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우리는 윤하 선배의 남편이 올 때까지 그렇게 미적 미적 다시 소설을 읽고, 이건 무슨 소리냐고 묻고, 어떻게 고치면 좋을지 함께 고민했다. 윤하선배는 우리의 의견들을 거의 다 무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따금씩 그녀의 화려한 명품 다이어리에 무언가를 부지런히 적었다. 하지만 표정만은 '너희가 하는 얘기 듣고 고치는 거 아니야'라는 식으로 매우 뾰루퉁했다.
그렇게 창으로 비치던 해가 조금씩 노을로, 어둠으로 바뀌고 형부가 떠들썩하게 퇴근을 하고, 윤하선배와의 눈꼴 시리지만 한편으로는 꽤 부러운 재회 인사를 구경하며 사장 언니와 야유도 보내고, 이 시간까지 사랑하는 처와 재미있게 놀아 준 대견한 처제들에게 맛있는 걸 꼭 사줘야겠다며 우리를 끌고 고급 식당에서 한턱을 내기까지 참 유쾌한 하루였다. 걱정도 없고, 근심도 없고, 마치 다시 스무살이 된 것처럼 해맑기만 했다. 나를 둘러싼 어떤 숙제들이 모두 끝나고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어린 새싹이 된 것 같았다. 정작 스무살에는 세상 모든 근심과 걱정을 다 짊어지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15년이나 늦게 나에게 무언가를 꿈꿔볼 수 있는 시간이 돌아왔지만 어쨌거나 온 것은 온 것이었다. 어쩌면 30년이나 50년이 아닌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일년 중 그런 마법같은 날은 며칠이 되지 않기에 나는 이 기분을, 이 순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만끽하려고 했다. 나답지 않게 많이 웃었고, 그 중에는 소리내어 웃는 순간도 있었다. 평소보다 더 많이 이야기하고, 한번씩은 내 이야기도 했다. 그래봤자 최근 이야기들이었지만.
"뭐? 그래서, 그 어린 자식이 뭐라는 거야? 너랑 사귀자는 거야?"
주량의 80%쯤 채워진 윤하선배가 소리를 꽥 질렀다. 사장 언니가 뒤늦게 선배의 입을 틀어 막았지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돌아봤다. 짧은 정적이 우리 주위를 빽빽히 채웠다가 스스스 하는 잡음들과 함께 사라졌다.
오랜만에 개최된 숙녀들의 밤을 위해 형부는 우리를 근처 호텔 스카이 라운지에 내려주고 언니의 손에 빛나는 블랙 카드만 쥐어준 채 멋지게 떠났다. 방도 하나 잡아 놨으니 너무 취하면 거기서 쉬고가라는 완벽한 애프터 서비스까지 예약해 줬다. 물론 우리가 그 방에서 묵지 않고 선배를 그 방에 뉘어주고 가면 본인이 오겠다는 이야기도 덧붙였지만.
윤하선배나 사장언니는 그 뒷 이야기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아무리 좋은 남편도 매일, 24시간 붙어있으면 질린다는 게 선배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그 방에는 우리 여자 셋 말고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남자를 부르지 않는 한은 말이다.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그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고 싶었기 때문일까? 나는 묻지도 않은 진주 얘기를 그 자리에서 꺼내버렸다.
"모르겠어요."
정말 솔직하게 대답했다. 윤주를 빼면 나에게 비교할만한 다른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윤주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그냥 새로 마주보고 배시시 웃으면 시작되는 그런 나이였다. 지금의 나에게 그런 시작이 어울리는지, 그때의 그런 방식이 지금도 통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완전 날라리한테 걸린 거 아냐?"
사장 언니가 부드러운 멜론을 사그작 베어 물며 물었다. 혼자 사니까 과일을 잘 안 먹게 된다며 과일 안주만 한 가득 시켜 놓은 언니는 술은 뒷전이고 안주만 열심히 퍼 먹는 중이었다.
"날라리! 날라리라고? 얘한테? 요즘은 소설에도 그런 얘긴 안 쓰겠다. 재벌 뺨따구 때리고 '내 뺨을 후려친 여자는 네가 첨이야. 나랑 결혼해줘!' 이런 막장이냐고. 얘한테 뭐 땜에 그 어린게, 잘생긴 게 집적거리겠냐."
윤하선배가 질색을 했다. 내가 생각했던 딱 그런 이유로 말도 안되는 얘기였지만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으니 꽤 상처가 되긴 했다. 윤하선배보다 덜 취한 사장 언니가 내 눈치를 살짝 보며 말했다.
