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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정 maya Oct 11. 2024

거침 없이 달려 볼게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브런치 북은 한 권당 30개의 챕터만 발행이 가능한 관계로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이 편까지 30편을 1권으로 발행하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2권으로 나뉘어져 발행될 예정입니다. '타로카드 읽는 가게2'를 계속 해서 읽으실 수 있도록 마야의 브런치 구독을 꼭 눌러주세요! https://brunch.co.kr/@mayaflor  **













경서는 낡은 종이 지도를 거실 바닥에 펼쳐놓고 이곳 저곳을 손으로 짚으며 자신이 다녀온 곳들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우리는 함께 바닥에 퍼질러 앉아 그 지도의 이곳 저곳을 함께 쳐다보고 그가 묘사하는 장면들을 상상했다. 솔직히 어떤 이야기는 재미있고, 어떤 이야기는 지루했지만 나는 그가 푹 빠져서 설명하는 표정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접힌 선과 모서리 부분이 낡아서 조금만 풀럭거려도 여러 낱장으로 떨어질 것 같은 지도는 투명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 낡고 큰 종이 지도를 중학교때부터 간직해오고 있다고 했다. 

다녀온 곳은 컬러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있었다. 어떤 나라는 나라 이름에만, 어떤 나라는 작은 도시들까지도 색색의 동그라미를 품고 있었다.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 일본 같은 나라는 한 곳에 동그라미가 여러개 쳐져있기도 했다. 어릴 때는 그냥 지도에 동그라미가 치고 싶어서 여행을 떠났던 적도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가장 신기했다. 


"여행을 왜 좋아해요?"


내가 묻자 진주, 아니 경서는 음......하며 고개를 갸웃 꺾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진주로서가 아닌 경서의 얼굴을 들여다 보려고 했다. 내가 처음 스쳤던 진주, 만나기 전 상상하던 진주, 인사를 나누던 진주, 함께 산책을 하던 진주, 화를 내고 받아주던 진주와 나를 쓰다듬던 안쓰러운 눈길을 던지던, 도발적인 질문으로 당황시키던 경서를 그의 얼굴에서 보았다. 


"돌아갈 곳을 그리워 하는 기분이 좋아서?"


"......돌아올 곳을 그리워 하고 싶어서?"


경서는 지도 옆에 엎드려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며 응. 이라고 작게 대답했다.


"마치 너무 순탄한 일상이 지루해서 일부러 위기와 우울을 만들고 그걸 즐기는 것 같네요."


"아, 우리 할머니 말로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싼다는 거군요."


진주가 장난스럽게 히히히 웃었다. 나는 그게 그렇게 웃기지 않았다. 그건 혀를 끌끌 차며 해야 할 이야기이지 낄낄거리며 할 얘기가 아니었으니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평생 무언가를 그리워 하는 감정의 결핍 속에서 살았어요. 남들이 보기에 내 삶이 부족한 게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리움이 없는 삶을 산 셈이죠."


"정말 호강에 겨웠네요."


"맞아요. 호강에 겨운 삶. 하지만 산다는 건 그렇게 단순 하지 않아요. 알잖아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의 의견에 동의 하기엔 내가 그 반대의 삶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삶은 단순하지 않지만 때때로 어떤 삶은 단순해지기도 한다. 인간은 결국 동물이기 때문에 생존이 위협을 받으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사라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 하나만 남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야 한다는 것만 남아있는 삶 속에 잠식 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쓰며 살았다. 살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이긴 했지만 속으로는 안돼, 안돼, 하며 잠기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발버둥을 치는 것도 시간이든 힘이든 뭐든 남아도는 게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서 사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늘 내게 일깨워주는 정도 뿐이었다. 


"모든 것이 채워지면 반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돼죠. 아무것도 없으면 원하는 것이나 필요한 것을 하나씩 하나씩 채워가면 되지만 이미 채워져 있으면 느낄 수가 없어요. 공허해요. 비어있기 때문이 아니라 빈 곳이 없어서. 채워진 덩어리가 그 자체로 하나의 큰 구멍이 되는 거에요."


나는 내 마음 속에 뚫린 크고 작은 수많은 구멍들을 떠올렸다. 차가운 바람이 오고 가는.


"자기 자신이 공허의 덩어리가 되면 삶은 껍데기가 될 수 밖에 없어요. 그리고 난 이미 내 주변에서 공허가 되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봤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나처럼 발버둥치며 사는 친구들도 많이 봤고요."


