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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Sep 20. 2024

이제 그만 크리스마스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문 닫힌 카페 앞으로 익숙한 차가 보였다. 여전히 뽀얀 먼지가 덮힌 팬시한 차. 나는 이제 그의 차가 익숙했다. 그래서 꼭 오랜만에 보는 지인처럼 반가운 마음까지 불쑥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당황스럽게.

어두운 썬팅으로 차 안이 들여다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거기에 앉아 있을 진주를 상상하며 손을 살짝 흔들며 다가갔다. 하지만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라 목도리에 얼굴을 반쯤 푹 집어 넣고 눈만 내 놓은 채였다. 

그러자 문이 벌컥 열리며 차에서 진주가 나왔다. 그는 아주 활짝 웃고 있었다. 머리를 조금 잘랐는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보다 깔끔하고 더 어려보였다. 보송보송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의 미소를 보자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내 입이 목도리 안에 숨겨져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볍다. 그는 주변의 것들마저도 가볍게 만든다. 어쩌면 그의 곁에서는 중력이 조금 줄어드는 건지도 모른다. 방금 전 옛동네에서 그렇게나 무겁게 느껴졌던 내 두 다리는 위로 살짝 떠서 뒷꿈치가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았고 무언가 짓누르는 것 같았던 내 어깨는  그에게로 다가갈 수록 조금씩 펴지는 것 같았다. 


"안녕?"


진주가 내게 조금 어색한 인사를 건냈다. 


"......왜 말 놔요?"


나는 사실 처음에는 그의 가벼움이 조금 무서웠다. 내가 현실과는 다른 어떤 환상을 갖게 될까봐 두렵기도 했다. 현실감을 잃는 것이 곧 내가 살 수 없게 되는 길이라 생각했다. 세상 모두가 다 약간의 환상 속에 산다해도 나는 땅에 발을 붙이고 절대로 떠올라서는 안된다고 늘 나를 다잡았다.

내 발에 묶인 납덩이는 스스로 달아놓은 것이었을까? 나는 떨어질 것이 너무 무서웠을 뿐인데 그 엄살이 자꾸만 나를 끌어내려서 언젠가 다시 떠오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 반가워서요. 세련씨 생각을 하면서 혼자 친해졌나 보죠."


진주의 미소가 다시 비누방울처럼 팡팡 터졌다. 

 

"세련씨는요?"


나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솔직함에 내가 얼마나 맞춰줘야 하는지, 얼마나 맞춰줄 수 있는지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그가 나를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지, 나를 변화시키고 싶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윤주는 실패했고 나 역시 실패했다.

그는 맞을까? 그는 맞는 사람일까? 이런 궁금증을 마음에 품은 것도 오랜만이었다. 윤주는 내게 아주 오랜 시간동안 그런 궁금증을 품을 필요 없게 만들어 준 존재였다. 그건 한편으로는 매우 편안하고 한편으로는 매우 따분했다. 나는 내 인생 자체가 파란만장했으므로 그와의 연애는 차라리 편안하고 따분한 것이 나았다. 


"자꾸 생각 났어요. 거슬리고, 신경쓰였어요."


나는 조금 더 솔직해져 보기로 했다. 충동적으로 한 얘기였지만 이제는 조금 충동적으로 살고 싶었다. 이제  나에게 그 정도의 자유는 주어도 될 것 같았다. 진주는 내 대답에 즐거워 보였다. 나는 나를 위해 그런 결심을 했을 뿐인데.


"같이 걸을래요? 좀 춥지만."


나는 양 쪽 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고 왔던 캔커피 중 하나를 꺼내어 진주에게 내밀었다. 처음엔 아주 뜨거웠던 커피는 걸어오는 동안 조금 식었지만 30-40분 정도는 온기를 유지할 핫팩으로 손색이 없을 듯 했다. 근처 작은 공원을 돌기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진주는 별 말 없이 차 뒷 좌석에서 두꺼운 패딩을 꺼내입더니 나를 따라 나섰다. 