"예쁘잖아. 세련이. 야, 너보다 나아. 너 뭐 있냐. 돈 많으니까 철철이 보톡스 맞고 레이저로 지져서 이 정도 되는 거지."
"요 년이!"
세련선배가 주먹을 휘두르며 한대 치려는 시늉을 했다. 얼큰하게 취해서인지 행동이 묘하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남자는 원래 예쁘면 땡이야."
언니가 혀를 낼름 하며 덧붙였다.
"그걸 그렇게 잘 아는 게 몇년 째 솔로냐?"
선배가 공격했다.
"내가 뭘 몰라서 솔로냐? 예뻐야 된다니까. 난 안 예쁘니까 솔로지."
"예쁜 애가 얘 하나냐고. 길에 깔린 게 예쁜 여자야. 어리고, 예쁘고, 걔 수준에 맞는 여자들!"
"야, 너 취했냐? 웬 막말이야."
생각지도 못하게 솔직한 윤하 선배의 말에 오히려 사장 언니가 내 눈치를 봤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나를 톡 쏘는 윤하 선배가 낯설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고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어보였다.
내가 밑도 끝도 없이 잘 부풀어 오르는 풍선같은 타입인 것도 아닌데 선배는 나에게 항상 현실을 깨닫게 하는 뾰족한 바늘 역할을 자처했다. 부풀지도 않은 나를 찔러서 얼른 바닥을 깨닫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것이 나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것임을 안다. 마음 속으로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되길, 내가 더 밝아지길, 더 가볍게 떠오르길 바라면서도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 받는 것은 보고싶지 않아했다. 차라리 자신이 그 역할을 하는 한이 있어도. 그래서 그녀는 틈만 나면 동생을 때리고 구박하면서도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그런 취급을 받으면 못견디는 언니처럼 굴었다.
"그 자식이 뭐라든, 괜히 헬렐레 하지말고, 너 혼자 생각하고 떠보지 말고, 꼭 정확히 물어 봐."
"뭘 물어?"
사장 언니가 내 대신 말했다.
"우리 사귀는 거 맞냐고. 야, 우리 오늘부터 1일인거 맞냐고!"
매서운 눈으로 선배가 말했다. 눈빛에는 이미 술이 가득했다.
"뭐야. 연애 고수인척 하면서 촌스럽기 그지 없네. 요즘 애들은 그런 거 안 물어. 아니, 우리 때도 그런 건 중학생이나 하는 말 아니었냐? 눈빛 보고 통하면 사귀는 거지, 오늘부터 1일이냐고는 뭐야. 아우, 아우 촌스러워. 하윤하, 엄청 촌스러!"
언니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징그럽다는 듯 손까지 탈탈 털었다.
"너야말로! 연애는 촌스러워야 돼. 촌스럽고 징그럽고 끈적해야 돼. 쿨하고 세련되고 보송보송한 연애에 무게가 있을 것 같냐? 너 나 사랑해, 안 사랑해? 너 나말고 딴 여자 쳐다 볼거야, 말거야! 나랑 영원히 사랑할 거야, 말꺼야! 이런 걸 끊임 없이 묻는 게 사랑이라고.'
"아 너무 지쳐. 대체 언제까지?"
"언제까지는 뭐가 언제까지야. 사랑하는 한 계속이지."
"진정한 사랑은 평온하고 평안해야 하는 거 아니니? 나이 먹었으면 더더욱. 언제까지 그렇게 다 던지면서 사랑해야 하는데?"
"그게 나이랑 무슨 상관이야. 사랑에 나이가 어딨어. 사랑에 나이가 없으면 사랑을 지속하는 조건도 계속 되어야지. 안 그러냐?"
"너는 뭐 할리퀸 문고로만 연애를 배웠냐? 왜 이리 극단적이야."
"어어. 할리퀸이 내 연애 팔할을 가르쳤지. 거기엔 세상을 관통하는 사랑의 진리가 있으니까."
"뭔데?"
"사랑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거. 사랑 자체가 에너지라고. 그 사람을 내 곁에 두고 싶어 붙드는 에너지, 그게 튕겨져 나가지 않도록 유지하는 텐션 에너지, 그 사람에게 쏟는 관심! 상대 역시 그걸 똑같이 팽팽하게 유지해야 둘이 같은 속도로 갈 수 있다고. 에너지가 없으면 사랑은 끝난 거야. 윤주랑 너도! 그 에너지가 부족했던 거지. "
윤하 선배는 꼬부라진 혀로 연설하듯 대범하게 말하더니 테이블 위로 스르르 쓰러졌다. 한심하다는 눈으로 선배를 내려다 보던 언니가 내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떤데? 걔가 널 꼬시는 거 같아? 아니면 진짜 관심이 있는 거 같아? 아니다, 넌 걔한테 관심있어?"
