지는 무슨 반지. 지금 당장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 이렇게 실없는 그의 농담에도 익숙해져야 하겠지. 별 생각없이 던지는 이야기는 못들은 척 하거나 똑같이 퉁 하고 튕겨버리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뭐 할 거에요? 나 없는 동안?"


경서는 조수석에 앉아 있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내 귓가에 입술을 부비며 속삭였다. 


"우리 일을 할 거에요. 내가 다 끝나야 경서씨가 시작할 수 있으니까, 전체 이야기를 다 정리하고 다듬어 둘게요. 돌아와서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나는 계약관계의 협업자로서 대답했다. 그는 그런 내 반응이 조금 차가웠는지 안고 있던 내 어깨를 풀어주었다. 


"책 잡히고 싶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누구에게?"


경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구에게든."


나는 경서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손으로 쭉 밀었다. 내 손바닥에 그의 얼굴이 뭉개져 밀리다가 길게 뻗은 팔 사이의 빈틈으로 고개를 쑥 집어 넣더니 내 품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연인들간의 가벼운 장난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낯설었다. 단순히 말 한마디로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지만 서로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이 무례하지 않은, 오히려 친밀함의 당연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나는 어색하게 그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고 다시 그를 내 품에서 밀어냈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 내가 어색함을 느낌다는 걸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라면서.


......연인과의 관계는 어떤 속도로 진행되어야 하는 걸까?


나는 윤주와의 처음을 기억해 보려고 했지만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자꾸만 헤어진 애인과의 지난 경험을 더듬어 보고 싶진 않았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연애 경험이 없던 내가 참고할만한 것이 없었다. 이런 것들을 천천히 배우기에 이미 너무 어른이 되어 버린 나는 자연스럽게 현재의 흐름에 몸을 맡길 줄 모르는 뻣뻣한 통나무 같았다. 자연스럽게 그 상황에 몰입을 하지 못하고 자꾸만 어떻게 했더라? 어떻게 해야 하는 거더라?만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이번엔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무슨 생각해요?"


경서가 내 볼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그는 내게 아주 관심이 많아 보였고 원래부터 내가 그의 애인이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너무 많은 생각은 접어둬요. 생각은 일할 때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나이 먹은 티를 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우리가 못난 연인이 되는 것도 걱정하지 말고요. 서로에게만 좋은 애인이면 되잖아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적인 연인이 될 필욘 없지."


내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는지 경서가 덧붙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경서도 나를 따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손가락에 깍지를 낀 채 손 끝으로 내 손등을 살살 훑었다. 목 뒤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났다. 









12월 31일엔 돌아올테니 그때까지는 일을 마무리 하고 자기와 못 다한 데이트를 하자는 말을 남기고 경서는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러 떠났다. 나는 집 앞에 서서 떠나는 그의 차 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누군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 일상에 추가된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떠올려 봤다.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도 안났다. 엄마가 출근하는 것을 보던 어린 날의 그때 쯤?

웃풍이 심한 방안은 바깥 만큼이나 싸늘해서 나는 입고 나갔던 외투와 목도리는 풀지도 않고 작은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렌지 위에 올렸다. 찬장 안에서 믹스커피 스틱 3개를 꺼내어 한 컵에 촤르르 촤르르 쏟고 금방 바르르 끓어오른 물을 조심 조심 컵 안으로 옮겨 부었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며칠 전 사다 둔 식빵을 하나 꺼냈다. 조금 딱딱하긴 하지만 살짝만 녹으면 먹을만할 것 같았다. 따끈한 김이 모락 모락 올라오는 머그 잔 위에 빵을 뚜껑처럼 덮어 들고 노트북을 펼쳐 놓은 상 앞으로 갔다. 벌써 이틀이나 글 한 줄 안 쓰고 덮어 두고 있었다.


연애 한다고.


그 말이 주는 비현실감에 헛 웃음이 나왔다. 끊임없이 내 처지를 비관하면서, 내 능력 없음에 지긋지긋해 하면서 결국 또 연애를 한다고 글쓰기며 뭐며 다 미뤄뒀다. 애정과 관심이 없이는 조금도 살 수 없는 떼쓰는 아이처럼 굴던 엄마가 떠올랐다. 도대체가 이렇게나 지겨워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다니, 이제는 내 자신이 징그러울 정도였다.


나도 그런 사람인가?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엄마의 핏줄인가? 