나는 조금 앞장서듯 공원으로 그를 이끌었다. 카페 옆 골목을 따라 쭉 내려다가 보면 전철 역이 나오는데 전철역에서 길을 건너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난 길로 조금만 들어가면 갑자기 키가 큰 플라터너스가 양쪽으로 늘어선 숲길이 시작된다. 거기부터가 공원인데 자주는 아니지만 한번씩 마음이 답답할 때면 퇴근 길에 들르던 곳이었다. 빠르게 돌면 30분, 천천히 걸으면 한 바퀴 도는데 40분쯤 걸린다. 나도 해가 질 녘이 아닌 시간에 온 건 처음이었다.


"카페는 왜 갑자기 닫은 거에요?"


말 없이 나를 따르던 진주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모르겠어요. 언니가 딱히 이유를 말해주진 않았어요. 그냥 지쳤나보다 해요. 괜찮은 것 같다가 돌아보면 뭔가 많이 쌓여서 무너지거나 다 버리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세련씨도 그런 적 있어요?"


나는 대답을 하려 입을 뗐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진주에게 되물었다. 


"진주씨는요?"


진주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나는......최대한 쌓아두려고 하지 않아요. 그때 그때 정리해요. 어차피 터질 거라면 굳이 참을 필요 없으니까."


진주가 할만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터지지 않을지도 모르잖아요. 몇번 참고 넘기다 보면."


나는 나다운 대답을 했다.


"글쎄요. 그 에너지가 결국 어디로 갈까요? 에너지 보존의 법칙 몰라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에너지는 보존 되잖아요. 형태만 바뀔 뿐. 어떤 형태로 발산 될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하게 지내느니 발생했을 때 그때 그때 해소하는 게 나는 마음 편해요."


복에 겨운 소리. 나는 한번씩 튀어나오는 그의 도련님 모먼트에 긁혀서 마음이 뾰족해졌다. 진주는 진주다운 대답을 했을 뿐인데.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화난다고 화내고, 신경질 난다고 신경질 내고 그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거 잖아요."


진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집게 손가락을 세워 내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마요. 세상 모든 일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치환할 필요는 없죠. 에너지가 보존 된다는 거지, 그대로 전달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혹은 어떤 것에서 출발했는지 모르게 바꿔서 발산할 수 있다면 폭발까지 기다렸다가 무너질 필요없죠."


우리는 근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주머니 속에 있던 캔커피를 꺼내어 따려는데 진주가 자기 캔을 따서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내 손의 캔을 가져가 따고 한 모금 마셨다. 커피는 이제 미온 정도로 식어 있었다. 


"......좋은 얘기인데, 잘 모르겠어요. 해 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나는 솔직히 말했다. 진주가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배워보고 싶네요. 어떻게 하는 건지.'


미지근한 커피를 홀짝 마시며 작게 덧붙였다. 정말이었으니까. 적어도 오늘은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나는 아주 먼 길을 돌아왔고, 심지어 오늘은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오기도 했으니까. 그것을 위해 내 마음 속에 일었던 그 에너지를 잊고싶지 않았다. 


"가르쳐 주고 싶네요. 어떻게든."


진주가 나를 따라 대꾸했다. 그의 엉뚱하면서도 유쾌한 에너지가 이제야 조금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가슴 속 아주 아주 아주 밑바닥에서 무언가 살랑 떠오르려고 하는 듯 했다. 깃털 같기도 하고 공기 방울 같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나는 늘 아르바이트를 했다. 윤주는 당연히 남들처럼 데이트를 하고 싶어했지만 남들이 놀 때 일하는 것이 시급이 훨씬 높았으므로 내게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불과 작년까지도 그랬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념할 수 있는 건 26일 밤이나 되어야 가능했다. 그땐 그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지금와 돌아보면 나는 그것을 윤주에게 미안해 하지 않았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가 뭐라고. 데이트가 뭐라고.

