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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Sep 13. 2024

열지 않은 열쇠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오랜만에 느끼는 개운함이었다.침대가 넓긴 했지만 성인 여자 셋이 옹기 종기 모여 잔대다가 혼자 늦게 잠들어 몇 시간 자지 못한 것 치곤 몸이 가벼워서 스스로도 믿지 못할 정도였다. 


"매트리스가 좋은 건가봐. 숙취도 없네."


벌써 씻고 나온 언니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말했다. 아직도 침대에 뭉개고 있는 건 윤하 선배 뿐이었다.


"우리끼리 조식 먹고 오자. 쟤 덕에 아침부터 호텔 뷔페를 먹는 호사를 부려 보자고."


언니가 툭 치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 쭈물 거리는데 윤하 선배가 눈도 뜨지 않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가. 가서 먹어.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대신 오는 길에 뜨거운 커피 한잔만 사다 줘."


거 봐, 하며 여전히 망설이는 나를 보며 사장 언니가 말했다.


"돈 많은 애들은 자기를 물주로 보고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을 싫어해. 어떨 때 보면 그런 사람들을 감별해 내는 레이더 같은 게 있는지 그런 애들이 접근하면 칼 같이 차단하지."


조식을 먹으러 가면서 언니가 내게 속삭였다.


"그런데 있잖아. 자기가 쓸 수 있는데 극구 거절하는 사람들도 별로 안 좋아해. 너는 윤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윤하는 너랑 꽤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런데 한번도 기대지 않았잖아. 네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혹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게 분명할 때도 그냥 너 혼자서만 끙끙거렸지."


"빚....을 지고 싶지 않아서 인걸요."


나는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그걸 왜 몰라. 알지. 무슨 마음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 그 정도 기댈 사이는 되지 않냐는 거에 네가 너무 선을 그은 것일 수도 있단 거지. 너에겐 몰라도 적어도 윤하에겐 어렵지 않은 것이었을텐데 말이야."


아니다. 언니는 모르고 있다. 빚을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대해. 왜냐면 그녀 역시 빚을 지는 입장보다는 도움을 주는 입장에 더 가까운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의 호의와 도움, 작은 친절로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마음들이 도리어 그들의 숨을 틀어 막는 돌덩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커서 갚으면 되지, 훌륭한 어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또 도우며 살면 되지, 라는 덕담 조차도 버거운 빚이 된다. 누구나 삶이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빌리고 싶지 않아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무언가를 빚진 상태가 된다. 그걸 갚을 노력을 하지 않아도 살면서 자연스럽게 갚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살면 살수록 갚아야 할것만 늘어나는 비참함을 느끼게 되는, 마이너스 베이스에서 시작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사실 그런 비참함 보다는 내가 그런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게 빚이라는 생각도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 속에서 자라왔다. 나는 엄마의 모든 것이 싫었고,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고, 그녀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녀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었지만 어떤 쪽으로든 그녀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영향을 미쳤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을 잊으려고 노력할 수록 그것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빚이 너무 많아져 어느 순간이 넘어가면 그 후에 생기는 자잘한 빚들은 더이상 신경쓰이지 않게 된다. 1000만원의 빚이 있을 때 늘어나는 500만원의 빚은 묵직하게 보이지만 1000억의 빚이 있을 때 늘어나는 5000만원의 빚은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자라는 것을 늘 경계해 왔다. 왜냐하면 엄마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매일, 매 시간 만들어내는 유형, 무형의 빚들을 봤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그것들에 대해 얼마나 무감각해지는 지도 보았다. 나는 그런 삶을 경멸했다. 한 때는 불쌍했고, 또 한 때는 그녀를 구제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경멸하고 도망쳤다. 

그 속에서 타인의 도움에 대해 예민하게 구는 것도, 자주 선을 그은 것도 사실은, 부작용이었다. 언니는 내 오래된 부작용에 대해 지적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온 반작용인지도 모른 채.

나는 별 대꾸를 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조식 뷔페를 돌았다. 빙빙.