오래된 노트북이 느릿 느릿 부팅되기 시작했다. 천천히 화면이 뜨고, 또 천천히 바뀌고, 비밀 번호 하나 하나가 천천히 화면에 찍히고, 또 오래 기다려 바탕 화면이 떴다. 혹시나 이 오래된 노트북이 말썽을 일으킬까 무서워 원고는 노트북에 저장하지 않고 진주가 공유해 준 클라우드에 바로 써서 올렸다. 그는 내가 한 편 정도 미리 써 둔 것을 읽거나 옆에서 실시간으로 쓰고 있는 것을 보다가 클라우드 파일에 바로 코멘트를 남기기도 하고 따로 메모해 두었다가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앞으로 며칠 간은 그의 피드백 없이 글을 써 쌓아둘 것이다. 그는 돌아와서 보고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나는 다시 그를 생각했다. 일상적인 일을 해도 자꾸만 그에게로 생각이 달려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조금 말랑해진 식빵을 뜯어 커피에 푹 적신 뒤 입에 넣었다. 그는 나에게 늘 '조금 더 과감해져도 되겠는데요'라던가, '조금 더 쎄게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요?' 같은 말을 했다. 그 달큰하고도 살짝 쌉쌀한 맛을 느끼며 빵을 입에 물고 글을 써 내려갔다.

모든 것이 소재가 됐다. 윤하선배의 집에서 나눴던 이야기, 호텔 라운지 바에서의 바보 같은 이야기, 밤에 혼자 떼어 본 카드, 보호소에서 만났던 막내의 꿈......

하지만 모두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개개인 각자의 고뇌와 아픔, 좌절은 있었지만 드라마가 되기엔 너무 작고 평범한 에피소드들일 뿐이었다. 내 안에서는 모두가 사건이고 사고고 일생일대의 결정인데 그것을 바깥으로 꺼내어 보기 좋게 다듬고 정리해 보면 그냥 그런 일상이 된다.

누군가 보고 흥미로워하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하려면 적어도 열일곱에 나를 낳은 엄마와, 아비가 모두 다른 동생 셋을 가지고 있으며 13년이나 사귄 연인의 부모의 반대를 겪다가 찌질하게 헤어지고 모두와 연을 끊고 나온 어떤 여자라는 설정 쯤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조차 자신을 흔드는 그 모든 삶의 파편들을 정리하고 보니 평범한 일상만 남게 되었다.

운 좋게도 꽤 귀여운 연하의 남자 친구를 만나 오늘부터 1일이라는 선언을 통해 깃털처럼 가볍게 연애를 시작하고, 나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달콤함을 느끼며 앞으로 어디를 가고 무슨 맛있는 것을 먹을까 하는 고민이나 하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그가 나에게 끌렸던 나의 매력 중 하나는 내가 떨치고 나왔던 그 축축하고 끈적하고 어두운 과거의 그림자 덕분이었다. 불량식품처럼 자꾸만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건 내가 숨기고 싶고 버리고 싶었던 그것 때문이었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라면 그걸 버린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 걸까?


나는 이제 그만 내 드라마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시시한 고민을 최고 강도로 가진 사람으로 살고싶은데. 그러면 나는 불행마저도 가지지 못한 무매력, 무재능한 맹탕의 인간이 되는 걸까?

미지근해진 커피를 끝까지 쭈욱 들이키며 나는 이 요상한 결론에 도달했다. 

불행 속에 살고 있을 때는 그게 내 악세서리인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이제 조금 떨어져 보니 그게 내가 가진 재산 중 하나였을 수도 있더라는 말도 안되는 계산을 마친 내가 혐오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그럼 이제 나는 가진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지 않나 하는 근거 없는 두려움도 함께.









"아.....빠?"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아기보다도 어색하게 아빠를 발음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당연히, 나는 아빠라는 말을 아줌마나 아저씨 보다도 불러 본 적이 없으니까. 윤주 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응. 아빠. 아빠 찾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


"......"


얘가 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몰라 눈만 꿈뻑였다. 아빠라는 것이 있고, 그런 사람을 내가 찾을 수 있으며, 그러면 그게 나에게 아빠가 있다는 뜻이라는 건가?