일년에 한번 있는 대목을 데이트와 바꾸기엔 삶이 참 팍팍했다. 그 속에서도 로맨스는 있었지만 타이밍을 딱 맞출 순 없었다.

올해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수십년간 유예됐던 나의 성탄절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나는 연말까지 예상치 않은 갑작스러운 휴가에도 생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내내 나를 기다려 주었던 윤주가 이제 없었다.


"크리스마스 때 뭐 해요?"


진주가 조수석 쪽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나는 얼른 차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 시간쯤 공원에서 머물렀던 것 같다. 몸이 땡땡 얼어갈 때쯤 진주가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고 이번엔 거절하지 않았다. 


"글쎄요. 특별한 건 없고 원고 작업을 하겠죠?"


차를 빙 돌아 운전석에 올라탄 진주를 보며 대답했다. 어젯밤 외박의 여파로 슬슬 피곤함이 몰려 오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면 전기장판을 세게 틀고 그 안에 들어가 꼼지락거리며 게으름을 피우리라 생각했다. 그래, 이 정도는, 이제 이 정도는 해도 될테니까.


"별 일 없으면 나랑 만날래요?"


진주가 빠르게 패딩을 벗어 뒷좌석으로 휙 던져 버리고 다시 얇고 부드러운 니트 가디건 차림으로 돌아왔다. 옷 속이 더웠는지 외투를 벗는 순간 그에게서 따뜻한 기운이 훅 하고 옆으로 퍼졌다. 나는 여전히 너무 추워서 감각없이 얼음장 같은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볼도 얼어붙어 대답도 빨리 하기가 어려웠다. 진주가 그런 날 슬쩍 보더니 히터를 세게 틀고 내 두 손을 끌어 뜨끈한 바람이 나오는 곳에 올려 주었다. 


"여기 잠깐 대고 있어요."


그러더니 뒷 좌석 쪽으로 몸을 틀어 다시 패딩을 끌어 오더니 내 무릎에 외투를 올렸다. 같은 곳에서 같이 있다가 왔는데 그는 왜 이렇게 봄날처럼 따끈하고 나는 한 겨울처럼 싸늘할까. 이미 말랑해진 그의 뺨을 한번 만져보고 싶었다.


"크리스마스 때 어디 가면 너무 번잡스럽지 않아요?"


갑작스레 몰려오는 온기에 조금 나른함이 느껴졌다. 이젠 정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아, 번잡스러운 곳에 가진 않을 거에요."


"진주씨 집은 아니죠?"


내 물음에 진주가 소리내어 짧게 웃었다.


"우리집을 왜 그렇게 싫어해요? 내가 그 날 손님 접대를 잘 못했나 봐요."


나는 민망함에 또 목도리에 고개를 푹 숨겼다. 조심성 많은 자라처럼.

엄밀히 말해 그가, 그의 집이 내게 잘 못한 건 없다. 그저 그것을 고깝게 해석하고 또 지나치게 경계했던 내가 있었을 뿐. 어찌보면, 어떤 누군가에겐  꽤 로맨틱한 장면이 됐을 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그렇게 받아들이질 못했다. 나도 알지만 여전히 나는 나였다.


"밖.에.서. 만나요. 재미있을 거에요."


진주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건지, 놀리는 건지 밖을 한 음절씩 끊어 말했다. 얼굴이 확 달아올라 추위까지 한꺼번에 가시는 것 같아 히터에서 손을 떼어 내 볼을 감싸 쥐었다. 순간 진주의 차가 부릉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안녕?"


집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진주였다. 처음 그렇게 인사를 한 이후 그는 원래대로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는 쭉 '안녕'이라고 내게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정색을 하던 나도 그를 따라 똑같이 인사를 건내게 됐다.


"안녕?"

 

처음에는 이상하고 어색해서 몸이 베베 꼬이는 것 같았지만 몇번 철판을 깔고 그렇게 하자 그런대로 할만 했다.


"오늘 어디로 가나요?"