나는 생각했다. 어떨까? 나는 그를 향해 에너지를 가지고 있을까? 어떤 관계를 시작함에 있어, 특히나 연애 관계를 시작함에 있어 가장 먼저 확인이 되어야 하는 건 나의 마음일까, 그의 마음일까?
윤주와는 운이 좋게도 동시에 시작했다. 그가 나를 발견했고, 나는 나를 발견한 그를 발견했다. 거의 동시에. 그때와 같은 운을 제외한다면 나는 이제와서야 연애라는 걸 처음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진주에게 처음 느꼈던 것은 그의 나른함과 여유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언제나 모든 것을 느끼고 신경쓰고 최대한 문제없이 살려고 했던 조급한 나와는 다른, 관심없는 것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관심 있는 것에 대한 거침 없는 호기심. 그것을 부러워 하고 나서는 내 결핍과 결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열등감의 폭발이 있지는 않을까 주의했다.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꼭 그가 특별했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늘 그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내가 가진 극단적으로 불리한 삶의 조건이 누구에게라도 '열등감'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게 내가 가진 거의 유일한 자존심의 조각이었다.
"결혼이라는 게 성공한 연애의 결과물이라면 재수없게도 우리 중에는 윤하 이 기지배만이 승리자라 내가 당당하게 내 말이 맞다고 주장할 순 없지만, 난 얘 말에 100% 동의는 안해. 정말 사랑이라는 게 에너지의 폭발만이라고 한정 지을 수 있겠니?"
"언니는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나? 글쎄."
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연애를 많이 해 보진 않았지만 오래는 해 봤거든. 너보다야 짧겠지만, 그래도 다들 5년, 6년씩은 사귀어왔던 것 같아. 진짜 미쳤었지 내가. 그런 새끼들하고."
언니는 수북한 과일 접시를 절반쯤 비우고 나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는 윤하 선배는 조용히 잠이 든 것 같았다. 언니의 이야기가 끝나면 선배를 들쳐 엎고 형부가 준비해 둔 방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얘처럼 그렇게 요란하게 사랑하진 않았어. 뭐, 시작이야 요란했을지 모르지. 원래 그렇잖아. 사랑을 시작할 땐 난 너 아니면 안돼, 너 같은 애가 왜 이제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우리가 서로의 마지막 사랑이면 좋겠어, 하면서 난리 브루스를 추지만 그건 1년이나 갈까? 적어도 나는 그랬어. 매일 만나고 싶고 보고 있으면서도 더 보고싶다는 어떤 미친 갈망 같은 건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지나가더라고.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자주 만났을까, 그렇게 피곤한데 어떻게 매일 밤 새워서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을까 나 조차도 내가 이해가 안되는 그런 시간들이 분명히 있는데, 그건 늘 지나갔어. 연애 기간 전체를 통틀어 생각하면 그건 한 20%나 될까? 그랬지."
언니 역시 선배가 신경쓰이는지 이야기를 하면서도 힐끔 힐끔 선배를 쳐다봤다.
"나머지 4, 5년은 그냥 지내는 거야. 보고싶을 때도 있고, 너무 바쁘면 생각이 안날 때도 있고.......그러다 보면 하루 종일 전화 한 통 안할 때도 있고, 진짜 너무 피곤하면 오랜만에 데이트하기로 한 날인데 나가는 게 귀찮은 날도 있고.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냐면 그건 아니야. 그 죽고 못사는 시기가 지났다고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건 아니었거든. 그만큼의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쓸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건 그 무덤덤한 시간들도 나에겐 의무나 책임 같은 건 아니었단 거야. 말 하지 않아도 그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알고, 그 역시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아니, 안다기 보다 믿는 거지. 그 믿음이 강해질 수록 서로를 갈망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아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고. 그런 거."
"언니는 편안함을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언니가 픽 하고 웃더니 나를 가만히 쳐다 봤다.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갈지 고민하는 눈이었다.
"이래서, 내가 윤하 이 기지배가 너무 재수없는데 당당하게 네 그지같은 가설은 틀렸어! 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야."