그녀가 담는 것을 따라 담고, 그녀가 그냥 지나치는 게 있으면 나도 그냥 지나쳤다. 엄마 뒤를 졸졸 따르는 아기 오리가 된 것 같았지만 뭐가 맛있는지도 잘 모르니 그게 제일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이렇게라도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됐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을 때는 내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더듬거리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이 막연하고 두려웠다. 뷔페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는 큰 의미 없는 행위도 그랬다. 늘 태연한 척, 의연한 척, 듬직한 첫째인 척 살았지만 사실은 겁쟁이여서라는 걸 누가 알았을까? 바위처럼 묵직하게 움직이지 않는 나의 고집스러움이 사실은 무서워서라는 걸 말이다. 오랜동안 나조차도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속았으니. 


"가끔은 응석 부리듯이 살아. 적어도 윤하한테는 그래도 돼.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도 그렇고. 우린 네가 좋아."


토스터에 미리 넣어둔 빵 하나를 내 접시에 올려주며 언니가 말했다.







나는 호텔 앞에서 언니와 헤어졌다. 윤하 선배는 호텔에 남기로 했다. 형부와 하루 더 묵기로 했다고 했다. 사장 언니는 부럽다면서 선배를 놀렸지만 놀림을 받는 선배의 얼굴은 반짝거렸다. 아무리 바보 같은 사랑론을 주장한다 해도 정말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들의 빛나는 얼굴은 숨길 수가 없고, 서로에게 확신이 있는 그 얼굴과 표정을 보면 그 당당함에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호화스러운 뷔페를 아침으로 먹으며 사장 언니는 새해 연휴까지 카페를 쉬겠다고 했다. 잠깐 쉬면서 생각을 좀 정리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너무 갑작스럽게 정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녀말대로 너무 갑작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공간의 주인은 언니이고, 나는 그곳에 세들어 있는 작은 부분일 뿐이니까. 주인의 결정에 따를 수 밖에. 

호텔 앞에서 홀가분하게 내년에 보자며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언니의 등을 보며 하루아침에 기대하지 않았던 휴가가 일주일 넘게 생긴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잠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조금 멍했다. 다들 알아서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데 나만 갈 곳이 없는 것 같았다. 나도 내 집이 어딘지,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하는 고민없이 휙 돌아서 당연하다는 듯 돌아가고 싶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내내 돌아갈 곳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내 상황에 대해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나지만 그 순간만은 내 자신이 불쌍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내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말았다. 

아니, 그건 변명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집을 나온지 8개월이 넘어 간다. 35년동안 단 한번도 떨어져 보지 못한, 그러나 언제나 도망치고 싶었던 이들을 홀연히 떠나버린 것이 곧 1년이 된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절대 찾을 수 없도록 철저히 숨어버렸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나라는 구멍이 얼마나 크게 남아있을까 궁금했다. 

그들이 나를 잊길 바랐다. 원래부터 내가 없었던 것처럼, 내가 있던 자리가 구멍이 아니라 그들에게 숨통을 틜 수 있는 여유가 되길. 내가 그러고 싶었던 것처럼. 하지만 이제와 정말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역설적으로 그들이 나를 잊지 못하길 바라기도 했다. 나는 그들을 떼어내고 싶은 껌딱지 같이 여기면서도 그들에겐 내가 구제의 여신 같은 존재이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없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참 못나게도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엄마였다.

내 자취방이 있는 골목만큼이나 구질구질하고 익숙한 이 골목길 모퉁이에서 불쑥 나타난 그림자는 언뜻 엄마 같아 보였다. 취했을 때나 맨 정신일 때나 휘적 휘적 걷는 모양이, 그리고 멀리서도 느껴지는 싸구려 향수 향이 그랬다. 