나는 이제 그의 차에 완전히 적응했다. 날 기다리는 진주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면 재빨리 올라타 가방을 등 뒤로 구겨 넣고 구멍을 더듬거리지 않고 능숙하게 안전밸트를 맸다. 이젠 윤주의 차보다도 더 익숙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강아지들을 잔뜩 만나러 갑니다."


진주가 대답했다. 


"누구 강아지요?"


"주인이 없는 강아지들이요."


진주가 대시 보드 아래 꽂아 둔 테이크 아웃 커피잔을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따뜻한 커피 향이 올라왔다. 한모금 마시고 있으니 진주가 네비게이션에 오늘의 목적지를 입력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가끔 봉사활동을 가는 유기견 보호소에 갈 거라고 했다. 만나기 전부터 편하고 더러워져도 되는 옷을 입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한 것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나는 미리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그냥 나의 첫번째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감춰두고 싶었다. 오히려 빨리 물어봐 주길 바라는 듯 어디로 갈지 궁금하지 않냐는 진주의 질문에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유기견 보호소라니.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옵션이었다. 

나는 인간의 아기들은 꽤 잘 다룰 수 있다. 여러 차례의 경험과 노하우가 있으니까. 그 노하우를 살려 베이비시터 일을 아르바이트로 했던 적도 있었다.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동생들은 모두 성격과 특징들이 달라서 다양한 경우에 대응이 가능했다. 언젠가는 꽤 많은 돈을 받으며 부잣집 아이에게 영어를 쓰는 베이비 시터 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딱 하나, 인간이 아닌 동물 쪽으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다. 강아지도, 고양이도, 햄스터도, 금붕어도, 전혀. 하나도 없다.

살아 있는 것들이 바글바글한 곳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는 나에게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신선한 데이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싫든.


"어릴 때 강아지를 키웠었거든요. 작은 치와와였는데 아주 똑똑했어요. 나 보단 엄마를 더 좋아하긴 했지만 어릴 땐 형아가 되고 싶어서  그 애를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많이 놀았죠. 내가 태어날 때부터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니까 나이로 보면 나보다 형아였지만 동생으로 생각하면서 사이 좋게 지냈어요."


진주의 눈이 아련히 지난 추억을 떠올리는 듯 했다. 강아지를 생각하며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어린 시절의 누구를 떠올리며 저렇게 아련해질 수 있을까?


"그 애가 죽고 나서 내가 너무 슬퍼하니까 엄마 아빠가 다른 강아지를 데려와 주겠다고 했어요. 근데 그런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그 애는 내 동생이지 새로 살 수 있는 장난감이 아니었으니까. 그때는 그걸 이해 못하는 엄마 아빠가 밉기도 했어요. 그래서 유기견 봉사를 다니기 시작한 거 같아요. 처음엔 다른 강아지만 봐도 마음이 아팠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슬픈 느낌은 조금 지워진 것 같고, 지금은 뭔가 채우고 싶을 때 가요. 거기 있는 꼬질 꼬질한 애들을 깨끗하게 씻고 그 애들이 갈구하는 애정을 좀 나눠주다 보면 철 없는 시절 만난 주인이라 우리 진주한테 잘 대해주지도 못했던 미안함도 좀 덜어지는 것 같거든요."


".......네?"


"우리 진주. 귀여운 진주요."


진주가 당황한 나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다. 나는 그렇게 가까이서 동물을 본것도, 만진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크고 작은, 살아있는 털뭉치들이 와르르 달려들어 내 다리를 붙들고 손등을 핥아댔다. 이걸 어떡하지, 어떻게 해줘야 하는거지 하면서 우물쭈물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진주가 즐거워했다. 


"쓰다듬어 줘요."


진주가 자기를 둘러싼 또 다른 무리의 강아지들의 목덜미를 주무르며 내게 조언했다. 나는 몰려든 강아지들에게 공평하게 스킨십을 제공해 주기 위해 앞 줄부터 하나씩 하나씩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아지들은 자기 차례를 지키지 않았고 뒷줄에 있는 강아지들이 밀고 들어와 앞줄에 있는 아이들이 뒤로 밀려났다. 그 바람에 누구까지 쓰다듬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모두 공평하게 쓰다듬어주려고 했던 내 계획이 도루묵이 됐다. 