경서가 묘사하는 삶이 내가 오랜동안 추구했던 삶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로움도 없고 괴로울 것도 없는 삶. 인생의 그래프가 언제나 조금 높은 곳에서 안정적인 수평선으로 이어지는 삶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곧 공허라니. 호강이 곧 공허라는 말처럼 공허하게 들렸다. 우리는 그저 서로의 삶을 부러워 하는 결핍된 자들일까?


"우리는 서로를 채워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겠죠. 이제는 내 그리움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가 될 수도 있겠고."


경서는 나와는 정반대로 우리의 관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릎을 끌어 모으고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내 무릎에 머리를 올렸다. 마치 강아지처럼.

그는 그렇게 잠시 나를 올려다 보다가 고개를 돌려 내 무릎을 베고 내 허리를 끌어 안았다. 우리는 둘 다 웅크린 강아지들처럼 꼭 붙어 엉켜있었다. 그렇게 있으니 모두 불쌍하고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꼭 이걸 물어보고 싶었다. 왠지 이번에는 그걸 꼭 하고 싶었다.


"우리,"


"우리......?"


"우리 오늘부터 1일, 이에요?"


잠시 멈칫하더니 곧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가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뜬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곤 정말 크고 환하게 와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말그대로 박장대소를 하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몇번이고 반복했다. 가만히 있던 나는 그의 웃음이 길어질수록 기분이 사르르 나빠져서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윽고 내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없어지다 못해 당장이라도 버럭 화를 낼 정도가 되자 진주, 아니 경서는 웃음을 멈췄다. 이제서야 내가 농담이 아니란 걸 안 것 같았다. 


"우리는 오늘부터 1일, 이에요."


그리고 예고도 없이 내 뒷 목을 끌어 당겨 곧바로 내게 입을 맞췄다. 나는 아까 괜히 '마늘 많이'라고 했다고 생각했다. 이럴 줄도 모르고.









경서가 놀라길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최소한으로 상처받길 원하는 삶을 지향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나를 숨겼고, 들어내야 할 때는 몰아쳐서 아예 처음부터 떨어져 나가버리게 만들었다. 보통은 숨기는 쪽을 선택하고 더이상은 숨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드러냈지만 이번에는 반대가 되어 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래도 괜찮아? 이래도 놀라지 않아? 하는 유치한 열등감이 또 발동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경서가 데려다 주겠다고 했을 때 이번엔 거절하지 않았다. 내가 사는 동네를 보고도, 내가 사는 집을 보고도 괜찮아? 놀랐다면 알려줘. 나도 한 발 물러날게, 하는 그런 마음.

집으로 출발 하기 전, 우리는 그의 거실에서 오랫동안 천천히 입을 맞췄다. 가쁜 호흡과 나긋한 숨소리가 음악처럼 흘렀다. 몰아쳤다가 늘어졌다가 다 삼켜버릴 듯 끌어당겼다가 끝도 없이 빨려들어갔다.

그 설레는 분위기와 두근거리는 마음은 몇년 만에 느껴 본 소중한 감정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나를 그 흥분 속에 맡겨버리고 싶었다. 그게 더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입을 맞추던 그가 내 스웨터 끝자락을 들어올리려고 했을 때 그 손을 잡아 멈췄다. 촌스러운 것 같아 보일지 몰라도 나는 그냥 이 감정을 조금 더 아끼고 싶었다. 더 오랫동안 느끼고 싶다고 하는 게 맞을까?

경서는 포기하지 않고 내 옆구리를 부드럽게 간지르며 스웨터 안으로 손을 넣었지만 나는 다시 그의 손을 잡아 명확히 거절을 표시했다. 경서는 내 기분을 살피려는듯 말 없이 날 바라봤다. 기분이 나쁘진 않은지, 어디 불편한 곳이 있는 건 아닌지 묻는 부드러운 눈빛이 좋았고, 왠지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눈빛으로 대답했다.

약간은 어색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으로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한번 가볍게 서로의 입에 입을 맞추고 집을 나섰다.

차에서는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우리집 주소를 말하고, 네이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맞는지 확인하고, 그리고 출발했다. 그렇게 한 동안 앞만 보며 조용히 있던 경서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내 앞의 글러브 박스를 열더니 작은 사탕상자를 꺼냈다. 읽을 수 없는 프랑스 말이 멋드러지게 쓰여진, 화려하기 그지없는 새빨간의 원형 상자는 어두운 차 안에서도 눈에 띄었다. 그는 내 무릎 위에 상자를 내려 놓더니 글러브 박스를 닫고 하나만 꺼내 달라고 했다. 나는 덜컹이는 차 안에 사탕통을 엎지 않도록 조심 조심 원통상자의 뚜껑을 열고 작은 사탕 한 알을 꺼내어 경서 앞으로 내밀었다.