엄마가 맞는지 정확히 확인하고 당당히 아는 척을 하든, 들키기 전에 내빼버리든 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좀 전까지 나를 감싸고 있던 궁금함의 열망이 무색하게도 고개가 자꾸만 숙여졌다. 머리 끝에 추를 매달아 놓은 것 같았다. 나는 언제든 옆 골목으로 빠질 수 있는 삼거리 초입에 서서 누가 봐도 수상한 여자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안절부절했다. 

엄마가, 아니 엄마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엄마인 것 같은 그 여자가 점점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50m도 넘게 떨어져 있었지만 마치 공포 영화의 귀신이 쿵쿵쿵 한번에 다가오는 것처럼 그녀가 빠르게 확대되는 것 같았다. 늘 숨 막힐 것처럼 역겹다고 생각했던 그 향수 냄새가 온 골목을 다 뒤덮을 것처럼 진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내가 느낀 향기는 분명 내 착각일 것이다. 어떤 향수를 뿌려도 그렇게 발향이 세질 수는 없으니까. 

만약 그녀가 엄마가 맞다면, 그래서 나를 알아 본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꼭 얼음땡을 하다 술래와 눈이 마주친 아이처럼 머리가 멈춰버렸다.

분명 여길 다시 찾아올 때만 해도 무언가 확인하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가족들을 봐도 냉정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결국 그녀를 5m쯤 앞둔 채 어색하게 등을 돌려 벽을 보고 서 버렸다. 누가 봐도 이상했을 것이다. 나를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이 느껴졌다. 주변 사람들의 기색에 그녀도 나를 발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점점 더 그녀가 가까워 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10초쯤 눈을 꼭 감고 벽 쪽으로 돌아서서 엄마든, 엄마로 추정되는 여자든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치는 상상을 했다. 야, 너 여기서 뭐해? 야, 너 어디 갔다 왔어? 나 지금 나가니까 애들 저녁 해 먹여. 오늘 안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애들 학교 챙겨서 보내. 야. 야. 야.

눈을 감으면서 숨 쉬는 것도 잊었는지 숨도 꼭 참았다. 나는 내가 숨도 쉬지 않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갑작스럽게 울리는 휴대전화 진동에 깜짝 놀라 오랜 잠영 후 수면 밖으로 올라온 사람 참고 있던 숨이 후!하고 터졌다.


"여보세요."


나는 숨까지 헐떡이며 전화를 받았다. 헉헉 소리가 절로 났다.


"......운동 중이에요?"


진주였다. 


"아니요. 아니에요."


나는 다급히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리 저리 둘러 보니 저 멀리, 여전히 휘적이는 걸음으로 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지금 보니 엄마인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근처 지나다가 얼굴이나 볼까해서 카페에 왔는데 닫혀 있어서요. 오늘 카페 안 열어요?"


"오늘 휴일이에요. 올해 남은 날 모두요.  내년 1월 1일까지. 2일부터 열어요."


"세련씨는 어디에요?"


"그냥 좀......어디 나와 있어요."


그렇구나. 진주가 혼잣말처럼, 무언가에 실망한 사람처럼 조그맣게 중얼 거렸다. 그렇구나.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귀는 전화기에 붙들어 둔 채 눈으로는 엄마 같아 보였던, 이제는 잘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는 여자의 뒷 모습을 쫒았다. 


"우리 내일 모레 만나기로 했잖아요."


잠시 뜸을 들이던 진주가 말을 이었다. 


"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멀어져 가는 여자의 뒷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그녀가 뒤를 돌아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했다. 


"지금 보고싶으면 어떻게 해요?"


"네?"


여자를 쫒는 눈길을 따라 흘러가던 내 영혼이 다시 고막을 통해 몸 속으로 착 들어온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뭐라고요?"


그. 러. 니. 까,

진주는 자기 얘길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듯 한글자 한글자 힘줘서 또박또박 말했다. 


"지. 금. 보. 고. 싶. 다. 고. 요. 어디에요?"







나는 길을 빙 돌아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마트에 들었다. 집과 멀기도 하고 조금 더 비싸서 여기 살던 동안은 가지 않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기 때문에 이곳이어야 했다. 늘 들르던 마트에는 나를 알아볼 만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트 사장님도 그렇고, 동네 단골들도 그렇고.