"자 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봉사자가 육포를 흔들며 강단있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강아지들이 한꺼번에 돌아서 그녀 앞에 앉았다. 뒤 늦게 앉은 강아지는 있었지만 앉지 않은 강아지는 없었다. 


"엎드려!"


그녀가 다시 육포를 높이 들며 소리치자 모두 착착착 바닥에 엎드렸다. 한번씩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로 펄쩍 뛰어오르는 강아지들이 있었지만 머리 위로 올려 든 육포에 닿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상황을 차분하게 정리하고는 강아지들에게 간식을 나눠주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 단순한 논리가 참 유쾌하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것을 우러러 보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듯 원하는 것 하나만을 열렬히 쫒는다. 나는 순식간에 그 단순한 생명체가 좋아졌다. 오늘 처음 보는 사이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구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대단하게도 느껴졌다. 내가 갑자기 앉거나 일어설 때 혹은 불쑥 손을 뻗을 때는 잠시 움찔 하기도 했지만 그 정도의 경계심이야 동물이 응당 가져야 할 본능에 가까운 것이고, 그 외에는 나를 포함한 거기에 있는 누구에게도 거부감이나 거리감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여기저기 싸 놓은 똥이며 오줌을 치우면서도 찡그리는 낯 없이 웃으며 강아지들을 대했다.


툭.


육포의 방향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강아지들을 넋을 잃고 구경하는데 뭔가 축축하고 서늘한 것이 내 손등에 닿았다. 깜짝 놀라 내려다 보니 하얀 백구였다. 백구는 나를 가만히 올려다 보더니 내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자기 코를 내 손등에 다시 한번 쿡 찍었다. 내가 방금 느낀 축축하고 서늘한 것이 바로 그 느낌 이었다.


"왜? 너도 간식 먹고 싶어?"


백구는 간식이라는 말에 반응하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내 손 밑으로 주둥이를 들이밀더니 머리로 내 손을 드리블 하는 것처럼 툭툭 들어 올려 자기 머리 위로 올렸다. 내가 가만히 있었더니 백구도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거, 쓰다듬어 달라는 거에요."


간식을 나눠주던 봉사자가 말했다. 


"봉구는 간식보다 쓰다듬어주는 걸 좋아해서요. 특히 선생님처럼 예쁜 분이 봉사를 오면 더 그래요."


나는 내 손에 이마를 대고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 봉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살짝 쓰다듬어 봤다. 봉구가 내 손길을 느끼는 듯 눈을 스르르 감았다. 부드러운 듯 까슬한 듯 짧은 머리털에 따스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처음 느끼는 감촉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손가락이 손바닥이 되고 한 손이 두 손이 됐다.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 가며 쓰다듬고 주물렀다. 그 따뜻하고 말랑함이 내 마음까지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신기했다. 마치 '따뜻함'이라는 걸 처음 느끼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게 따뜻함이구나. 나는 여지껏 따뜻하다는 것이 뭔지를 모르고 지냈구나 싶었다.


"오늘 봉구 머리 벗겨지겠네. 같이 산책 좀 다녀와요."


보호소 안을 청소하던 진주가 내 손에 목줄을 쥐어줬다.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라 어버버 하니 능숙하게 강아지 목에 목줄을 둘러서 고정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소장님이 그러지 말고 둘 다 강아지들 산책을 시켜

달라며 몇 마리의 목줄을 채워 우리 손에 들려줬다. 나는 산책을 시켜 준다는 게 뭔지 몰라 진주를 따라 양 손에 목줄을 꽉 쥐고 따라 나섰다.