으으으으 하는 소리를 내면서 언니가 잔을 비웠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잔을 채워 주었다. 언니는 새로 채운 잔을 다시 비웠다. 이야기가 그녀에게 갈증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우리 관계는 늘 상대의 바람으로 끝이 났어! 나는 그 모든 폭풍과 유난의 시간을 지나 드디어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편안해졌다,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 그 시기쯤 다들 바람이 났어. 나는 이제 이 관계가 너무 마음에 들고 또 다른 것으로 깰 수 없을 만큼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너무 쉽게 깨졌어. 신뢰라는 것도 참 얄팍한 거더라? 우리 사이의 시간과 추억, 노력, 애정, 그 모든 것을 천천히 쌓아 올려서 굳어졌다고 믿었는데, 감정은 공구리가 아니야. 시간을 충분히 들인다고, 굳은 약속을 한다고 진짜로 굳어지지 않더라고."
언니가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사랑......사랑이 뭘까? 사실 나는 할 수록 모르겠던데. 윤하 같은 애처럼 이렇게 깔끔하게 '이거다!'하고 정의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이 기지배가 운이 좋은 년이라 그렇고. 나처럼 언제나 기대하고 실패하길 반복한 사람은 알 수가 없지. 이것인가 하면 이것이 아니고, 이 놈인가 하면 이 놈이 아니었으니까. 똑같은 방법을 써도, 다른 방식을 써도 늘 결론적으로는 틀렸더라고.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겠어. 틀렸다고 생각한 그게 사실은 맞았는지. 아닌 줄 알았는데 알고보면 그게 사랑일 수도 있잖아. 죽기 직전까지 뭐가 맞다, 뭐가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나도 언니를 보며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그날 나는 스카이 라운지에서부터 객실까지, 세번을 왕복했다. 처음에는 윤하 선배를 들쳐 매고, 두번째에는 사장 언니를 들쳐 매고.
차라리 내가 더 먼저 와구와구 술을 들이부어 버릴걸 하고 후회했지만 어쩌겠는가. 결국 마지막까지 제 정신으로 남아 있었던 건 나 뿐이고, 그녀들은 나만 믿고 그대로 뻗어버린 것을.
한 겨울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장 언니까지 방에 뉘어놓고 다시 스카이라운지로 돌아와 놓고 간 짐은 없는지 살피고 가려는데 새로 시켜놓고 반도 다 마시지 않은 와인병이 마음에 걸렸다. 윤하 선배가 고른 걸 보면 분명 비싼 걸텐데.
술을 아까워 하는 것만큼 미련한 것도 없으련만 그녀들의 술시중을 드느라, 또 이야기를 듣느라 내 몫의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직원에게 말해 테이블을 정리하고 남은 술과 안주를 추려서 바 쪽 혼자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줄 수 있는지를 물었더니 기꺼이 그렇게 해 주겠다고 했다. 나까지 인사불성이 되면 계산을 할 사람이 없으므로 윤하 선배에게 건내받은 형부의 카드로 지금까지의 술값을 계산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바 자리로 안내 받았다. 그리고 다리를 쭉 다 뻗어도 발이 닿을락 말락 높은 바 스툴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았다.
얼굴은 적당히 따뜻하고 많이는 아니지만 취기는 어느 정도 올라 마음도 말랑말랑했다. 크리스마스를 앞 둔 연말이라 그런지 늦은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며 습관적으로 멍하니 낡은 스웨터 소매의 보풀을 떼어내다 보니 그제서야 함께 온 일행들과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무리 무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 애들은 뭘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했다. 엄마는 당연히 집에 없을테고, 평소에도 있는 핑계 없는 핑계를 대고 집 밖을 나도는 사람이 연말에, 크리스마스라는 좋은 핑계거리를 놓칠리 없다.
엄마는 전날 밤부터 나가 크리스마스가 지나야 집에 들어오곤 했다. 밖에서 뭘 하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마음을 나눌만한 친구도 없었고 그렇다고 믿을만한 애인도 없었으면서 엄마는 늘 어떤 핑계거리만 생기면 밖으로 뛰쳐나가 말 그대로 코가 삐뚫어질 때까지 술을 들이부었다. 나는 술에 취해 헤롱거리는 그녀가 미워서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것만이 그녀의 도피처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녀 스스로 만들어냈지만 믿고 싶지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우리라는 현실에 대한.
나는 동생들이 아직은 어린 아이라고 여겨질 때까지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곤했다. 내가 정한 크리스마스 선물 지급 시한은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였다. 적어도 유치원생 정도의 나이까지는 산타 할아버지를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없는 살림에 대단한 것을, 그들이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유행하는 장난감은 언감생심 시도도 못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마이쭈 같은 것 뿐이었다.
남은 아이들은 크리스마스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괜히 들떠서 꾸벅꾸벅 졸면서 TV를 보다가 하나 둘씩 이불로 픽픽 쓰러져 고로롱 코를 골았다.