모든이에게 엄마가 있는 것처럼 아빠가 있다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나의 아빠'라는 말은 그렇게 당연하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한번도 아빠가 없었고 엄마도 내게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 뿐 아니라 나의 다른 동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동생들도 태어날 때부터 엄마만을 가진 존재들이었고 자랄 때 역시 그랬다. 세상 전체를 보면 모두가 엄마와 아빠를 가지고 있는 게 당연했지만 우리집만 보면 아빠를 가진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의 눈에는 아주 불균형하고 비정상적으로 보였겠지만 그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우리에겐 그 세계가 '당연'한 상태였다.


"왜?"


내가 물었다. 


"아빠가 살아 계시다면 널 보고싶어할 수도 있고, 네 존재를 아예 모르고 있다면 알려드려야 하는 걸 수도 있잖아."


윤주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난 그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았어. 사실 지금도 그게 왜 당연한 건지 잘 모르겠어.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안 떨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가 비정상적이라는 건 느꼈다. 모두가 그렇다고 하는 세상에서 나만 아니면 그건 내가 이상한 거니까.


"생각 해 볼게."


그냥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한번 입 밖으로 아빠를 들먹거렸던 건 집을 나오기 바로 전 날이었다. 나만큼이나 아빠라는 단어를 어색하게 말하던 엄마의 반응이 윤주가 내게 아빠를 물었던 날 같았을까? 윤주는 왜 내게 갑자기 아빠를 찾아보지 않겠느냐고 했던 걸까? 어쩌면, 어쩌면 윤주는 뭔가 부족한 나를 완성해 보려고 노력했던 건 아닐까? 이것이 채워지면, 이것이 생기면 내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고. 그는 나를 늘 안쓰러워 해지만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달려나가도록 채찍질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세련아, 조금만 더 해 봐. 세련아, 이번엔 이렇게 해 보자......

이제는 그에게 물을 수도 없지만 그의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대답하고 싶었다. 


아니, 아빠를 찾고싶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

아빠가 나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나를 보고싶어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본적 없어.

윤주야, 나는 많은 것이 빈 상태로 세상에 던져졌어.

아빠도 없었고,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없었어.

어쩌면 나한텐 엄마도 없었던 건지도 몰라.

지금와서 그들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은 안들어.

가져본적 없으니까 사실 생각보다 간절하거나 허전하지 않아.

넌 내가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진짜 가졌던 건 너 하나 뿐이었어.

그것 또한 이젠 지나갔지만.


그리고 문득, 잠이 깼다.

열심히, 억지로 쥐어짜내며 몇 자 적다가 책상에 엎어진채로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방안에는 노트북 화면만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그 이야기를 했던 윤주의 꿈을 꿨던 건지 모르지만 오래된 어린 시절처럼 아련하고 멀리,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있는 기억처럼 느껴졌다. 그게 진짜 있었던 일인지, 그냥 내가 머리속에서 상상해낸 건지 경계가 모호한 그런 기억처럼.

휴대 전화를 보니 두시간쯤 그렇게 잠들어 있었던 듯 했다. 부재중 전화 한통과 몇개의 메시지 알림은 모두 경서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노트북 화면에 띄워진 클라우드 원고 파일에는 진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세련씨 많이 썼어요? 왜 전화 안 받아요? 작업하다 말고 어디갔어요? 보고싶은데.


나는 원고에 대한 의견을 적어 놓는 곳에 사적인 메시지를 남긴 걸 보고 화들짝 놀라며 지웠다. 거의 우리 둘만 보는 파일이라고 해도 사무실에 공유되어 있는 클라우드에 이런 걸 남기다니 철이 없다고 해야할지 부끄러움이 없다고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더 남겨 놓은 사적인 이야기가 없는지 최근 원고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피고 경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걱정했잖아요. 왜 전화 안 받았어요? 메시지에는 왜 답 안하고요."


통화연결음이 다 울리기도 전에 경서가 받더니 와다다 쏘아댔다. 


"잤어요. 잠들었었어요. 잘 도착했어요?"


"응. 무사히 도착했어요. 이미 낮에 한참 타고 잠깐 쉬다가 저녁 먹고 야간 스키 타러 또 갈거에요."


"힘들지 않아요? 그렇게 너무 혹사시키면 몸살 날지도 모르잖아요."


"어, 지겹게 타고 빨리 돌아가고 싶어지게 하는 중이에요. 이미 벌써 조금은 그런 마음이 들고요."


나는 경서의 생각이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좋아하는 건데 왜 지겨워지게 해요. 두고 두고 즐겨야죠."