와글 와글 강아지들과 나서는 우리 뒤로 소장님이 데이트 잘하라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응원을 해줬다. 왠지 부끄러웠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 우리가 데이트를 할 수 있는 남녀로 보인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했다. 혹시라도 그런 사이가 상상 조차 되지 않아 보이진 않을지 내심 걱정스러웠다. 

우리와 함께 나온 다른 강아지들은 오랜만에 보호소의 문턱을 넘는 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지 줄곧 헥헥 거리고 의미 없이 왕왕 짖기도 했다. 잘 가다가도 갑자기 휙 하니 목줄을 당겨 놓칠뻔도 했다. 하지만 봉구만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앞을 힐끔거리며 걸었다. 충분히 조심스럽고도 나를 신경쓴다는 의미가 전달 되는 걸음과 눈빛이었다. 


"세련씨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에요."


진주가 강아지들이 질서를 지키며 걸을 수 있도록 목줄을 정리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러지 않나요?"


나는 그가 하는 것을 보며 똑같이 따라하며 물었다. 너무 줄을 당기는 강아지가 있으면 줄을 짧게 잡고 툭 하니 한번씩 당겨 주의를 주고 무성한 풀 숲이 나오면 모두 함께 킁킁거리고 마킹을 할 수 있도록 잠시 멈췄다.


"봉구가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그 중에 세련씨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나는 봉구를 다시 내려다 봤다. 중강아지 정도의 봉구는 몸통이 미처 다 자라지 않아 비율이 맞지 않게 귀가 지나치게 커 보였고 얼굴 주변 털은 털갈이를 하는지 원숭이 같은 헤어라인이 생겼지만 팔 다리는 아직 오동통했다. 눈은 진한 갈색으로 햇빛이 비치면 투명한 구슬처럼 반짝였다.

지금까지는 단 한번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동물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존재와는 어떤 식으로 소통을 해야하는 건지 몰라 그저 뚫어져라 바라봤다.


안녕, 너는 누구니? 나는 세련이라고 해. 네 이름은 봉구라며? 몇살이야? 여긴 어떻게 왔어?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건지 아니면 소리를 내어 말을 건내야 하는 건지 몰라 이런 저런 질문들을 생각하며 입을 달싹 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처럼 강아지들에게 말을 잘 붙이던데, 나는 뭔가 좀 어색했다. 그 와중에도 봉구는 고요히 갈색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냥 이렇게 하면 되는 걸까? 봉구가 나를 관찰하는 것처럼 나도 봉구를 가만히 들여다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강아지들이 모두 마킹을 하고 충분히 냄새를 맡은 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봉구는 여전히 앞을 향해 걸으면서도 고개는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두 손에 목줄을 가득 쥐고 있어서 봉구를 쓰다듬어 줄 수 없는 게 아쉬웠다.


"크리스마스에 더 근사한 곳에 데려가지 않았다고 나 원망하는 건 아니죠?"


나는 진주를 슬쩍 쳐다봤다. 근사한 곳이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이곳에 온 것을 싫어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여기는 자주 와요?"


"가끔. 진주 생각이 날 때도 오고, 이 쿰쿰한 강아지들 냄새가 맡고 싶을 때도 오고, 죄 없는 눈망울을 들여다 보고 싶을 때도 오죠."


진주가 대답했다. 죄없는 눈망울이라. 

나는 봉구를 내려다 봤다. 봉구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앞을 보지 않아서 넘어지면 어쩌나 걱정될 정도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 봤다. 봉구의 눈빛에는 따뜻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의문도, 요구도, 의심도, 두려움도, 걱정도. 

나는 봉구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 더 열심히 들여다 보았지만 봉구가 원하는 것은 나 말고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조용한 호감에 마음이 든든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뭔줄 알고,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이렇게 든든한 호감을 보이는 건지. 대책 없는 봉구가 걱정스럽기도 했고. 


"봉구가 세련씨를 지나치게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요. 이따 헤어질 때 마음 좀 아프겠어요."


"이 아이들은 다 어떻게 돼요? 여기서 계속 살 게 되나요? 아니면 누군가 키우게 되나요?"