"세련씨 먼저 먹어요. 그리고 난 아-"


경서는 내게 사탕을 권하더니 이내 입을 크게 벌렸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운전 중이니까 손이 자유롭지 못한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그가 벌써부터 내게 애교를 부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먼저 꺼낸 사탕은 얼른 내 입에 넣고 다른 한 알을 꺼내어 아기새처럼 활짝 벌린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은은한 과일의 단 맛이 혀끝에 사르르 녹아들어오고 코 끝에는 체리향이 맴돌았다. 입 안 여기저기로 사탕을 굴리고 있는 경서의 뺨을 보니 무언가 이 남자와 입을 맞췄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왠지 당연히 그럴 것 같았던 기시감도 느껴졌다. 내가 미쳤나,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와는 계약 관계로 묶인 사이고 그는 엄연히 갑인데 센치한 말과 행동, 크리스마스라는 설레는 분위기 때문에 괜한 짓을 저지른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사탕은 세련씨에게 주려고 했던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좀 늦었지만."


내가 사탕통을 다시 글러브박스에 넣어두려고 하자 경서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뭘 선물할까 고민 많이 했어요. 너무 과하지도, 너무 시시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예의를 차리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적당히 가볍고, 너무 취향을 타지도 않고, 또 일상적으로 접하면서 내 생각을 할만한 게 뭐가 있을까 하다가 누가 그 사탕을 추천해 줬어요."


나는 섬세한 그 사탕의 향을 음미했다. 이건 아마도 아주 비싼 사탕이겠지. 동생들에게 사줬던 마이쭈랑은 비교도 안되게. 백화점에서 파는 건지도 모른다. 겨우 사탕 한 박스이면서 과하지도 시시히지도 않고 취향과 상관 없이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사탕. 


"누가 추천해 줬는데요?"


"어, 그건......"


경서가 말 끝을 흐렸다. 


"여기에서 좌회전 하면 돼요?"


"네, 그리고 100m쯤 직진하다가 작은 골목이 나오면 우회전."


나는 그가 의도적으로 말을 돌린다고 생각했다. 갈 길을 정리하고 나서도 다시 그 이야기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난 누구보다 감이 좋은 사람이니 말하지 않아도 대화가 오고가는 공기의 밀도, 말의 속도, 높낮이, 머뭇거림에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더 캐묻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물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추천은......전 여친?"


경서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가야할지 머리 속에 온갖 생각이 떠오르는 것 같았지만 사실 난 그것에 그렇게 크게 상처를 받았다거나 충격을 받진 않았다. 나는 그녀를 본 적이 있고, 그녀가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바로 곁에서 지켜봤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걔랑 스키장 시즌방 멤버거든요. 사귀기 전부터. 지난 주에 스키장에 갔다가 우연히 만나서 물어봤어요. 따로 만나거나 연락한 건 아니고. 오해하는 건 아니죠?"


경서가 다급하게 다다다다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오해? 우리 사이에 벌써 오해라고 부를만한 무언가가 생겼다면 그건 참 놀라운 일일 것이다.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들이 갖는 묘한 교집합의 시간들은 그 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늘 한 세트처럼 여겨지던 관계가 깨어질 때는 그 사이에 부스러기도 떨어지고, 다 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붙어 있는 부분이 나중에서야 발견되기도 한다. 윤주와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차라리 윤주와 내 사이를 그가 오해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 매우 천천히 서로에게서 찢어져 나왔고 내 발밑에는 그 관계에서 비롯된 수 많은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쌓여 있었으며,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과정 중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는 나와는 다르게 그녀에게 충분히 그런 것을 아무렇지 않게 물어볼 수 있는 남자였고, 그녀는 상처를 받으면서도 순순히 그것을 대답해줄 여자였다. 오히려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며, 어쩌면 이렇게라도 그와의 인연이 계속 될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 선물을 받게 될 여자가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길 바라고 있었을것이다. 더불어 사탕하나를 고르는대도 자신의 취향이 얼마나 고급스럽고 대단한 안목을 가졌는지를 과시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짧았던 순간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던 적이 있었다. 내 일은 한치 앞도 모르고 만족할 수 없는 애정을 갈구하는 그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나도 그 여자처럼 경서에게 더 큰 애정을 갈구하는 빚쟁이처럼 굴게 될까? 지금의 경서는 꽤 다정하고 섬세하다. 나는 그가 실없이 피식거리는 표정 너머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는 그 역시 나만큼이나 예민하고 감이 좋은 남자다.