"세련씨를 두고 온 게 후회되서요. 사실 출발하면서부터 괜히 왔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오지 말고 세련씨 얼굴이나 보고 있을 걸 그랬어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하지만 나는 그의 뻔뻔함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나도 그처럼 뻔뻔한 연애타령을 할 수 있을까? 해보고 싶다. 


"그러게요. 나도 가지말라고 할 걸 그랬어요. 그냥 나랑 밤새 같이 있자고 할걸. 이렇게 보고싶을 줄 알았으면요,"


"......"


과감히 질러 본 내 말에 경서가 아무 대꾸가 없어서 조금 민망해졌다.


"왜요?"


"오. 그냥. 심쿵하게 만들어서."


심.쿵.

귀여운 말이라 나도 그를 따라 가슴이 콩쾅콩쾅 뛰었다. 나도 이런 걸 할 줄 안다. 나도 이런 말을 할 줄 알고 이런 감정에 완전히 빠져볼 줄 안다. 그 기분이 더 설레었다. 








퉁퉁퉁퉁 -


누군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이 집에는 벨이 없어서 밖에 있는 사람은 문을 두드려야 하지만 나는 찾아올 사람도 없고 더군다나 새벽 한시가 넘은 시간에는 더더욱 올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소리는 가벼웠지만 뒷목이 쭈뼛 설만큼 오싹했다.


퉁퉁퉁퉁 -


아무도 없는 척 해야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창문이 잘 잠겨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현관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두려워 하지 않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목소리로.


"나에요."


경서였다. 하지만 그가 지금 이 시간에 지금 여기 있을리 없기 때문에 나는 더욱 무서워졌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우물거리며 문 앞에서 서성이는데 경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진짜, 나에요. 문 열어줘요. 너무 추워요."


전화기를 내려다 보고 '진주 작가'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헐레벌떡 문을 열어주었다. 차가운 바깥 바람과 뜨끈한 몸의 열기를 한꺼번에 내뿜으며 경서가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그는 엄살부리는 아이처럼 아 추워! 라고 하더니 문간에 서 있는 나를 와락 껴 안았다.


"왜 여기 있어요? 왜 왔어요?"


"보고 싶은 걸 보러 왔죠."


경서가 자신의 차가운 기운을 털어버리려는 듯 내 등을 크게 쓰다듬으며 힘을 줘 더 꽉 안았다. 갑작스러운 압력에 숨이 훅 막혔지만 누군가 단단히 나를 붙들고 안은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내가 그대로 온 몸에 힘을 뺀다해도 쓰러지거나 주저 앉지 않고 그대로 꼿꼿히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그의 몸을 데워주듯 껴안은 그의 등을 문질문질 쓰다듬었다. 

보고싶은 걸 보러 왔다는 말이 듣기 좋았다. 나를 보고싶어서 누군가 먼 길을 한 걸음에 달려 오는 그 마음을 다시 느끼게 된 것이 기분 좋았다.


"다시 말해 줘요."


"뭘?"


"왜 왔어요?"


으음~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알겠다는 듯 경서가 뜸을 들였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여전히 꽉 껴안은 채 둥가 둥가하듯 양 발을 왔다 갔다 했다. 그 바람에 그의 품에 잡힌 나 역시 어설픈 브루스라도 추는 사람처럼 양 발에 번갈아 가며 무게 중심을 옮기며 덩실거려야 했다. 


"우리 꼭 춤 추는 거 같지 않아요?"


경서가 귓가에 속삭였다. 귓가에 닿는 입김은 따뜻하고 내 코를 묻은 그의 목덜미에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한 밤중에, 주변은 조용하고, 온통 어둡고, 경서가 몰고온 새벽 외풍은 정신이 확 들만큼 차가웠지만 내 두 뺨은 당황과 부끄러움에 뜨거웠다. 냉탕과 온탕에 몸을 반반씩 나눠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정신이 번뜩 드는 동시에 사르르 녹아드는 기분.

윤주와의 연애가 답답한 내 현실 속에서 가끔 숨 쉴 틈이 되어줬다면 경서와의 연애는 어떨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어리고, 나보다 즉흥적이며 나보다 짖궃었다. 또한 나보다 솔직하고, 나보다 거침 없었으며 나에겐 조심스러워 보였다. 윤주와 만날 때의 나는 숨쉴 틈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발이 땅에 붙어 있었다.