"글쎄. 일부는 입양이 될 수도 있겠고, 일부는 계속 여기에 남아있을 수도 있죠.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요."


"봉구는요?"


"봉구도 특별할 건 없죠. 봉구는 여기에서 태어났어요. 엄마가 임신한 채로 보호소로 들어왔거든요. 세 마리를 낳았는데 엄마랑 형제는 다 죽었어요. 봉구만 살았고. 그래서 보호소 직원분들이 신경 많이 썼어요. 언젠가 봉구를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생기면 입양 되겠죠. 왜요? 세련씨 봉구가 마음에 들어요?"


봉구가 또 코를 내 손에 쿡 찍었다. 나는 목 줄을 한 손에 다 움켜쥐고 남은 한 손으로 봉구의 목덜미를 슬쩍 긁어줬다.


"나는 동물을 키워 본 적이 없어요.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한번도요."


"왜요?"


"......엄마 대신 키워야할 동생들이 많았거든요. 힘들었어요. 뭘 더 키우고 싶단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어요."


봉구가 내 손가락을 핥았다. 서늘하게 촉촉한 코와는 다르게 따스하고 축축했다. 그 어느 것이든 나에겐 다 낯선 감각이었지만.


"나한텐 약간 꿈 같은 거에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 같은 거. 익숙한데 사실은 비현실적인 에피소드랄까? 키우고 싶어서 동물을 키운다는 거. 그냥 강아지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그걸 위해서 필요한 여러가지가 있잖아요."


"어떤?"


"돈, 시간, 정성, 애정. 다 합치면 에너지. 충분한 에너지."


"아, 다시 에너지!"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내가 만약 충분한 에너지가 생기면 시도해 보고 싶네요. 언젠가는. 상상해 보지 않았는데 그런 삶도 좋을 것 같아요."


나는 봉구의 이마와 귓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정말 널 키우고 싶은, 키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봉구의 죄 없는 눈망울이 아프게 맑았다. 내 눈은 이 강아지에게 어떻게 비칠까? 궁금하기도, 알고싶지 않기도 했다.

 

"에너지가 준비되면 그런 삶을 살 수도 있겠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에너지를 쓰기 위해 삶을 다시 세팅할 수도 있겠고요. 결과적으로는 같겠지만 과정은 좀 다르지 않을까요?"


진주가 쭈그리고 앉아 비닐에 강아지 똥을 주워담으며 말했다. 한 마리가 싸자 다른 강아지도 옆에서 힘을 줬다. 그리고 도미노처럼 모두 끙, 하며 힘을 주기 시작했다. 진주는 아이구 아이구 이놈들아, 하면서 황급히 강아지 똥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너무 웃기고도 이상적이라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산책길에 도합 여섯마리의 강아지들의 똥을 치우는 것이 일상인 사람의 삶. 시트콤 같은 에피소드만 연달아 터지는, 지루하지도 않지만 심각하지도 않은 삶. 

그 시트콤의 주인공이 된 나를 상상하며 하늘로 고개를 쳐들고 눈을 감은 채 숨을 한 껏 들이마셨다. 차갑지만 신선한 공기가 코로 들어와 바로 뇌를 식혀주는 것 같았다. 

속눈썹 위로 눈 송이가 사락 내려 앉았다. 온기에 녹아 금방 작은 이슬이 되고 또 다른 눈 송이가 내려와 녹았다. 눈을 간지럽히는 작은 물방울을 손으로 비벼 닦아내고 눈을 떠보니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 눈 오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겠어요!"


진주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들뜬 진주의 말투 때문인지, 설레는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었는지 강아지들이 헥헥 하는 소리를 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모두 웃는 얼굴이었다.





The Hermit(은둔자) : 내가 가진 관점과 생각을 버려야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 돈에 대한 탐욕 금지. 버리면 얻게 될 것이다. 편안한 연애이나 답답하고 진전이 없을 수 있음. 충실한 안내자.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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