그때, 그날밤도 나는 내년부터는 이런 시시한 선물을 준비하는 산타가 나라는 걸 알게 될(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곱살짜리 셋째의 머리맡에 제일 먼저 마이쭈 두개를 놓고, 아직은 크리스마스가 뭔지도 잘 모르지만 형이 좋아하면 따라 좋아할 두살짜리 막내의 머리맡에도 하나를 놓았다. 그리고 내가 만든 원칙대로라면 이제 크리스마스 선물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할 열 두살짜리 둘째의 머리맡에도 하나를 두었다. 산타가 없다는 건 당연히 알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만큼은 어린 아이였으니까.
그렇게 네개의 마이쭈를 배분하여 각각 어린이들의 동심을 내 나름으로는 지켜줬다는 뿌듯함으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른 아침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흥분한 동생들의 목소리에 깼다. 셋째와 넷째가 서로 마이쭈를 가지고 신이나서 방방 뛰고 있었다. 딸기맛과 포도맛을 평화롭게 나누는 거래를 하는듯 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피곤하면서도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소리가 좋아 슬쩍 웃으며 일어나는데 내 머리 맡에도 마이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직 눈을 뜨지 않은 둘째의 머리맡에도 하나가 놓여 있는 걸 보니 누군가 셋째에게 주었던 두개 중 하나를 내 머리맡으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게 누구였는지 모른다. 굳이 아이들을 추궁해서 범인을 찾아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렇다고, 나도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것을 받았다고 믿고 싶었다. 적어도 내가 잠시나마 그 애들의 꿈을 지켜주는 보호자이긴 했다고, 이제는 그만하면 됐다고.
방문을 열자 도로롱 거리는 숨소리와 작은 코골이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둘 다 깊이 잠 든 것 같았다. 이미 밤은 깊을 대로 깊어 밤 보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 됐고 난 꽤 여러 잔의 와인을 마셨지만 잠은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지금 잠이 들면 아예 일어나지 못할 거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나는 침대에 푹 안겨 잠들어 있는 두 여인들의 고요한 얼굴을 확인하고 옆에 있던 테이블 앞에 앉았다. 가방을 뒤적이니 이제는 내 일부분처럼 손에 착 붙는 타로카드 덱이 만져졌다. 더 뒤적거려 손수건도 함께 꺼냈다. 테이블 위에 손수건을 깔고 카드덱을 천천이 섞었다. 당장 무슨 질문이 떠올라서는 아니었다. 그냥 규칙적으로 들리는 언니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카드를 만지고 싶었다.
카드를 섞을 때 나는 차각차각하는 소리가 좋았다. 코팅된 매끈하고 종이가 위 아래로 부딪히며 소리를 만들어내지만 두툼해서 구겨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 안심하고 과감히 카드를 떼고 다시 합친다.
차각차각, 사각사각, 찹찹, 처럭처럭.
뭐라고 써야 그 소리를 정확히 묘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소리는 나를 조금 더 차분하게 식혀주는 역할을 할 때가 많았다. 가끔은 무아지경으로 멍하니 앉아 끝없이 카드를 섞는데 몰두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카드를 펼쳐야 한다는 것도 잊고 내 질문이나 고민도 잊어버리기도 했다. 내가 가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잠시 잊을 수 있긴 했다.
오늘 밤은 어떤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궁금해야 할지를 몰라 카드를 만지고 섞었다. 문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나를, 나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이 소리가 가라앉혀주길 바라면서.
어두운 방에서 내다 보는 호텔 창 밖에는 365일 꺼지지 않을 간판들과 간간이 오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만이 반짝였다. 외로움일지 불안함일지, 혹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감일지 모를 감정들이 작은 불빛들과 함께 일렁였다.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일까, 생각 없이 살다 보니 이제와서 남들은 사춘기에 끝냈을지도 모를 고민들을 이제야 시작하게 된 것일까.
다 떨어냈다, 다 포기했다, 다 잊었다, 왜냐하면 나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까 라고 굳게 믿으며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던 부작용일까? 주제도 모르고 가진 것보다 많은 것을 남 몰래 욕심내며 살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쓸데없는 미련일까?
나는 차락거리던 카드들를 하나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카드 덱을 펼쳤다. 그리고 신중하게 한 장 한 장 골라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두근거림을 느끼며 하나씩 뒤집었다.
Temperance (절제, 천사): 인내심, 통제, 중도, 절제. 나를 돌아보고 행동을 다시 돌아보라. 대화가 잘 통하는 상태. 적극적이다가 절제하여 상대가 거리감을 느끼기도 함.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