아니, 열심히 잠영을 하다가 한번씩 입에 꽂히는 대롱 같은 것이었다. 몇 번 숨을 훕훕 들이마시고 나면 다시 저 깊은 물 속으로 꾸역 꾸역 들어가야 했다. 다시 숨이 콱 막힐 때까지.

지금의 나는 어떻지?

경서와 함께 있는 시간은, 경서와 마주보고 있는 동안은 발이 살짝 땅에서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 왈츠를 추는 몸치처럼 한번씩 발이 허공에 있었다. 좋으면서도 조금은 두려웠다. 이러다 두 발 다 땅에서 떨어지는 건 아닌가, 그랬다가 정말 쾅 하고 주저 앉게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때 나를 꽉 잡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할 필요 없는 걱정이 스멀스멀 저 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이제 정말 아무런 걱정도 없는 건지 정말 호강에 겨워서 쓰잘데기 없는 불안에 발목이 잡히나 싶었다.


"보고싶어서 왔어요. 보고싶을 수 있을 때 볼 수 있고, 보고싶을 때 보고싶다고 얘기할 수 있어서 참 좋아요."


경서의 목소리가 귓가에 연기처럼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고 서로를 탐닉했다. 그 모든 것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낯선 서로의 몸에 서툴러 웃음이 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했지만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이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내 몸처럼 느껴질 손가락과 입술과 혀, 다리가 각자 나뉘었다가 만나고, 감기고 풀어지는 그 과정이 자연스러워서 좋았다. 우리는 매우 열정적이었지만 홍차 속에 슬며시 녹아드는 크림처럼 부드럽게 서로에게 풀어졌다.

나는 발끝을 더듬어 땅에 발을 디뎌야 할지 계속 구름위에 떠 있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어떻게든 되겠지. 결국 누군가는 남겠지. 아무도 남지 않는대도 나 하나는 남겠지. 그때의 외로움은 그때 다시 생각하자. 지금은 나를 보고싶어 나를 찾아 온, 내가 보고싶어 한, 내가 선택한 감정을 믿어보자.

그리고 순간, 놀랍게도 엄마가 다시 떠올랐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그냥 그대로 나를 맡겨버리고 싶은 이 환상이, 엄마가 겪었던 그런 순간들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그저 모든 순간 충실했을 뿐인데 그 결과가 나라는 불행이었던 건 아닐까. 정말 온 인생이 불운하게도 그 결과물들이 내 동생들로 이어진 건 아니었을까.


아니, 경서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거야. 그 남자들처럼 그런 사람은 아닐거야.


나는 눈을 꼭 감고 엄마를, 나를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내가 엄마보다 특별히 더 뛰어난 사람이거나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데. 나는 이미 윤주와의 관계에서 실패했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열심히 했어도 실패했잖아. 


꼭 감은 눈꺼풀 위로 나를 쳐다보던 윤주의 부모님과 쩔쩔매는 윤주의 얼굴이 피어올랐다. 분명 다 잊어버렸던 것 같은데. 이제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또 내 발목을 잡아. 왜.


"기분이......안 좋아요?"


서로에게 집중하다가 내가 갑자기 축 늘어져버리자 경서의 움직임도 멈췄다. 우리를 둘러 싼 기적같은 열기와 흥이 순식간에 깨어졌다. 우리가 잠시나마 만들었던 뜨거운 보호막에 금이 가자 그 틈으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스물스물 피어나는 드라이 아이스처럼 막을 틈도 없이 마구 쳐들어왔다. 몸이 떨려왔다.


"추워요."


내가 갑자기 오들오들 떨자 경서는 이불을 당겨 내 발끝부터 턱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고 자신도 그 안으로 들어와 나를 품어주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얇게 입어도, 날이 아무리 추워도 추위에 지지 않는 뭐 그런 재질로 만들어진 인간 같았다. 내 차가운 손과 발이 그를 놀래키거나 닭살돋게 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의 목을 끌어 당겨 따끈하고 부드러운 맨살을 부볐다. 나를 녹여주길. 내 마음 속의 그것을 녹일 수 있게 해 주길 바라면서. 타인에게 그것을 기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면서도 그 밤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The Devil (악마) : 욕심, 욕망, 소유욕, 집착, 속박 등. 욕망에 따라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하기 싫은 건 쳐다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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