입구에 있던 바구나와 카트를 두고 고민하다가 바구니를 들었다. 짐을 들고 걸어 가려면 너무 많이 사면 안된다. 그래놓고는 바구니가 넘치게 사는 바람에 양손에 짐을 들고 다니며 쇼핑을 해야 해지만.

커다란 두루마리 휴지 한 묶음, 1+1 행사 중인 샴푸, 가장 저렴한 빨래비누, 둘째를 위한 생리대, 쓰레기 봉투 10장, 그리고 마이쭈 10개.

식재료도 살까 고민했지만 그 중 누가 요리를 할지, 할 수는 있을지 확신이 가지 않아 뺐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적어도 한끼는 급식으로 해결할테고 엄마는 집에서 먹지 않을테니. 냉장고 속에서 썩어버린 채소들을 버리는 일 역시 누구도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잡동사니들을 계산대에 올리고 계산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혹시나 누군가 나를 알아 볼까봐 땅만 보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여기서 뭐 하고 있냐는 둥, 요즘 왜 안 보였냐는 둥 한 마디를 건내는 게 싫어서였다. 하지만 나를 이 근처에서 봤다며 엄마든 동생들에게 말이 전달될 것이 더 걱정이긴 했다. 이렇게까지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면서도 나는 지금처럼 그냥 증발해 버린 사람이고 싶었다.

앞으로 한 시간 후에 카페 앞에서 진주를 만나기로 했다. 핸드폰을 슬쩍 열어 시간을 봤다. 산 것들을 집 앞까지 가져다 놓고 다시 카페까지 가려면 한 시간으로는 부족할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조금 늦을 것이다. 상관 없다. 미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늦을 것이 분명한 약속시간을 앞두고도 나는 그다지 초조하지 않았다. 그저 누가 나를 알아볼까봐, 그것만이 두려울 뿐이었다. 사실은 이것을 핑계로 늦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래, 그게 진짜 내 마음이었다.

양손 가득 생필품을 들고 멍하니 걸으면서 진주를 머릿속에서 애써 지우며 나는 엄마를, 아이들을 생각했다. 길에서 마주친 그 여자는 정말 엄마였을까?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낸 환상이었을까? 아이들은 지금쯤 학교에 있을테지. 공부는 잘 하고 있을까? 둘째는 원래부터 똘똘하고 야무진 아이이니 힘들어도 제 몫을 다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철없고 부산스러운 두 남자 아이들은 어떨지...... 

요행히 둘째 때까지는 임신 중 엄마의 흡연이나 음주가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셋째와 넷째는 둘째와는 좀 달랐다. 그러나 늦되다는 생각이 들어도 언감생심 발달 검사 같은 건 해볼 생각도 못했다. 돈이나 시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잘 찾아보면 나라에서 하는 영유아 발달 검사 같은 걸 받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혹시라도 그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을까, 그게 더 두려웠다. 엄마 조차도 신경쓰지 않는 자식들인데 괜히 문제만 밖으로 꺼내어 아무도 책임지지 못하게 일을 벌이는 건 아닐까 싶었다. 가족으로 같이 지내며 오랜동안 자세히 지켜 보지 않으면 그냥 좀 산만하고 영리하지 못한 아이정도로 보였으니까. 나만 대충 눈 감고 있으면 그냥 어딘가 칠칠맞지만 활달한 어른으로 자라 절반 정도의 몫은 하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그 아이들에게 관심도 없으면서 가끔 '얘들은 아들들이니까 자라면 날 책임이겠지' 같은 말도 안되는 희망을 드러내곤 했다. 저 아이들이 정말 '어른'으로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 역시 반쯤은 그 애들을 포기하고 있었으니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가족들 모두에게 그렇게 조금씩 선을 긋고 있었다. 살 붙이고 먹고 자며 살던 얄팍한 정과, 장녀로서의 희미한 책임감, 불쌍하고 여린 것들을 볼 때 인간으로서의 동정심이 그 선을 넘어 올 때도 있고 냉정해지면 다시 넘어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선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 

엄마를 대책없이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치를 떨던 나지만 나 또한 그녀에게서 유산처럼 물려받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숨길 수는 없었다. 내 두 손에 가득한 잡동사니들은 내가 그어 놓은 선을 넘어 온 어떤 감정이 불러들인 것이었다. 