나의 경우 약간의 선천적인 것과 더불어 그랬어야만 하는 후천적인 환경의 영향으로 다소 날카롭게 보여진다면 그는 그 넉넉한 후천적 환경이 오히려 무심한 매력처럼 보여지게 하는 것 같았다. 소위 요즘 말하는 나쁜 남자 같은? 내가 만약 그에게 호감을 먼저 표시했다면, 뭐든 툭 터놓고 스스럼없이 다가갔다면 내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정식으로 교제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윤주, 한 사람 뿐이었다. 서른 다섯해를 사는 동안 나와 정서적인 교감을 아낌없이 나눈 사람이 딱 한 사람 뿐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는 건 아니다. 24시간을 알바로 촘촘하고 빠듯하게 쪼개쓰던 시절 내향적인 내 성향과는 관계없이 나는 하루 종일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그 중 나를 잘 봐 준 사람, 나를 쉽게 봤던 사람, 나를 고까워하며 골탕먹이고 싶어했던 사람까지 골고루 '접근'하여 내게 어떤 인상을 남기려 했었다.

그들에게 나는 말 없이 조용하고 언제나 차분하며 근무 중 큰 일이 터져도 별 다른 동요없이 침착하게 수습을 하는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동요를 잘 하지 않는다는 점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로 하여금 어떤 승부욕을 자극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보통 그들은 내게 감정을 드러내게 하려고 했다. 잘해주기도 하고, 살살 놀리거나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짖궃게 굴기도 했다. 나는 그 낌새를 느끼면 더욱 더 동요하지 않았다. 더욱 침착해지고, 어찌 보면 조금 더 냉담해졌었다. 그러면 보통은 조금 불타오르다가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곤 했다. 

나는 그들의 투박한 자극에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았다. 그땐 그만한 여유도 없었을 뿐더러 '자, 내가 이렇게 하면 넌 이제 어떻게 할거야?'라고 내게 무언가를 던지고 반응하기를 기다리는 그 시선과 마음들이 혐오스러울만큼 싫었다. 그 가벼운 자극들이 나를 툭툭 치고 지나갈 때면 언제나 윤주에게로 달려가 바위처럼 묵직한 그의 곁에 앉아 모든 것이 다시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때의 나는 세상의 모든 자극들이 싫었다. 


"화난 건 아니죠?"


경서가 나를 흘낏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테두리에 금박이 입혀진 페이퍼깡통을 매만지며 보통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하는지 상상해 봤다. 


"화 난 건 아니고, 앞으로는 내가 받고 싶은 선물은 나에게 물어봐 주면 좋겠어요."


감이 좋은 이 남자는 모르는 척 해도 아마 내가 하는 말이 뭔지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렇게 헤어지긴 좀 아쉽지 않아요? 우리 오늘부터 1일인데."


경서가 집게 손가락을 세워 '1'을 강조했다. 귀엽긴 하지만 아마도 나를 놀리려는 게 분명했으므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날 놀리려는 생각 뿐 이 골목의 후줄근함도, 축축하고 시큼한 냄새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상대와 그 사이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즐기는 그의 집중력이 부러웠다. 


"잘가요.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크리스마스 선물도요."


나는 사탕통을 흔들며 최대한 예쁘게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선물을 준비했는데 나는 그런 생각도 못했다는 게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다음에 만나면 나도 무언가 작은 선물을 준비하리라.


"가요, 그냥? 차 한잔도 안주고?"


경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지만 나는 그것이 여전히 나를 당황시키고 놀리려는 수작임을 알았다. 하지만 더는 그의 이런 수작이 당황스럽지 않았다. 우리의 갑을 관계는 여전하지만 나는 그것을 일 할 때만 나올 수 있게 하기로 결심했다. 쉽진 않겠지만 나는 윤주와는 다른, 지나쳐간 다른 누구와도 다른 관계를 시작해 보고 싶었다.

나도 놀이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 관계를 만끽하는 연애를 해 보고 싶다, 나와 그 사람만 고민하고 즐기는 그런 연애를 나의 삶에 기록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사랑을 시작하되, 나는 갈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거쳐간 누군가와도 다르게 이 관계에 임하리라.





The Chariot (전차 카드) :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가지만 앞으로 나아갈 때 주위를 둘러 볼 필요가 있다. 애정운에는 강한 주장으로 인한 다툼, 건강 적으로는 만성피로는 위염, 소화불량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브런치 북은 한 권당 30개의 챕터만 발행이 가능한 관계로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이 편까지 30편을 1권으로 발행하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2권으로 나뉘어져 발행될 예정입니다. '타로카드 읽는 가게2'를 계속 해서 읽으실 수 있도록 마야의 브런치 구독을 꼭 눌러주세요! https://brunch.co.kr/@mayaf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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