혼합된, 혼재된 감정들에 사로잡혀 걷다보니 어느새 집 근처에 다다랐다. 다닥 다닥 붙은 다세대 주택 빌라촌의 골목은 좁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공간이 있으면 차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길 한 가운데로 걷지 않고 주차된 차에 딱 붙어 걷거나 차와 담벼락 사이 좁은 공간으로 걸으며 마치 뭔가 훔치려는 사람처럼 지나치게 주위를 둘러보고 경계를 했다. 훔치려는 게 아니라 두고 오려는 것이었지만 기분은 마치 무언가를 훔치려는 사람처럼 내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조금 떨어져서 1층 베란다를 슬쩍 넘어다 봤다. 커튼도, 블라인드도, 하다 못해 방충망도 없는 집이라 안이 아주 잘 보였다. 예상했던 것처럼 집에는 아무도 없는 듯 했다. 

주위를 양쪽으로 휙휙 둘러 본 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사람처럼 재빠르게 현관 앞까지 달려갔다. 그리곤 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 옆집에서 누가 나올까 가슴이 방망이질쳤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고요했다. 

잠시 그렇게 있는데 옆집에서 누군가 외출 준비를 하는지 문가에서 부산한 소리가 났다. 나는 옆집에서 누군가 나오기 전에 내가 가지고 온 것들을 집안에 들여다 놓을까 고민하며 잠시 문고리를 바라봤다. 아무도 가방 속 파우치 안에 집 열쇠가 있다. 쓸일이 없는 열쇠였지만 그것은 지난 몇 개월간 계속 나와 함께 있었다. 재빨리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가 물건들을 안전하게 문 안 쪽에 들여다 놓고 집꼴은 괜찮은지, 별 문제는 없는지 짧게 확인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들어가게 된다면 다시 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곧 옆집의 현관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혹시라도 헷갈리지 않도록 내가 가져간 물건들을 우리집 쪽으로 확실히 몰아 놓고, 물건들을 담은 봉투 안에 열쇠를 던지듯 넣은 뒤 후다닥 돌아 나왔다. 돌아서자마자 곧바로 내 뒤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와 쾅 닫는 소리가 났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의 뒷모습만 보았을 것이다. 수상쩍게 서둘러 떠나는 뒷모습을.

몇 시간 후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문 앞에 놓인 물건들을 발견할 것이다. 처음에는 이게 뭔지 궁금해 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우리 집에 온 물건인지 아닌지를 몰라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봉투 안을 뒤적이다가 바닥에 깔린 마이쭈와 오래된 열쇠를 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두고 갔는지를 알게될 것이다. 

그들은 그것도 알게될까?

나는 이제 다시는 이곳을 찾아오지 않으리란 것을. 미안하지만, 미안함을 느끼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무엇엔가 홀린듯 이곳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더이상 이곳이 내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올 때는 몰랐지만 어쩌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내 자취방으로 돌아가서도 비슷한 기분이 든다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꽤나 낭패일 것이다. 나를 지워버리고 나를 찾기 위해 떠나왔는데 떠난 곳에서도, 떠나간 곳에서도 나를 찾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꽤나 낭패일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은 후련했다. 다시 휴대전화를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에는 30분 정도 늦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역시 상관 없다. 어쨌거나 나는 그에게 갈 것이고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것이다.






Ten of Sword (열개의 칼): 망하거나 헤어진다. 혹은 터닝 포인트. 메이저 카드의 Death와도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좋지 않은 상황 하에서라면 안 좋은 상황이 끝나고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진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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